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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사기/본기

한 무제(武帝)_ 혼군(昏君)과 명군(明君) 사이 1. 삼공(三公)과 구경(九卿) 사기(史記)를 읽다 보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지명(地名)이다. 현재의 중국도 성(城) 군(郡) 현(縣)등으로 나누어져 있고 그 지역이 정확히 어딘지 확인하려면 그 지도를 참조하여야만 알 수 있다. 그리고 두번째로 어려운 것이 왕과 제후의 연대이다. 각 나라마다 시호가 같은 왕들 령(靈)왕, 무왕(武王), 문왕(文王)등 같은 시호가 여럿 있어서 춘추(春秋)인지 전국(戰國)인지 조(趙) 나라인지 진(秦) 나라인지 알기 쉽지 않다. 그래서 반드시 연표를 보고 익혀야만 한다. 그 다음으로 어려운 것 중 하나가 이름이나 호 앞에 붙는 관직명이다. 이 관직이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하고 사기를 읽다 보면 이해도 측면에서 부족이 느껴질 것이다. 특히나 제도가 정비되기 시작한 진(..
문경지치(文景之治) 1. 명군(明君)과 명군(名君) 한국사 역사상 위대한 왕 즉 明君(명군)을 찾아본다면 그리 많지 않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영토를 넓힌 왕으로 이름난 名君(명군)이라 할 수 있지 明君(명군)의 반열에는 올리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고려시대 현종 또한 조선 세종대왕 다음 가는 성군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는 왕의 자리에 오른 후 각종 부역과 세의 부담을 줄이고 요의 침공으로부터 고려를 지켜내었으며 팔만대장경의 시초가 되는 초조대장경, 고려실록의 재 편찬 등의 일을 한 왕이다. 이를 기반으로 고려는 100여 년간 태평성세를 누리게 된다. 혹자들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4대 군주는 태종 이방원과 세종대왕, 영오, 정조대왕이 있다. 태종 이방원이 의외이긴 하나 신하들에게 무자비하고 백성들에게는 온화한 군주였다..
질투와 권력욕의 화신_여태후 여태후의 본병은 여치(呂雉)이다. 아버지 여공에 의해 패현에서 건달 노릇을 하던 유방에게 반강제로 결혼은 하였다. 당시 유방은 과부인 조 씨와 정을 통하여 훗날 제나라 왕이 되는 유비(劉肥)를 낳은 상태에서 여치를 본처로 맞아들인 것이다. 한고조 본기와 여태후 본기를 통해 그려지는 여태후의 파란만장한 삶을 들여다보면,평민의 여식으로 태어나 통일 한나라 황제의 황후로서 그 어느 누구도 가지지 못할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한왕으로 등극하는 시점부터 한고조와 부부로서의 관계는 소원해지고 본인이 누렸어야 할 여자로서의 행복은 척부인과 박부인 그리고 여러 후궁들(諸姬)에게 빼앗겨 버린 것이다. 한고조와 여태후사이에 적장자 유영(劉盈)과 노원공주를 낳게 된다. 이 유영이 훗날 효혜제가 된다. 사마천이 후대 역사..
초한쟁패_리더의 자격 1. 한나라 건국_유방 기원전 210년 진시황 영정이 순행 길에 죽음을 맞이한다. 영원불멸의 제국을 꿈꾸던 진시황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진 제국은 곧바로 불안과 혼란에 휩싸인다. 태자였던 부소는 이사와 환관 조고의 모략으로 자결하고, 호해를 2세 황제로 옹립한다. 이후 조고는 이사마저 모함으로 죽여버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호해를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린다. 그 이세와 환관 조고 사이에 유명한 사자성어가 지록위마[ 指鹿爲馬 ]이다 사슴을 가리키며 말이라 고 한 환관 조고의 위세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 환관 조고의 전횡으로 피폐해진 민중들이 들불처럼 들고일어난다. 중국을 하나로 묵은지 십여 년 만에 천하 대란이 다시 일어나며 온 천하가 들끓기 시작했다. 그 단초는 진승이라 하는 자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최초..
초한쟁패(楚漢爭覇) 의 시작 1. 항우(項羽) 항우(기원전 232 ~ 202) 이름은 적(籍) 자는 우(羽)이다. 전국시대 말 초나라 말 대장군 항연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 조국 초나라의 멸망을 겪었고 장성하여서는 진나라의 통일의 상황에서 삼촌 항량에게 맡겨져 몰락한 귀족 가문의 자제로 자라났다. 젊은 시절 키가 8척 큰 솥을 들어 올릴 정도로 힘이 장사여서 역발산기개세 (力拔山氣蓋世)란 말이 있을 정도였다. 항우의 품성을 알 수 있는 두 일화가 있다. 그 첫째가 삼촌 항량이 항우에게 글을 가르치고 검술을 배우게 하였으나 다 마치지 못하고 핑계를 댄 글이 있다. 項籍少時(항적소시),學書不成(학서불성),去學劍(거학검),又不成(우불성)。項梁怒之(향량노지)。 籍曰(적왈) 「書足以記名姓而已(서족이기명성이이)。劍一人敵(검일인적),不足學(..
진시황(秦始皇) 1.진시황의 역사적 평가 분서갱유를 자행한 폭군과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위대한 군주 진시황의 평가는 역사적으로 극명하게 나뉜다. 수많은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그당시 기술서적과 진나라에서 인정한 일부 유학책을 제외한 민간의 모든 책을 불살라 버리는 분서(焚書) 460명의 유학자와 방사를 구덩이에 묻는 갱유(坑儒)를 통해 형성된 폭군이라는 이미지 그리고 550년간 혼란의 춘추(春秋)전국(戰國)시대를 끝내고 중원의 평화를 가져온 군주 등이다. 전국시대 6개 경쟁국가를 멸하고 패자가 되어 그는 주나라의 호칭인 하늘의 아들 천자(天子)도 성에 차지 않았다. 영정은 세상에 처음 등장한 삼황오제(三皇五帝)의 후계로 만세를 여는 첫(始) 글자와 황제(皇帝)의 단어를 취하여 시황제라 칭하게 하였다. 시대..
진(秦)의 중국 통일과 진시황(秦始皇) 1. 최초 통일 국가 진(秦) 진(秦, 기원전 900년경 ~ 기원전 206년)은 중국 최초의 통일 왕조로, 동아시아 최초의 국가원수를 황제로 지칭한 제국이다. 국성은 영성 조 씨(嬴姓趙氏)또는 영성 진 씨(嬴姓秦氏)다. 중국 서역의 일개 부락에서 출발하여 주나라 때 제후국의 하나였다가 진 목공(穆公) 때 춘추오패의 자리로 올라서며 영토를 동으로 서로 확장하였으며 진 효(孝) 공때 상앙(商央)의 변법을 차용하며 전국시대 칠웅 중 가장 강력한 국력을 가진 국가로 탈바꿈하고 마침내 진왕 정(政:진시황) 때 전국을 통일하는 대업을 이룬다. 2. 진(秦)의 인재등용 진나라의 등장과 성공에 가장 요인 중의 하나가 바로 획기적 인재 기용책에 있다. 춘추 오패의 하나인 진 목공(穆公: 재위 BCE 659년 ~ 621년..
주본기_군주가 이(利)를 밝히고 좋아하면 1. 주나라의 흥망성쇠 주본기는 기원전 11세기 설립되어 기원전 770년 수도를 시안(西安, 서안)에서 낙양으로 옮기기 전의 서주(西周)와 제13대 평왕(平王) 때에 도읍을 장안(長安)에서 지금의 낙양으로 옮긴 후의 이름 東周시대로 나뉘며 주나라를 건국한 주 무왕(武王)부터 제37대 난 왕이 진(秦)에 멸망되기까지 약 800년간의 역사를 서술한다. 본기 편중에 가장 길며 이때부터 역사적 기록에 의한 중국 역사가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주나라의 시조는 후직으로 요임금의 농관(農官)이 되었고 순임금이 태(邰)에 봉토를 주어 후직이 되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직(稷)의 의미를 유추해보면 본격적인 농경사회의 시작을 즉 유목생활에서 정착생활로 사회구조가 바뀌는 과정에서 나타난 상징적 인물이라 유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