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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사기/본기

문경지치(文景之治)

 

 

1. 명군(明君)과 명군(名君)

 

한국사 역사상 위대한 왕 즉 明君(명군)을 찾아본다면 그리 많지 않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영토를 넓힌 왕으로 이름난 名君(명군)이라 할 수 있지 明君(명군)의 반열에는 올리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고려시대 현종 또한 조선 세종대왕 다음 가는 성군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는 왕의 자리에 오른 후 각종 부역과 세의 부담을 줄이고 요의 침공으로부터 고려를 지켜내었으며 팔만대장경의 시초가 되는 초조대장경, 고려실록의 재 편찬 등의 일을 한 왕이다. 이를 기반으로 고려는 100여 년간 태평성세를 누리게 된다. 혹자들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4대 군주는 태종 이방원과 세종대왕, 영오, 정조대왕이 있다. 태종 이방원이 의외이긴 하나 신하들에게 무자비하고 백성들에게는 온화한 군주였다고 역사는 평가한다. 그리고 세종대왕은 누가 무어라 해도 한글 창제의 위대함은 어디에도 견줄 수가 없는 뛰어난 업적이다. 물론 이러한 성과를 이룰 수 있었던 바탕은 그의 아버지 태종 이방원의 정적의 숙청으로 말미암은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영조는 齊家(제가)는 실패하였지만 어진 정치를 통해 조선이라는 나라를 경제적으로 상당히 안정시키고 탕평책을 통해 정치 안정에 공이 상당한 군주였다. 마지막으로 개혁 군주 정조대왕이다. 신하의 나라 조선에서 왕과 신하간의 권력의 균형점을 찾으려 했고 영조가 이룩한 경제적 부를 바탕으로 각종 제도를 개혁 혁파하여 후기 조선의 부흥을 이끌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단명하였다.

 

대학(大學)의 팔조목(八條目) 중 수신 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모두 다 이룩한 군주를 명군(明君)또는 성군(聖君)이라 한다. 이를 미루어 보자면 명군(名君)은 다수가 있어도 명군(明君)이라는 칭호를 붙이기에는 다소 부족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개인적인 의견을 전제로 하고 한국사 전체를 들어 명군(明君)이라 부를 수 있는 왕은 세종대왕 정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 중국의 명군(明君)

하 순임금,  한 문제, 당 태종, 청 강희제

 

중국 역사상 많은 군주가 있지만 明君(명군)으로써 일컬어지는 군주는 그리 많지 않다. 하나의 왕조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한다. 그 중 역사적 기록으로 증명되는 왕들 중 공자가 칭송하였던 순(舜) 임금,한나라 문경 지치(文景之治)의 토대를 세운 한 효문제(孝文帝), 그리고 중국 최고의 융성기 정관의 치(당 태종의 연호인 정관(貞觀:627―649) 시대에 이룩한 빛나는 정치)를 이끌었던 당태종, 그리고 청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으로 위대한 황제였던 강희제를 들 수 있다. 이들은 명군(明君)이면서 명군(名君)이었다.

 

문경지치, 정관지치 등에 붙는 치()는 다스려지는 시대를 말하며 이는 정치 군사 외교 그리고 민생까지 안정과 번영을 누리는 시대를 말하며 특히나 백성의 평안함을 추구한 군주시대에 부여되는 최고의 찬사이다. 즉 태평성세(太平聖歲)를 이르는 말이다.

 

중국의 역대 왕조를 나열해 본다면 하() () () () () 양진(兩晉) () () () () () () 12개 왕조3500여 년 동안 이름난 명군(名君)은 많았으나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의 군주로서의 덕성을 모두 지닌 군주는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다. 그 중 가장 빼어난 성군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왕이 바로 한 효문제(孝文帝)이다. 사마천 사기에 곳곳에 들어 있는 한 효문제에 대한 기록은 정치의 본령이 진정으로 백성을 위하는(爲民) 것임을 잘 드러내어 준다.   

 

3. 효문제의 덕성(德性)

 

유항(劉恒)은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넷째 아들로 처음에 대왕(代王)에 책봉되어 중도(中都)에 도읍했다가 여씨(呂氏)의 난이 평정된 뒤 태위(太尉) 주발(周勃)과 승상 진평(陳平) 등 중신의 옹립으로 제위에 올랐다. 여태후 본기에서 보이는 유 씨 왕 제후들을 숙청작업에서 효문제 유항이 벗어나 있었던 이유를 역사를 통해 미루어 본다면 박(薄) 부인의 덕성이 여태후 여치의 질투의 칼날에서 비껴 날 수 있었고, 효문제의 기본적인 삼가하고 조심하는 덕성이 평소 행동거지에 드러나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태위 주발과 승상 진평이 대왕을 옹립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었을 때 신중에 신중을 기하며 첫째로 중신들에게 물었고, 두 번째 그의 어머니인 박태후에게 알리고 상의했으나 결정에 신중하였고, 마지막으로 태후의 동생 박소를 보내어 강후를 만나게 하고 확인한 후 장안으로 향해 간 것이다주발과 진평이 부절과 옥쇄를 바치는 과정에서도 그의 기본적인 품성이 나타난다. 노자지족불욕 지지불태(知足不辱 知止不殆)’ 와 맞닿아 있기도 하다.

 

代王曰(대왕왈):「奉高帝宗廟(봉고제종묘),重事也(중사야)。寡人不佞(과인부녕),不足以稱宗廟(부족이칭종묘)。願請楚王計宜者(원청초왕계의자),寡人不敢當(과인부감당)。」群臣皆伏固請(군신개복고청)代王西讓者三(대왕서향양자삼),南讓者再(남향양자재)丞相平等皆曰(승상평등개왈):「臣伏計之(신복계지),大王奉高帝宗廟最宜稱(대왕봉고제종묘최의칭),雖天下諸侯萬民以(수천하제후만민이위의)。臣等宗廟社稷計(신등위종묘사직계),不敢忽(부감홀)。願大王幸聽臣等(원대왕행청신등)。臣謹奉天子璽符再拜上(신근봉천자새부재배상)。」代王曰(대왕왈):「宗室將相王列侯以莫宜寡人(종실장상왕렬후이위막의과인),寡人不敢辭(과인부감사)。」遂即天子位(수즉천자위)

 

(중략)…..군신들이 모두 엎드려 간곡하게 청하였다. 대왕 유항이 서쪽을 향해 세 번 사양하고 남쪽을 향해 앉기를 두 번 사양했다……

 

 

4. 위민(爲民) 정치의 시작_연좌제 폐지

 

상앙, 효공당시 연좌법

한고조 천하를 통일하고 약법삼장(約法三章)으로 민간이 주도하는 시장경제에 의해 한(漢) 나라의 부()는 쌓여만 간다. 여태후와 유 씨 제후들 간의 정쟁(政爭) 또한 그들만의 다툼으로 백성들의 삶에는 별다른 피해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여씨 천하가 끝이 나고 효문제는 등극과 동시에 백성들을 위무(慰撫)하려 천하에 사면령과 백성들의 작위를 한 등급씩 올려주고 닷새 동안 주연을 베푼다. 그리고 공신들에게 논공행상을 하고 여씨 일족에게 땅을 빼앗겼던 제후들에게 돌려준다.

 

또한 많은 신하들이 반대를 함에도 불구하고 연좌제 폐지를 의논하라고 한 것이다. 이 또한 황제의 권위에 의한 명령의 하달이 아닌 신하들이 논의를 하라고 말한 것이다. 기본적인 법 운영의 원칙 첫 번째가 백성을 위함에 바탕 둔 법 운영인 것이다. 법에 의한 통치가 우선이 아니라, 백성을 위한 통치에 법은 수단인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위민(爲民)을 분명히 한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23여 년간 한나라를 이끌어간다. 두 번째는 법의 공정성을 말한다. 법의 시행은 관리로부터 나오고 그 관리들이 공정하지 못한 법 집행을 우회적으로 비판을 한 것이며 이를 깨우치는 논리인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 善政(선정)을 말하고 있다. 관리들이 법을 적용하기 이전에 선한 정치를 행한다면 백성들이 법을 어길 일도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연좌제에 대한 깊은 이해와 그 민중에 끼치는 해악에 대한 이해가 연좌제 폐지를 대신들에게 논리를 들어 說服(설복)시킨 것이다.

 

효문제 본기 중

 

「法者(법자),治之正也(치지정야),所以禁暴而率善人也(소이금폭이솔선인야)今犯法已論(금범법이론),而使毋罪之父母妻子同坐之(이사무죄지부모처자동산좌지),及收帑(급위수탕),朕甚不取(짐심부취)。其議之(기의지)」有司皆曰(유사개왈):「民不能自治(민부능자치),故為法以禁之(고위법이금지)。相坐坐收(상좌좌수),所以累其心(소이루기심),使重犯法(사중범법),所從來遠矣(소종래원의)。如故便(여고편)。」上曰(상왈)「朕聞法正則民愨(짐문법정칙민각),罪當則民從(죄당칙민종)且夫牧民而導之善者(차부목민이도지선자),吏也(리야)。其不能導(기기부능도),又以不正之法罪之(우이부정지법죄지),是反害於民暴者也(시반해어민위폭자야)。何以禁之(하이금지)?朕未見其便(짐미견기편),其孰計之(기숙계지)。」司皆曰(유사개왈):「陛下加大惠(폐하가대혜),德甚盛(덕심성),非臣等所及也(비신등소급야)。請奉詔書(청봉조서),除收帑諸相坐律令(제수탕제상좌률령)。」

 

 

법이란 나라를 다스림의 기준으로 포악함을 금해 사람을 선하게 이끄는 도구이다.  지금 법을 어겨 처벌을 받았는데도 죄 없는 부모와 처자와 형제자매가 연좌되어 관의 노비로 삼는 것은 짐은 이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그것을 논의하라.

………중략…….

 

“짐이 듣건대 법령이 공정하면 백성들이 성실해지고, 처벌이 타당하면 백성들이 복종한다고 했다. 또 백성을 다스려 선행으로 이끄는 것이 관리이다. 그렇게 이끌지도 못했으면서 또 바르지 못한 법으로 죄를 다스리면 이는 오히려 백성에게 해를 주는 포악한 짓이다. 어찌 범죄를 금할 수 있겠는가? 짐은 연좌제의 편리한 점을 보지 못했으니 이를 깊이 생각해 보라.”   ….중략…

 

5. 효문제의 인정(仁政)

 

효 문제는 자신을 돌아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늘이 이 땅에 사람들을 자라게 하고 그들을 양육하려 왕을 만들어 다스리게 하는 참뜻을 말한다. 즉 군가 부덕하고 정치를 펴는 것이 고르지 아니하여 하늘이 재앙으로서 보여주며, 治世(치세)가 되지 않음을 경계하여 일식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논어에 나오는 증자의 일일 삼성(一日三省)을 넘어서 일식(日食)의 상황을 미루어 스스로를 돌아보며 그 실천 항목을 뭇 대신들에게 조령으로 내리는 글이 있다. 자연 현상의 하나인 일식을 통해 스스로 행한 국정을 돌아보고 자신의 권위에 눌려 있는 신하들을 일깨우는 말을 한다. 스스로 권위를 내세우지 않으며 스스로 부족하다 여겨 그것을 일깨워 줄 수 있는 신하를 천거하라는 令()을 내리고 충간(忠諫)과 직간(直諫)을 할 수 있는 자를 천거하라 명한다. 스스로를 낮추어 爲民(위민) 정치에 임하는 모습을 신하들에게 몸소 보인 것이다.

 

효문 본기 중

 

이 조령(詔令)이 이르면 짐의 과실을 비롯해 짐의 지혜와 식견과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바들을 두루 짐에게 알리도록 하라. 賢良(현량)하며 정직하여 직언하고 극간할 수 있는 자를 천거하여 짐의 생각지 못한 것을 보조하고자 한다.

 

令至(령지),其悉思朕之過失(기실사짐지과실),及知見思之所不及(급지견사지소부급),以告朕(개이고짐)。及賢良方正能直言極諫者(급거현량방정능직언극간자),以匡朕之不逮(이광짐지부체)。因各飭其任職(인각칙기임직),務省繇費以便民(무성요비이편민)。朕既不能遠德(짐기부능원덕),故憪然念外人之有非(고한연념외인지유비),是以設備未息(시이설비미식)。今縱不能罷邊屯戍(금종부능파변둔수),而又飭兵厚衛(이우칙병후위),其罷衛將軍軍(기파위장군군)。太仆見馬遺財足(태부견마유재족),餘皆以給傳置(여개이급전치)。

 

 

그리고 송나라 등문고와 조선시대 신문고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한다. 이는 요임금이 처음 시행했다는 진선지정(進善之旌)과 비방지목(誹謗之木)이라는 제도이다. 진선지정(進善之旌) 진선정(進善旌)을 사방으로 통하는 길거리에 설치하여 백성들 가운데 훌륭한 말을 올리고자 하는 자로 하여금 깃발 아래에 서서 말하게 하하고, 비방지목(誹謗之木) 조정에 대한 비평을 나무 패찰에 쓰게 하였다.

 

문제는 여기에 더하여 民意(민의)가 비록 왜곡될 수 있을지언정 그 언설(言說)한 자에게 죄를 묻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그 당시 비방죄와 요언죄에 대한 폐해가 있어서 자신의 정치의 잘못된 점과 대신 관리들의 실정(失政)이 드러날 수 없는 현실을 자각하고 내린 황제의 칙령이다. 지금 시대의 법으로 본다면 찬양고무죄, 국가원수 모독죄, 인격 모독죄 등이 될 수 있다. 이 제도는 효문제가 언론의 통제 없이 민의가 자유로운 유통을 통해 행해지는 것을 보장한 것이다. 당시로는 파격이고 획기적인 것이었고, 지금 이 시대 어느 나라의 법도 이보다 더한 언론의 자유는 없는 것이.

 

효문 본기 중

 

황제가 말했다.

 

“옛날 선왕이 천하를 다스릴 때는 훌륭한 말()을 올리는 정기(旌旗)와 조정을 비평하는 나무 패찰(木碑)이 있었으니 이는 통치의 도를 통하게 해서 간언 하는 자들을 오게 하려는 것이었다. 지금 법에는 비방죄(誹謗罪)와 요언죄(妖言罪)가 있어 이는 여러 신하들이 그 실정을 감히 다 드러내지 못하게 해서 황제는 과실을 들을 길이 없게 되었다. 어찌 먼 지방의 어질고 선량한 자들을 오게 할 수 있겠는가? 그 법령을 없애도록 하라. 백성들이 혹 황제를 저주하고 말하지 않기로 약속했다가 후에 서로 약속을 어겨서 관리들이 대역죄로 다스리고, 불평을 하면 또 비방한 죄로 다스린다.

이는 비천한 백성이 어리석어 죽을죄를 범하는 것을 모르는 것이니 짐은 심히 받아들일 수 없다. 지금부터 이런 죄를 범하는 자가 있어도 죄로 다스리지 말도록 하라.”

 

上曰(상왈):「古之治天下(고지치천하)朝有進善之旌(조유진선지정),誹謗之木(비방지목)所以通治道而來諫者(소이통치도이래간자)。今法有誹謗妖言之罪(금법유비방요언지죄),是使眾臣不敢盡情(시사중신부감진정),而上無由聞過失也(이상무유문과실야)。何以來遠方之賢良(장하이래원방지현량)?其除之(기제지)。民或祝詛上以相約結而後相謾(민혹축저상이상약결이후상만),吏以為大逆(리이위대역),其有他言(기유타언),而吏又以為誹謗(이리우이위비방)。此細民之愚無知抵死(차세민지우무지저사),朕甚不取(짐심부취)。自今以來(자금이래),有犯此者勿聽治(유범차자물청치)。」

 

6. 효문제의 덕치(德治)_육형의 폐지

 

효문제 당시에도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제후와 반역을 도모하는 제후들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흉노의 변방 침략이 끊이질 않았다. 제북왕 유흥거가 반란을 일으키자 그를 따라 관리와 백성들은 반란에 가담하였다. 반란이 진압되자 효문제는 모든 책임을 제북왕으로 돌리고 반란에 가담하였던 제북의 관리와 백성들을 사면하고 용서하였다.

 

효문제 6년 회남왕 유장이 선대가 세운 법을 폐지하고 천자의 조회(朝會)에도 참석 하지 않았으며 천자 행세를 하며 반란을 꾀하였다는 보고를 받았다. 많은 대신이 유장의 참수와 봉국 몰수를 청하자 효문제는 차마 형제로서 그리하지 못하고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유배지로 보내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셋으로 하여금 회남왕 형산왕 여강 왕으로 삼게 하였다. 즉 법에 의한 처결보다 덕치로서 다스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13년 봉선 행사에서 마저도 스스로의 부덕함을 경계하며 제를 지낸다. 어느 한 구절 버릴 것이 없는 스스로의 성찰을 보여주는 명문이기도 하다.

 

효문 본기 중

 

“내가 하늘의 도를 들어보니 재앙은 원망에서 비롯되고복은 덕으로부터 일어난다고 했다. 백관의 잘못은 당연히 내 자신에게서 비롯된다. 지금 제사를 담당하는 비축(祕祝관리들이 잘못을 모두 대신들에게 돌려 내가 덕이 없음을 드러나게 하고 있으니 짐은 실로 받아들일 수 없다마땅히 이러한 법은 없애야 한다.

 

 

十三年夏(십삼년하),上曰(상왈):「蓋聞天道禍自怨起而福繇德興(개문천도화자원기이복요덕흥)。百官之非(백관지비),宜由朕躬(의유짐궁)。今祕祝之官移過于下(금비축지관이과우하),以彰吾之不德(이창오지부덕),朕甚不取(짐심부취)。其除之(기제지)。」

 

 - 肉刑(육형)의 폐지

중국 고대 육형

 

중국의 고대 형벌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신체를 손상시키는 형벌이며, 죄의 경중에 따라 손상시키는 신체의 부위가 달랐는데, 이마에 죄명을 입묵(入墨) 자자(刺字)하는 경() 또는 묵(), 발꿈치를 자르는 비(), 코를 베는 의(), 생식기를 거세하거나 유폐하는 궁(), 죽이는 대벽(大辟) 등이 있었다. 이 외에도 상기 그림과 같이 목을 톱으로 자르거나, 포를 떠는 육장, 삶아 죽이는 팽형, 압살형 무릎 관절을 파내는 형벌 달군 쇠기둥을 안게 하는 포락형 등이 있다. 육형의 폐지는 한 문제의 위민(爲民) 사상의 하나인 民本(민본)의 의도가 잘 드러나는 정책 중 하나이다.

 

효문제는 법령의 엄혹함으로도 지금의 범죄가 줄어들지 않음을 말한다. 그 근본적인 이유를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박덕(薄德)함과 교화(敎化)에 밝지 못함을 탓하는 것이다. 백성이 죄를 짓는 것은 것은 정치가 올바로 행하여지지 않고 법이 바로 서지 못한 것을 말한다. 백성의 잘못함에 있어 먼저 교화를 충실히 하지 않고 법리만 적용을 한다는 것은 위정자의 부덕과 무능을 탓하는 것이다. 그리고 팔다리가 잘리고 피부가 도려내어지는 형벌의 잔혹성에 대한 문제를 말하고 폐지를 말하고 있다.

 

효문제의 논리의 전개와 신하들을 설득하는 글을 사마천을 통해 본다. 읽다 보면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는 명문장임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효문 본기 중

 

오월(五月),제태창령순우공유죄당형(齊太倉令淳于公有罪當刑),조옥체사계장안(詔獄逮徙系長安)。태창공무남(太倉公無男),유녀오인(有女五人)。태창공장행회체(太倉公將行會逮),매기녀왈(罵其女曰):「생자부생남(生子不生男),유완급비유익야(有緩急非有益也)!」기소녀제영자상읍(其少女緹縈自傷泣),내수기부지장안(乃隨其父至長安),상서왈(上書曰):「첩부위리(妾父為吏),제중개칭기렴평(齊中皆稱其廉平),금좌법당형(今坐法當刑)。첩상부사자부가복생(妾傷夫死者不可復生),형자부가복속(刑者不可復屬),수복욕개과자신(雖復欲改過自新),기도무유야(其道無由也)。첩원몰입위관비(妾願沒入為官婢),속부형죄(贖父刑罪),사득자신(使得自新)。」서주천자(書奏天子),천자련비기의(天子憐悲其意),내하조왈(乃下詔曰):「개문유우씨지시(蓋聞有虞氏之時),화의관이장복이위륙(畫衣冠異章服以為僇),이민부범(而民不犯)。하칙(何則)?지치야(至治也)。금법유육형삼(今法有肉刑三),이간부지(而姦不止),기구안재(其咎安在)?비내짐덕박이교부명여(非乃朕德薄而教不明歟)?오심자괴(吾甚自愧)。고부순도부순이우민함언(故夫馴道不純而愚民陷焉)。《시(詩)》왈(曰)『개제군자(愷悌君子),민지부모(民之父母)』。금인유과(今人有過),교미시이형가언(教未施而刑加焉)?혹욕개행위선이도무유야(或欲改行為善而道毋由也)。짐심련지(朕甚憐之)。부형지단지체(夫刑至斷支體),각기부(刻肌膚),종신부식(終身不息),하기초통이부덕야(何其楚痛而不德也),기칭위민부모지의재(豈稱為民父母之意哉)!기제육형(其除肉刑)。」

 

중략.... " 소첩이 가슴 아픈 것은 무릇 사형을 당한 자는 다시 살아올 수 없고, 육형을 당한 자는 다시 이어 붙일 수 없으니 비록 잘못을 고쳐 스스로 새사람이 되고자 해도 방법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소첩의 한 몸을 관비로 바쳐 부친이 받게 된 형벌을 대신 갚아 부친이 새사람이 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이 글을 천자에게 상주하니 천자는 그녀의 뜻을 가련히 여겨 곧 이렇게 조서를 내렸다.

“듣자 하니 순임금의 시대에는 옷이나 모자에 그림으로 장식하거나 특이한 복장을 입게 하는 치욕을 주었으나 백성들은 법을 범하지 않았다고 한다어째서인가다스림이 지극했기 때문이다지금의 법에는 육형이 세 가지나 있는데도 범죄가 그치질 않으니 그 잘못이 어디에 있는가? 바로 짐의 덕이 박하고 교화가 밝지 못한 탓이 아니겠는가내가 심히 스스로 부끄럽다. 그러니 무릇 교화의 방법이 불순하면 어리석은 백성이 범죄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시경>에 이르기를 ‘온화하신 임금님백성의 부모로다.’라고 하였다그런데 지금은 백성들이 잘못을 하면 교화도 하지 않고 벌부터 가하지 않는가혹은 행동을 고치고 선을 행하려고 해도 그럴 길이 없는 것이다. 짐은 그들을 몹시 가련하게 생각한다. 무릇 팔다리가 잘리고 근육과 피부를 도려내는 형벌을 받으면 평생 자랄 수 없으니 이 얼마나 아프고 괴로우며 부덕한 일이겠는가이것이 어찌 백성의 부모 된 자의 뜻이라 하겠는가마땅히 육형을 없애야 한다.

 

 

6. 효문제의 유언(遺言)

 

효문제 본기에는 황제라 유조(遺詔)라 하였다. 황제가 이승을 떠나기 전 남긴 마지막 조령(詔令)이다. 이를 미루어 보면 공자가 말한 군주의 참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유가를 떠나 법가 도가 등의 어떠한 이상적 형태의 군주도 효문제보다 더 나은 군주가 있을까 생각해본다. 효문제가 하늘의 대리자로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 또한 그의 수신(修身)과 신하와 백성(百姓)에 대한 애정, 그리고 마지막으로 효()의 확장인 자연에 대한 사랑이었다. 23년 동안 인의(仁義)에 기반한 통치로서 위민(爲民)을 기본에 두고 교화와 법리를 정용하며 다스렸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묵가의 절장((節葬; 장례식을 절약함)과 맥을 같이 한다. 효문제는3 일상을 명한다. 기존 유가적 기준은  3년상을 기준으로 하는 상례(喪禮)를 따르지 말라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유가적 예법이 백성의 생활에 지장을 주거나 지나친 비용이 들어가는 예법을 모두 없애라 조령을 내린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패릉 근처의 자연은 훼손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인문을 하고 철학을 하는 이유를 효 문제는 이야기한다. 즉 죽음 앞에서 담담할 수 있는 용기와 삶을 스스로 정리하는 침착함을 두 줄의 글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듯 효 문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위대한 군주의 표상이 되었다.

 

효문제는 죽음을 앞에 두고 유언 첫머리에 이와 같은 말은 남긴다.

「朕聞蓋天下萬物之萌生(짐문개천하만물지맹생),靡不有死(미부유사)。死者天地之理(사자천지지리),物之自然者(물지자연자),奚可甚哀(해가심애)。

“짐이 듣기에 천하 만물은 싹트고 자라나 죽지 않는 것은 없다고 했다죽음은 천지의 이치요만물의 법칙이니 어찌 심히 슬퍼할 일이 있겠는가?

 

효문 본기 중

 

朕聞蓋天下萬物之萌生(짐문개천하만물지맹생),靡不有死(미부유사)。死者天地之理(사자천지지리),物之自然者(물지자연자),奚可甚哀(해가심애)。當今之時(당금지시),世咸嘉生而惡死(세함가생이악사),厚葬以破業(후장이파업),重服以傷生(중복이상생),吾甚不取(오심부취)

 

짐이 듣기에 천하 만물은 싹트고 자라나 죽지 않는 것은 없다고 했다죽음은 천지의 이치요, 만물의 법칙이니 어찌 심히 슬퍼할 일이 있겠는가지금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사는 것을 기뻐하고 죽음은 슬퍼하여 장례를 거창하게 치르느라 생업까지 파괴하고 거상을 중히 여겨 산 사람을 상하게 만드니 나는 심히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중략….

 

令到出臨三日(령도출림삼일),皆釋服(개석복)。毋禁取婦嫁女祠祀酒食肉者(무금취부가녀사사음주식육자)。自當給喪事服臨者(자당급상사복림자),皆無踐(개무천)帶無過三寸(질대무과삼촌),毋布車及兵器(무포차급병기),毋發民男女哭臨宮殿(무발민남녀곡림궁전)。宮殿中當臨者(궁전중당림자),皆以旦夕各十五(개이단석각십오거성),禮畢罷(례필파)非旦夕臨時(비단석림시),禁毋得擅哭(금무득천곡)。已下(이하),服大紅十五日(복대홍십오일),小紅十四日(소홍십사일),纖七日(섬칠일),釋服(석복)。佗不在令中者(타부재령중자),皆以此令比率從事(개이차령비솔종사)。布告天下(포고천하),使明知朕意(사명지짐의)。霸陵山川因其故(패릉산천인기고),毋有所改(무유소개)。歸夫人以下至少使(귀부인이하지소사)。」

 

천하의 관리와 백성들은 이 조령이 이르거든 사흘이 흐르면   모두 상복을 벗도록 하라. 백성들이 장가가고 시집가고 제사 지내고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일을 금하지 말라. 본래 마땅히 상복을 입고 곡을 해야 하는 이들도 모두 맨발로 있지 않도록 하라. 상복의 띠는 세 치를 넘지 않도록 하고수레와 병기를 늘어놓지 마라. 백성 가운데 남녀를 징발하여 궁전에서 곡하는 일도 하지 마라. 궁전에서 곡을 해야 하는 이들은 모두 아침저녁으로 각각 열다섯 번만 하고 예가 끝나면 그만두도록 하라. 아침저녁으로 곡을 할 때가 아니면 마음대로 곡하지 않도록 하라. 하관이 끝나면 대공복(大功服) 15, 소공복(小功服)은 14삼베옷은 7일을 입고서 벗도록 하라기타 이 조령에 포함되지 않은 일들은 모두 이 조령을 기준으로 삼아 따르도록 하고, 천하에 포고하여 짐의 뜻을 분명하게 알리도록 하라. 패릉의 산천은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하고 고치는 일이 없게 하라. 후궁은 부인 이하 소사(少使)까지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도록 하라.

 

효문제 때 폐지하였던 육형(肉刑)이 한 무제(武帝) 때 다시 부활한다. 그 대표적인 피해자가 사마천이다. 본기의 기록에서나 봉선서 평준서 열전의 기록에서 무제(武帝)의 치적보다 실정(失政)을 많이 보이는 것은 아마도 사마천의 개인적인 필주(筆誅)로 보이기도 한다. 한 경제(景帝)는 그의 아버지 문제의 정치적 지척을 그대로 이어받아 문경지치라는 중국 왕조의 몇 안 되는 치세(治世)를 이룩한다.마지막으로 사마천의 평으로 위대한 황제 효문 본기를 마무리한다.

 

 

태사공이 말하였다.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반드시 한 세대가 지난 뒤에야 백성들이 교화될 것이다. 선한 사람이 나라를 100년을 다스려야 잔학한 사람을 교화시키고 사형(死刑)을 없앨 수 있다.’고 했다. 참으로 옳다이 말이여! 한나라가 건국되어 효문제에 이르기까지 40여 년이 넘어서야 덕정(德政)이 절정에 이르렀다. 문제가 서서히 역법과 복색을 고치고 봉선을 지내는 일까지 나아가야 하나 겸양 때문에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이 어찌 어진 정사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