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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사기/본기

초한쟁패_리더의 자격

 

 

1. 한나라 건국_유방

 

한고조 유방과 전한시대지도

 

기원전 210년 진시황 영정이 순행 길에 죽음을 맞이한다. 영원불멸의 제국을 꿈꾸던 진시황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진 제국은 곧바로 불안과 혼란에 휩싸인다. 태자였던 부소는 이사와 환관 조고의 모략으로 자결하고, 호해를 2세 황제로 옹립한다. 이후 조고는 이사마저 모함으로 죽여버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호해를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린다. 그 이세와 환관 조고 사이에 유명한 사자성어가 지록위마[ 鹿 ]이다 사슴을 가리키며  말이라 고 한 환관 조고의 위세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 환관 조고의 전횡으로 피폐해진 민중들이 들불처럼 들고일어난다. 중국을 하나로 묵은지 십여 년 만에 천하 대란이 다시 일어나며 온 천하가 들끓기 시작했다. 그 단초는 진승이라 하는 자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최초 농민반란인 진승 오광의 난에서 진시황의 통일 대업은 허무하게 스러져 버린 것이다.

 

 

기원전 247년 초나라 패현 풍읍에서 태어난 유방은 항우와 초한 쟁패에서 승리하며 천하를 손에 넣는다. 중국 통일 왕조 한나라를 건국한 창업 군주이자 초대 황제이다. 중국 역사상 한족(漢族)이 세운나라는 한(漢) 나라와 명(明) 나라이다.공교롭게도 두 나라 모두 건국시조는 평민 출신이고, 둘 다 숙청의 황제로 유명하다. () 말기 진승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王侯將相寧有種乎?)". 를 외치며 민중봉기를 하였다. 이는 평민과 귀족 제후의 씨가 따로 없다 능력만 있으면 누구나 될 수 있다’라는 말이다. 한 고조 유방이 중원을 통일한 뒤부터 황제의 자리는 존귀한 그리고 하늘이 내려주는 자리가 아니라 평민도 황제가 될 수 있음을 만천하에 고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한고조 유방은 중국 역사상 최초 귀족이나 제후가 아닌 평민 출신 황제로 피지배층에서 황제라는 최고의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명나라 창업 군주 주원장 태조 고황제(홍무제)도 고아출신에서 출발 원나라를 몽골지역으로 몰아내고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황제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이전 왕조의 시조는 대부분 신성함을 내세우고 하늘의 대리를 칭하며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한 고조의 등장은 신성한 하늘의 대리자가 아니라 지상의 민중들의 뜻에 의해 추대된 왕이었다. 즉 민중들 옆 현실에 살아 숨쉬면서 집단을 이끄는 정치 지도자의 선례를 보여준다. 그러나 사마천 사기에는 한고조 유방이 황제가 되는 정당성이 부족함을 메워 주는 여러 신화적 요소를 가미한다. 태몽에 교룡이 나왔다는 것, 술집주인인 왕온과 무부가 그의 아우라에서 용을 보았다는 것 등이다. 이런 여러 가지 증언을 통해 평민인 유방이 황제로서의 정당성을 부족을 메워 보여주려 한 것이다. 

 

젊은시절 유방은 단지 술을 좋아하고 여자를 밝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마디로 동네 건달이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사마천이 사기를 지을 당시는 엄혹한 한무제(武帝)의 시대였다. 당시 한()나라 창업 군주에 대한 묘사로는 너무나 사실적으로 되어있다. 초한 쟁패에서 승리의 일등공신들 중 패(沛) 현 사람들의 기록을 보자면 번쾌는 개백정이었고, 주발은 나팔수, 하후영은 현청마부, 노관은 백수로 나와 있다. 소하 조참을 제외하면 좋게 말하면 의협 집단이었고 나쁘게 표현하면 패현 동네 건달과 장사치 출신이었던 것이다. 사마천이 사기에서 보여준 사실(事實)에 대한 기록이 너무 적나라하여 한 고조부터 한 무제까지의 기록으로는 도저히 편찬할 수 없는 기록들이 곳곳에 보인다. 훗날 유방이 황제가 되어 그의 아버지 태상황에게 "저보고는 생업도 못 꾸리고 작은 형처럼 노력도 안 한다고 하셨는데, 지금 보면 어떻습니까?”라고 묻는 기록이 있다. 이를 미루어 보더라도 한집안의 문제아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2. 사마천의 평가_필주(筆誅)

 

사마천의 필주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고 한 고조나 한 무제의 잘못을  당대 본기(本紀) 안에 싣지 않고 항우 본기 또는 세가, 열전 봉선서 등에 교묘하게 끼워 넣어 보는 이로 하여금 숨은 그림 찾기를 하게 한다.이러한 수법은 책이 출간되었을 때 한 왕조가 알지 못하게 하는 베일 같은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고조의 과오를 항우본기에 그리고 세가에 실어 꾸짖고 한 무제의 잘못은 봉선서에서 제사와 신선술에 심취한 것을 지적한다. 공통점 중 하나는 치적에 대해 박하게 기술되고 실수나 오류의 흔적을 군데군데 슬쩍 끼워놓는 방법으로 한(漢) 왕조의 실적(失跡)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번역 관등 열전에서 유방의 인간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글이 있다. 한왕 2(BC205) 한왕이 된 고조가 삼진을 아우르고 56만 제후 연합군을 이끌고 서초패왕 항우와 싸우다 팽성 전투에서 대패하고 달아날 때 하후영은 유방을 마차에 태워 달아나다 혜제와 노원 공주를 발견한다. 이에 하후영은 그들을 태우고 수레를 몰고 간다.전세가 위급하고 지쳐 사로잡힐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한왕 유방은 혜제와 노원공주를 밀어 떨어트린다. 하후영은 그때마다 그들을 다시 태우고 초나라 군위 포위망으로부터 달아난다. 사마천이 하고 필주(筆誅)하려는 것은 한고조의 패륜적인 인성 그리고 위험한 상황에서 명예를 모르는 군주 이전의 한 인간 군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유방은 항우와 싸우는 4년 동안 분봉제를 실시한다. 그는 한신 팽월 등명의 이성왕(異姓王)을 봉한다. 그는 동시에 군현제도 실시한다. 항우와 천하를 쟁탈하는 동시에 그는 이미 자신의 영토에 18개군을 설치했던 것이다. 이것은 천하를 안정시킨 이후에 이성(異姓)왕들을 없애려는 계략이 이 당시부터 있었다. 이는 훗날 황제가 되고 난 후 7년 동안 이성왕(異姓王)들에 대한 반란을 획책하게 만들어 그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간다. 선두로 정벌하거나 처리한 제후 왕은 임강 왕 공환, 연왕 장도, 한왕, 조왕 장오와 조나라 상국 관고, 대산왕 진희, 제왕에서 초왕으로 옮기고 다시 회음 후로 신분이 강등된 한신 및 양왕 팽월, 회남왕 영포, 연왕 노관이었다. 이들 창업공신의 숙청에서도 한고조의 냉혹함과 잔학함이 잘 드러나고 있다.

 

-. 토사구팽[  ]

이 말은 사기에 두 번 나온다. 춘추시대 월나라 구천을 도와 오나라를 멸망시킨 범려가 월왕 구천의 사람됨을 평가하며 문종에게 일러 말한 것이다. 범려는 문종에게 구천에 대한 평가로 고난은 함께 할 수 있으나 영화를 함께 누릴 수 없는 인물이라 월나라를 탈출하고, 그 후 문종에게 편지를 통해 한 말이다.

이 성어의 어원은 춘추시대 범려는 중국 춘추시대 월나라 왕 구천(句踐)이 오(吳) 나라를 멸하고 춘추오패(春秋五覇)의 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보좌한 명신(名臣)이다. 월나라가 패권을 차지한 뒤 구천은 가장 큰 공을 세운 범려와 문종(文種)을 각각 상장군과 승상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범려는 구천에 대하여 고난을 함께할 수는 있지만 영화를 함께 누릴 수는 없는 인물이라 판단하여 월나라를 탈출하였다.

"새 사냥이 끝나면 좋은 활도 감추어지고, 교활한 토끼를 잡고 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蜚鳥盡, 良弓藏, 狡兔死, 走狗烹)"
 사기(史記)》의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

한신이 친구이던 종리매(항우의 장수로서 유방을 전투에서 힘들게 함)를 도와주다 한 고조의 노여움을 사 회음후로 강등된 사건이 있었다. 한신은 종리매의 자결로 그의 목을 가지고 가서 유방에게 바쳤으나 유방은 한신을 포박하였으며, 모반의 진상을 조사한 뒤 혐의가 없자 초왕에서 회음후(淮陰侯)로 강등하였다.

이에 한신은 "과연 사람들의 말과 같도다. 교활한 토끼를 다 잡고 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고, 새 사냥이 끝나면 좋은 활도 감추어지며, 적국이 타파되면 모신도 망한다. 천하가 평정되고 나니 나도 마땅히 '팽' 당하는구나(果若人言. 狡兎死良狗烹, 飛鳥盡良弓藏. 敵國破謀臣亡. 天下已定, 我固當烹)"라고 한탄하며 유방을 원망하였다고 한다.

 

사마천의 사기에서 한신이 자초한 잘못을 지적한 부분도 있다. 항우와 전쟁 중에 유방과 간은 열위(列位)인 제나라 왕의 자리를 요구한 사건이 한신 가문 멸망의 단초로 작용한 것을 말하고 있다. 유방의 초한 쟁패에 있어서 소하, 장량, 한신 삼걸(三傑)이 있지만, 전투에서 한신이 없었더라면 두말할 나위 없이 역사 속 한 나라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 한신(韓信)을 시기 질투를 넘어서 없애야 하는 대상으로 삼아 제거 작업을 진행한다. 그 첫 번째로 한신으로부터 제나라를 빼앗는 것이었다. 제나라의 지리적 위치는 동으로 바다를 접한 산동지방으로 물산이 풍부하고 상업의 중심지여서 중국 내에서 매우 풍요로운 지역에 속했다. 이러한 나라의 부를 바탕으로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을 보고 한고조는 제왕 한신(韓信)을 영지 이동을 명한다. 인적 네트워크가 없는 초나라로 보내버린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반란을 핑계 삼아 회음후로 강등후 결국 죽여버리는 것이다. 팽성 대전 이후 유방은 진평의 반간계와 한신의 용병술의 도움으로 중국 통일의 대업을 이루었다. 그러나 결국 토끼 사냥이 끝난 사냥개는 쓸모가 없어지게 되니 반역이라는 허울을 씌워 죽이게 된다. 한신 팽월 경포 진희 등 통일의 대업을 이룬 맹장 모두를 토사구팽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창업 군주로서 냉혹한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성왕 분봉도

 

일본의 전국시대에 이에야스가 오사카 전투를 마지막으로 일본을 통일한다. 통일후 한고조와 마찬가지로 영지 분배를 실시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따른4대 천왕(장수)과 가신단에 대한 분봉도 진행한다. 이에야스의 분봉의 가장 큰 차이는 가신그룹에게 영지를 박하게 주거나 이에야스 아들을 다이묘로 삼고 그들의 가신단으로 들어가게 만든 것이다. 이에야스는 에도 막부시대의 권력 안정을 위해 그 공신들 설득하여 그의 아들의 가신들로 편입시켰다. 그리고 가신 그룹들도 그들의 본분을 망각하지 않고 공성신퇴(功成身退)를 마음에 세기며 이에야스가 제안한 작은 영지로 만족하며 메이지 유신까지 그들 가문은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마천은 한고조 본기에서 한고조의 공적을 제대로 기록하지 않거나 또는 폄훼하는 글자들이 보인다. 실제 역사 기록에서 유방은 거병 후 대부분의 전투에서 직접 군대를 지휘했으며, 그 대부분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조참, 번쾌나 주발 등의 초반 행적을 살펴보면 이들은 전투에서 앞장서 싸우는 정도였으며, 실제 군을 이끈 건 유방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 고조 본기에 나오는 전투의 많은 부분은 한 고조 유방의 전투에서 승리의 내용보다도 승리 못하였다’ ‘함락하지 못했다라는 기록이 많이 나온다. 초회왕이 함양을 먼저 점령하는 장수에게 관중의 왕으로 삼는다는 령()을 내리고 항우에게는 조나라의 위기를 구하라 보내고, 유방에게는 서쪽 함양을 향해 가라고 명령을 내린다. 이에 유방은 위나라 장수 황은 신도 무포 등과 함께 창읍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역이기와 연합해 개봉을 공략하였으나 또한 함락하는데 실패하였으며, 풍읍을 공략하여 실패한 사례를 기록에 남기고 있다. 패공이 되어 한신(韓信)을 통한 전쟁 이전의 성과는 초라하기 그지없게 기록이 되어 있다. 전투와 전쟁에서의 승리는 번쾌 진희 한신 등의 맹장이 전투에 승리한 것으로 기록된 것이다. 이런 사실을 기록하며 사마천은 장수 시절 한고조의 능력을 교묘하게 깍아내리고 있는 것이다.

 

한고조 본기 43

漢王跳(한왕도),獨與滕公共車出成皋玉門(독여등공공거출성고옥문),北渡河(북도하),馳宿修武(치숙수무)。自稱使者(자칭사자),晨馳入張耳(신치입장이)、韓信壁(한신벽),而奪之軍(이탈지군)。乃使張耳北益收兵趙地(내사장이북익수병조지),使韓信東擊齊(사한신동격제)。漢王得韓信軍(한왕득한신군),則復振(즉부진)。引兵臨河(인병림하),南饗軍小修武南(남향군소수무남),欲復戰(욕부전)。

 

한 왕은 자신을 사신이라 칭하면서 새벽에 말을 몰아 장이와 한신의 성벽 안에 들어가 그들의 군대를 빼앗았다.

 

사마천은 한왕 유방이 장이와 한신의 군대를 취(取)하였다가 아니고 탈() 빼앗아 가졌다는 표현을 썼다.

 

한고조 본기 54

皇帝曰義帝無後(황제왈의제무후)。齊王韓信習楚風俗(제왕한신습초풍속),徙楚王(사위초왕),都下邳(도하비)。立建成侯彭越為梁王(입건성후팽월위양왕),都定陶(도정도)。故韓王信為韓王(고한왕신위한왕),都陽翟(도양적)。徙衡山王吳芮為長沙王(사형산왕오예위장상왕),都臨湘(도임상)。番君之將梅鋗有功(파군지장매현유공),從入武關(종입무관),故德番君(고덕파군)。淮南王布(회남왕포)、燕王臧荼(연왕장도)、趙王敖皆如故(조왕오개여고)。

 

한 왕 유방이 황제로 등극하고 논공행상의 빌미를 삼아 한신을 제나라에서 초나라로 옮기게 하고 초한전쟁 당시 무공을 세운 장수들을 왕과 제후에 봉하며 그들의 힘 빼기 정책을 실시한다. 그 첫 번째가 한신의 영지 이동을 명한 것이다.

 

한고조 본기 56

 

高祖置酒雒陽南宮(고조치주낙양남궁)。高祖曰(고조왈):「列侯諸將無敢隱朕(열후제장무감은짐),皆言其情(개언기정)。吾所以有天下者何(오소이유천하자하)?項氏之所以失天下者何(항씨지소이실천하자하)?」高起(고기)、王陵對曰(왕릉대왈):「陛下慢而侮人(폐하만이매인),項羽仁而愛人(항우인이애인)。然陛下使人攻城略地(연폐하사인공성략지),所降下者因以予之(소항하자인이여지),與天下同利也(여천하동리야)。項羽妒賢嫉能(항우투현질능),有功者害之(유공자해지),賢者疑之(현자의지),

戰勝而不予人功(전승이불여인공),得地而不予人利(득지이불여인리),此所以失天下也(차소이실천하야)。」

내가 천하를 얻은 까닭이 무엇인가? 항우가 천하를 잃은 까닭은 무엇인가?”고기(高起)와 왕릉(王陵)이 이에 대답했다. “폐하는 오만하셔서 사람을 업신여기지만 항우는 어질어서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폐하는 사람을 시켜 성과 땅을 공략하게 하여 항복시키면 성과 땅을 나누어 주며 천하와 함께 이익을 함께 하셨습니다

 

한 고조의 인성을 옅 볼 수 있는 대화가 한고조 본기에 나온다. 고기와 왕릉이 직설적으로 항우와 유방을 비교하며 오만하여 사람을 업신여긴다는 것이다. 이렇듯 사마천은 한고조의 잘못에 대해 필주(筆誅)를 하고 있는 것이다.

 

3. 군주로서의 리더십

 

한고조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 중의 하나가 능신(能臣)의 말을 잘 듣는다는 것이다. 평민이었던 그의 삶을 통해 깨달은 겸손의 자세로 자신보다 뛰어난 신하의 책략을 수용해서 그의 무리를 이끌어 갔다. 항우는 이와 반대였다. 스스로 검술로는 일기당천(一騎當千)을 전쟁에서는 백전(百戰) 필승(必勝)을 하여 스스로 우월하고 오만함으로 가득 찬 모습으로 참모들의 말을 무시하는 경향이 많았던 것이다. 한고조 유방은 장량의 책략과 한신의 병법을 전적으로 믿고 맡기어 연전연승을 하고 결국 중국 통일의 대업을 이룬다.  

 

그다음은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전술을 수용한 것이다. 유방이 서쪽 함양 정벌을 위해 나가던 중 남양 태수 여의와 일전을 벌일 것인지 아니면 남양을 지나 함양으로 바로 갈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함양으로 바로 간다면 그만큼 함양 정벌의 시간은 빨라질 수 있으나 그 후에 남양 태수 여의가 유방 군대의 후방을 칠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에 장량의 계책을 수용하고 진회의 회유책을 들어서 수용 결국은 전투 한번 없이 남양 군을 자신의 편으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유연한 사고와 전술을 바탕으로 전투를 피하여 피를 적게 흘리고 회유책 반간계 이간계를 동원하여 전력 손실을 최소화하는 방식을 채택한다.

 

또한 유방은 민심을 얻는 정책을 취한다. 전쟁후 승리를 하더라도 그 지역의 백성들의 재산과 식량의 약탈을 금지시킴으로써 백성의 지지와 호응을 얻는다. 남전(藍田)지방과 전투의 승리시에도 군령을 내려 민가 약탈을 금지시켰다. 진왕 자영이 옥새를 지니고 항복하였을 때도 관용을 베풀어 살려주고 함양 궁 내의 보물과 창고를 봉한 뒤 패상으로 회군하여 민심을 더욱 돌아서게 만든 것이다.  군주로써 민심을 얻는 법을 안 것이고 이런 것이 그의 리더십으로 나타난 것이다.

 

한나라 三傑 장량 소하 한신

 

“리더십의 완성은 인재를 데려와 쓰는 것이 아니라 인재를 모셔와 그의 말을 듣는 것이다.”

 

夫運籌策帳之中決勝於千里之外吾不如子房國家撫百姓糧道吾不如蕭何連百萬之軍戰必勝攻必取吾不如韓信此三者皆人傑也吾能用之此吾所以取天下也

 

군막 안에서 계책을 내어 천 리 밖의 승리를 결정짓는 일은 나는 자방(子房:장량)만 못하다. 국가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위로하고, 군량을 공급하고 식량 운송로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은 내가 소하(蕭何)만 못하다. 백만 대군을 통솔해 싸우면 반드시 승리하고 공격하면 반드시 빼앗는 일은 내가 한신(韓信)만 못하다. 이 세 사람은 모두가 뛰어난 인재들이다. 나는 그들을 쓸 수 있었고, 이것이 내가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다.

 

항우는 장수의 리더십에서 유방은 군주의 리더십에서 더 탁월하였다. 천하를 경영하는 것은 말 위에서 할 수 없는 것이다. 초한 전쟁 동안 유방은 항우에게 매번 참패하였다. 그러나 유방은 그의 장수와 참모를 이끄는 리더십이 탁월하였다. 인재등용기술의 탁월함이 적은 노력으로 큰 효과를 거둔 것이다.그러나 항우는 이와 반대로 군주로서의 리더십의 부재가 큰 수고로움으로도 결국 유방에 패하고 죽어간 것이다.

 

한고조 유방의 가장 큰 장점은 자기 자신이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잘 못하는지 안다는 것이다 (知己). 그리고 두 번째 더 큰 장점은 인재를 알아보는 통찰력에 있다. 자신이 쓰고자 하는 인재의 능력을 꿰뚫어보는 능력이다. 이를 믿고 신뢰하여 쓰는 능력이 있다. (知彼) 세번째가 일의 맡김에 있다. 믿고 쓰는 인재 운영 술이다.소하로 하여금 국가의 안살림을 맡기고, 장량으로 하여금 계책을 세우게 하고, 한신으로 하여 전권을 부여하여 전쟁을 치르게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포용력이다. 능력이 자신보다 뛰어나다 하여 질투하지 않고 부족하다 하여 내치지 않는 포용력이다. 이것이 유방을 황제에 자리로 올려놓았다.그리고 400년 한(漢) 제국의 토대를 닦아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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