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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사기/본기

한 무제(武帝)_ 혼군(昏君)과 명군(明君) 사이

1. 삼공(三公)과 구경(九卿)

 

 

사기(史記)를 읽다 보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지명(地名)이다. 현재의 중국도 성() () ()등으로 나누어져 있고 그 지역이 정확히 어딘지 확인하려면 그 지도를 참조하여야만 알 수 있다. 그리고 두번째로 어려운 것이 왕과 제후의 연대이다. 각 나라마다 시호가 같은 왕들 령(靈)왕, 무왕(武王), 문왕(文王)등 같은 시호가 여럿 있어서 춘추(春秋)인지 전국(戰國)인지 조(趙) 나라인지 진(秦) 나라인지 알기 쉽지 않다. 그래서 반드시 연표를 보고 익혀야만 한다. 그 다음으로 어려운 것 중 하나가 이름이나 호 앞에 붙는 관직명이다. 이 관직이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하고 사기를 읽다 보면 이해도 측면에서 부족이 느껴질 것이다. 특히나 제도가 정비되기 시작한 진() ()시대에 이르면 사람의 이름 앞에 반드시 관직명이 붙는다. 한고조 유방은 지방 조직의 정장(亭長) 요즘으로 치면 지방의 경찰 담당 관리였던 것이다. 지방 정장으로서의 그의 행적과 일반인으로서의 행적은 엄연히 다른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이유로 관직에 대한 이해를 먼저하고 사기(史記) 부분 읽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중국 고대 관직의 유래는 <예기(禮記)>에 나온다. 중국의 주() 나라가 3(三公), 9(九卿) 27대부(大夫), 81 원사(元士)의원사(元士)의 관제(官制)를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데서 비롯되었다. 춘추와 전국시대 그리고 통일 진나라와 한나라 등 나라의 크기에 따라 구성이 달랐으며, 반드시 아홉 가지였던 것은 아니다. 춘추시대의 진(晉) 나라는 육경(六卿)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에서는 궁정(宮庭)에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심고 삼공(三公)이 이를 향해 앉았다고 전해진다. 때문에 삼공(三公)을 달리 삼괴(三槐), 태괴(台槐), 괴정(槐鼎) 등으로 부르고, 삼공(三公)의 자리를 공괴(公槐), 괴위(槐位) 등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이후 진()이나 전한(前漢)에서는, 행정(行政)을 담당한 승상(丞相), 군사(軍事)를 담당한 태위(太尉), 감찰(監察)을 담당한 어사대부(御史大夫)를 삼공(三公)이라 하였다.(네이버 백과사전 참조)

이후 진()이 전국(戰國)을 통일하고 제도를 정비하며 삼공(三公)과 구경(九卿)을 둔다. 이를 한(漢) 나라가 유지 변화해 가며 통일국가의 행정조직을 완성해간다. 그에 대한 내용은 위의 설명과 같다.

 

2. 한무제의 치적의 평가

 

전한(前漢)의 제7대 황제인 무제(武帝) 유철(劉徹)은 기원전 156년 장안 미앙궁에서 태어나 141년 황제로 등극하여 87년 재위기간이 54년으로 가장 오래 재위한 황제였다. 전한시대를 대표하는 황제로서 많은 업적을 세웠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이룩한 문경지치의 태평성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무리한 영토확장과 토목공사 그리고 흉노와의 길고 긴 전쟁 등으로 말미암아 백성을 고통의 나락으로 빠뜨리고 그가 죽고 난 뒤 한나라는 쇠락의 길을 간다.

 

사기(史記) 중 효문 본기에는 한 문제(文帝)의 군주로서의 치적과 덕성을 잘 드러내며 칭찬 일색으로 쓰여 있다.(문경지치 참조) 한 무제(武帝)의 전쟁사적 치적으로 실크로드 개척, 고조선 남월의 정벌 흉노 제국을 변방 멀리로 몰아내고 영토를 확장하고 변방지역을 안정시킨 일 등이 있다. 또한 내치 측면에서 전한(前漢)의 법령을 완성시키고 동중서로 하여금 유학을 관학의 위치로 끌어올려 장려하였으며 관료체계를 완비하고 염철(鹽鐵) 전매제를 통한 세수 확충,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균수법과 평준법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치적들은 효무본기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잘 없다. 효무본기는 52편 전편에 걸쳐서 치적보다 미신과 귀신 그리고 방사(方士) 불로장생 등에 미혹된 무제(武帝)의 모습만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것은 사마천의 사적인 의도가 다분히 들어있다. 이는 사기(史記)를 통해 혼군(昏君) 무제(武帝)에 필주(筆誅)를 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한 무제의 치적은 평준서나 세가 그리고 열전 등에 파편화되어 나온다. 즉 그 군사적 치적은 열전 위청 곽거병 편에 나오고 균수법이나 평준법은 평준서에, 유학은 동중서 편에 나뉘어 싣고 있다. 효무본기에 싣지 않고 경대부(卿大夫)나 제후, 장군의 공적으로 열전 세가 편에 실어 놓는다. 진시황과 효문 본기와 다르게 무제(武帝)의 치적과 실정을 나누어 이곳저곳에 끼워 넣은 것이다. 열전과 세가에 넣어 놓고 실적을 폄하한 의도로 보인다.그러나 혼군(昏君)으로서의 행적은 효무본기에 적나라라 하게 자세히 나와있다. 그 첫 번째의 실정이 방사(方士)의 등용이다. 미신(迷信)과 방술(方術) 신선(神仙) 불로장생(不老長生)등에 미혹되어 봉선(封禪) 행사를 치르느라 국고를 탕진해간다. 그 두 번째는 미앙궁과 장락궁을 두고 더 크고 화려한 건장궁의 축성에 있었다. 수많은 군사 원정과 흉노와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문제와 경제가 채워놓은 곳간을 비게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부역과 세금에 시달리게 한 것이다. 그 마지막은 바로 무고(巫蠱)의 화()이다. 무제 말년에 태자를 싫어했던 수형도위(水衡都尉) 강충(江充)이 무당과 짜고 여태자가 역모를 꾸민다는 고변을 하자 무제는 여태자를 의심하였다. 그러나 계속된 모함으로 인해 궁지에 몰려 화가 난 여태자가 사전에 강충과 무당을 살해하는 사건이 터지고 만다. 이를 반란으로 고변한 강충 일당의 말만 믿고 여태자의 반란을 진압하고 여태자의 어머니 위황후를 폐후로 만들고 결국 태자는 자살하고 만다. 결국 태자의 후궁인 사양제, 아들 유진, 며느리 왕씨, 딸을 비롯한 태자의 가족과 위황후의 친정을 비롯해 태자를 따르던 이들도 무사하지 못하고 대거 처형시킨다. 이일은 나중에 강충의 무고(誣告)로 밝혀지며 태자의 거병 또한 강충의 핍박과 부추김에 의한 것으로 인정되어 강충의 삼족을 멸하고 일당을 불태워 죽이며 사건이 일단락된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건강이 악화되어 기원전 87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3. 한무제와 진시황

 

이러한 사마천이 기록한 효무제의 내용을 고찰하다 보면 한무제와 오버랩되는 황제가 바로 진시황이다. 진시황이 전국(戰國)을 통일해나가는 과정과 무제의 영토확장, 각종제도 도량형 화폐의 통일 등이다. 진시황은 법에 기반한 국가 통치를 시행하였고 한무제 또한 겉으로는 유가에 기반하고 실제로는 법에 기반한 통치를 하였다. 오히려 법가적 성향을 더 강하게 드러내어 통치를 하였다. 그 근거로는 혹리(酷吏:백성을 가혹하게 다스린 관리)열전의 상당수가 한무제 당시의 관리였던 것이다.

진시황과 한무제

 

한 문제(文帝) 당시 유학자 가의(賈誼:BC 200∼BC 168)는 과진론을 통해 진(秦)나라 멸망을 분석하여 한 왕조가 경계하고 참고하여 왕조를 경영해나가는 참고 할 수 있는 자료를 만든 적이 있다. 거기에 진시황의 실정에 대해 날카로운 필치와 논리로 비판을 가한 글이 사기에 그대로 실려있다. 그 진시황과 무제의 취한 정책 특히나 무리한 토목건설 진시황의 아방궁과 한무제 건장궁 건설, 두황제 모두 자신 사후에 들어갈 황릉에 엄청난 재정과 인력을 투입하여 백성의 고통을 배가시키고, 진시황의 무리한 정복전쟁과, 한무제의 영토확장을 교묘하게 오버랩시키며 한무제의 실정을 사기 열전 곳곳에 넣어 놓고 필주를 가한다. 두 황제 모두가 위민(爲民) 정치가 아닌 자신의 정복욕과 사욕을 채우기 위한 정책을 취한 것이다. 역사가로서 사마천은 군주의 능력과 덕성을 동시에 요구한다. 지도자로서 성과를 추구하면서도 내면 수양을 말하고 있다. 진시황과 한무제 모두 뛰어난 재능과 원대한 계획을 가졌지만 그들 스스로의 지나친 욕망으로 인해 쌓아 올린 성과마저 역사가들에 의해 평가절하된 것이다.

 

한무제의 첫 번째 실정은 문제(文帝)가 도입한 진선지정(進善之旌)과 비방지목(誹謗之木)이라는 제도 폐지와 육형에 대한  부활이다. 한무제 때 급암(무제 때의 간신(諫臣)(?~B.C.112). 자는 장유(長孺). 성정이 엄격하고 직간을 잘하여 무제로부터사직(社稷)의 신하라는 말을 들음)이 면전에 대고 비판을 한다. “속으로는 욕망이 넘치고 겉으로는 인의를 베풀겠다 하십니다한무제의 잘못된 인성과 정치적 야욕에 제동을 거는 직간을 한 것이다. 그러나 무제는 크게 화를 납간(納諫)하지 않고 그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았다.그리고 육형(肉刑)에 대한 부활이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사마천은 이릉을 변호하다 한무제의 눈 밖에 나서 사형과 궁형(宮刑) 또는50 만전의 속량금의 판결을 받게 된다. 대부호마저 낼 수 없는 금액에 사마천은 결국 궁형(宮刑)을 받게 된다. 한무제는 자신을 제대로 성찰(省察) 하지 못하고, 옳고 그름에 대한 변별력도 떨어지며 폭군과 혼군을 오가며 정치를 하게 된다.

 

두 번째가 웅장함에 대한 욕망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신 사후를 위해 진시황의 여산릉과 같은 규모의 능을 건설하기 시작한다. 무릉(茂陵)이라 불리는 이 능은 완공까지 모두 53년이 걸렸고 매년 전국 세금의 1/3을 쏟았다 전해진다. 즉위한지 3년째 되는 해에 상림원(上林苑)을 건설한다. 종남산(終南山: 중국 산시성 시안 남쪽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1,200m이다. 예로부터 도사들이 사는 곳으로 유명 네이버 백과.)에 인접한 비옥한 토지를 몰수하여 황제만 쓸 수 있는 사냥터를 만든 것이다. 그 땅에 살던 수십만 백성은 이주시켜 황무지를 개간하게 하였다. 이를 시랑(侍郞) 동방삭이 말렸지만 한 무제(武帝)는 듣지 않았다. 그 상림원의 건설은  한무제 말년까지 계속되었으며 화려한 궁전 수십 채가 세워지고 온갖 꽃과 초목 진귀한 동물로 채워졌으며 곤명(昆明)지라는 인공호수도 만들고 전함 수십 척과 누선(樓船) 백여척이 띄워져 있는 규모였던 것이다. 이것도 백성의 고혈을 빨아 만든 것이었다.

 

세 번째가 군사적인 치적에 대한 욕망이다. 한 무제 대 원정(遠征) 시기에 남쪽의 백월 서남의 야랑(夜郞)국 서쪽의 강(), 그리고 동으로는 위 씨 조선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한 무제의 가장 큰 실수는 흉노와의10여 년에 걸친 전쟁이었다. 한고조 유방부터 경제에 이르기까지 흉노와의 화친 정책은 전면적인 수정을 가하여 정벌 정책으로 선회를 한다. 한무제 3년부터 대월지와 동맹하고 흉노를 공격하며 대장군 위청(衛靑 중국 전한 무제 때의 장군. 흉노 정벌 때 전공을 세워 장평후, 대장군)과 이광(李廣)을 파견해 흉노의 토벌에 나서서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흉노의 삶의 터전은 중원의 국가와는 달라서 일정한 터전이 없었다. 한나라 군대가 강하게 침략해 오면 살던 곳을 버리고 다른 초원으로 이동하면 그뿐이었다.그리고 약해진 전선(戰線)을 게릴라식 전술로 노략하며 끊임없이 한나라 변방을 침략하고 괴롭혔다. 그의 노력도 결과를 거둔 것은 위청과 곽거병의 흉노 정벌 전쟁이 성공을 거두며 어느 정도는 성과를 올린다. 한 무제(武帝)가 긴 세월 동안 끊임없이 흉노의 정벌을 진행하였지만 그 대가도 엄청난 것이었다. 동원되는 인력도 인력이지만 군비의 충당을 댈 수 없을 정도로 전쟁은 끊임이 없었던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무제의 정복욕에 의해 비롯된 것이었다.

 

문제와 경제 당시 국가 창고 곡간에 식량이 썩어 날 정도로 부유했던 국가 재정은 바닥나기 시작했다. 한번은 국가 재정담당이던 대사농(大司農)이 무제에게 창고는 바닥나고 세금도 남지 않아 장졸에게 필요한 군수품을 대지 못한다 보고하였다. 이 보고를 받은 무제는 매관매직을 허용하고 교묘한 방식으로 세금을 긁어 모아 군비를 확충해갔다. 그 대표적인 방법이 염철(鹽鐵)의 국가 전매를 통해 세수를 늘여간 것이다. 이렇게 하여도 대 공사와 전비를 충당하기에 역부족이었다. 결국 백성으로부터 세수를 늘이고 부역을 과하게 부담시키는 정책을 이어나간다.

 

 

4. 한무제의 욕망_신선이 되고픈 무제(武帝)

 

아래 글은 사기 효무본기의 첫 장이다.맨 마지막에 ‘효무황제는 즉위하자마자 귀신에 대한 제사를 더욱더 경건하게 하였다’라고 나온다. 그리고 효무본기의 마지막 장에도 봉선에 관한 기록으로 마무리를 한다.  

 

효무본기 제 1편

孝武皇帝者(효무황제자),孝景中子也(효경중자야)。母曰王太后(모왈왕태후)。孝景四年(효경사년),以皇子膠東王(이황자위교동왕)。孝景七年(효경칠년),栗太子廢臨江王(률태자폐위림강왕),以膠東王太子(이교동왕위태자)。孝景十六年崩(효경십륙년붕),太子即位(태자즉위),孝武皇帝(위효무황제)。孝武皇帝初即位(효무황제초즉위),尤敬鬼神之祀(우경귀신지사)。

 

그리고 마지막 장도 어김없이 봉선에 관련된 기록만 나온다 귀신에 대한 제사와 하늘에 대한 봉선 의식,그리고 방사를 통한 神仙(신선)되기를 열망하는 모습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는 진 시황(始皇)이 불노불사(不老不死)를 꿈꾸며 서복이라는 방사(요즘의 무당)를 동원해 불로초를 찾은 것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효무본기 제 52편

 

今天子所興祠,泰一、后土,三年親郊祠,建漢家封禪,五年一修封。薄忌泰一及三一、冥羊、馬行、赤星,五,寬舒之祠官以歲時致禮。凡六祠,皆太祝領之。至如八神諸神,明年、凡山他名祠,行過則祀,去則已。方士所興祠,各自主,其人終則已,祠官弗主。他祠皆如其故。今上封禪,其後十二歲而還,遍於五岳、四瀆矣。而方士之候祠神人,入海求蓬萊,終無有驗。而公孫卿之候神者,猶以大人跡解,無其效。天子益怠厭方士之怪迂語矣,然終羈縻弗,冀遇其。自此之後,方士言祠神者彌眾,然其效可睹矣

 

지금의 천자가 건립한 사당에는 태일(泰一)과 후토(后土)가 있으며, 매 3년마다 한 차례씩 천자가 친히 교사(郊祀)를 지내고, 한나라에서 시작한 봉선의 제도는 5년에 한 차례씩 거행했다.

효무본기 52편에 봉선 제도가 일정한 형식을 갖추며 제도화되는 내용을 마지막으로 효무 본기는 끝이 난다.이 역사를 기록한 사마천도 이를 읽는 후대 학자들 모두가 한무제의 미혹(迷惑)함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한 무제를 귀신과 봉선 신선 불로장생의 어리석음으로 이끈 대표적인 방사들이 있는데 그 첫번째가 이소군이다. 이소군(李小君)은 제나라 출신으로 안기생(安期生: 진(秦) 나라 때 사람. 신선술(神仙術)을 익혀 신선의 가르침을 받아 연단술(煉丹術: 먹으면 신선이 되는 약 제조술)을 익혔다고 전해지는 방사이다. 그는 스스로 귀신을 부리고 장생불사 한다 말하며 여러 제후들과 교류하였다. 그러던 차에 한 무제에게 소개되어 본격적으로 미신과 봉선 제사에 빠지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소군이 황제를 만나  주장한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사기에 그대로 나온다.

 

천자의 봉선의식

 

효무본기 중(中)

이소군이 황제에게 아뢰었다.

“부엌 신에게 제사를 드리면 귀신을 부를 수 있으며, 귀신을 부르면 단사(丹沙)를 변화시켜 황금을 만들 수 있으며, 황금을 만든 다음 음식을 담는 그릇으로 쓰면 장수할 수 있고, 장수하게 되면 바다에 있는 봉래산(蓬萊山)의 신선을 만날 수 있으며, 신선을 만나 봉선(封禪)을 행하면 장생불사 할 수 있으니 황제(黃帝)가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신이 전에 바다를 두루 돌아다니다가 안기생(安期生)을 만났는데, 그가 신에게 대추를 먹으라고 주는데 크기가 참외만큼 컸습니다. 안기생은 신선이어서 봉래산을 오가니 그와 마음이 통하면 모습을 나타내나 그렇지 않으면 숨을 것입니다.”

이에 천자가 처음으로 몸소 부엌 신에게 제사를 올리고, 방사(方士)를 보내 바다로 가서 봉래산에 사는 안기생의 무리를 찾게 하였으며, 단사와 여러 약물을 조제하여 황금을 만들게 했다.

 

少君言於上曰(소군언어상왈)「祠則致物(사조칙치물),致物而丹沙可化黃金(치물이단사가화위황김),黃金成以為飲食器則益壽(황김성이위음식기칙익수),益壽而海中蓬萊僊者可見(익수이해중봉래선자가견),見之以封禪則不死(견지이봉선칙부사),黃帝是(황제시야)臣嘗游海上(신상유해상),見安期生(견안기생),食臣棗(식신조),大如瓜(대여과)。安期生僊者(안기생선자),通蓬萊中(통봉래중),合則見人(합칙견인),不合則隱(부합칙은)。」於是天子始親祠灶(어시천자시친사조),而遣方士入海求蓬萊安期生之屬(이견방사입해구봉래안기생지속),而事化丹沙諸藥齊黃金矣(이사화단사제약제위황김의)

 

이러던 이소군이 갑작스레 병사를 하고 한 무제의 어리석음(?)이 온 나라의 방사들에게 알려지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는 방사가 전국 각지에서 장안으로 모여들며 신선에 관하여 말하는 자들이 늘어나게 된다. 제나라 사람 소옹(少翁)은 귀신을 부른 방술로 죽은 왕부인과 부엌 신을 불러내고 무제를 속여 문성 장군에 봉해진다. 그의 연호도 귀신과 미신 등에 의해 정해진 연호가 많이 있다. 첫 번째 연호가 建元(건원) 혜성의 상서로움에 원광(元光), 세 번째 연호는 교(郊) 제사를 올리다 외뿔 달린 짐승을 잡아서 원수(元狩)라 바꾼다. 이 모든 것이 불노불사를 염원하여 신선이 되고자 하는 한 무제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사후세계에서도 영원불멸을 하고자 했던 진시황의 자취를 밟아가며 진시황 여산릉에 필적하는 무릉(茂陵) 축조를 53년간 진행한 것이다.

 

사기(史記) ()에 봉선(封禪)()의 내용과 한 무제 본기의 내용은 그대로 옮겨와 있다. 사마천은 이러한 한무제의 봉선에 대한 집착, 신선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후대인들에게 보여 준다. 

 

 

사기(史記)가 난서(亂書)이면서 난서(難書)인 이유가 한무제에 대한 기록에서 알 수 있다. 그의 치적과 실정은 세가와 열전 서(書)에 여러 군데 나누어 기록하였고 효무본기에는 오로지 제사와 봉선 귀신과 신선 등의 내용만 기록해 놓고 있음을 본다. 효무본기 전편(全篇)에 나오는 봉선의 기록은 시비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봉선이 제도화되어가 가는 사실(事實)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넘어 사마천이 하고자 했던 말은 어리석은 군주가 미신에 빠져 가는 과정을 교묘하게 뒤틀어 비판을 가한 것이다. 이렇듯 사기 전편에 걸쳐 한 무제(武帝)에 대한 기록을 꿰어 맞추지 않으면 이해가 힘들기에 어지러우면서 어렵다는 이야기를 후대 역사가가 말하는 것이다.

 

한 무제에 대한 우회적 비판을 송대 역사가 사마광(司馬光)은 자치통감을 통해 직설적으로 평가한다. 바로 이것이 역사가들이 역사서를 통해 가하는 필주(筆誅)인 것이다.

 

욕심이 크고 사치가 심했고, 형벌이 많고 세금이 과중했으며, 무리한 토목공사(궁궐건축 상림원 무릉축조)를 진행하였고, 사방으로 정복전쟁을 펼쳐 국고를 크게 낭비하고, 신선이나 귀신 미신을 맹신하였으며 순행(巡行)에 절제가 없었고, 백성을 고달프게 하여 도적이 되도록 내몰았다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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