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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사기/본기

진시황(秦始皇)

1.진시황의 역사적 평가

분서갱유를 자행한 폭군과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위대한 군주

 

 

진시황의 평가는 역사적으로 극명하게 나뉜다. 수많은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그당시 기술서적과 진나라에서 인정한 일부 유학책을 제외한 민간의 모든 책을 불살라 버리는 분서(焚書) 460명의 유학자와 방사를 구덩이에 묻는 갱유(坑儒)를 통해 형성된 폭군이라는 이미지 그리고 550년간 혼란의 춘추(春秋)전국(戰國)시대를 끝내고 중원의 평화를 가져온 군주 등이다전국시대 6개 경쟁국가를 멸하고 패자가 되어 그는 주나라의 호칭인 하늘의 아들 천자(天子)도 성에 차지 않았다. 영정은 세상에 처음 등장한 삼황오제(三皇五帝)의 후계로 만세를 여는 첫(始) 글자와 황제(皇帝)의 단어를 취하여 시황제라 칭하게 하였다.  

 

시대마다 평가를 달리하지만 변하지 않은 사실(史實)은 중국을 하나의 거대한 제국으로 통일하지 않았다면 마치 유럽과 같이 여러 갈래로 나뉜 채 명멸의 역사를 반복해 왔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진시황이 완성한 지리적 통일 제도의 통일 문화 사상적 통일이 오늘날 중국을 위시한 동아시아의 국가시스템에 지금까지 고스란히 전해 내려오고 있다.

 

진시황이 봉건(封建) 시스템을 없애고 실시한 군현제(郡縣制)는 오늘날 중국에서 성()과 현()으로 대한민국에서는 군()으로 일본에서는 현()으로 남아있다. 강력한 중앙집권 시스템이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제도와 시스템은 시대에 따라 명멸해간다. 그러나 진시황이 실시한 군현제(郡縣制)의 통치체계는 22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시행된다는 것은 그제도 자체가 가진 완벽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2. 진왕 정()의 성장과정

 

진시황의 성은 영() 이름은 정()으로 13세때 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 당시 진()은 선대의 부국 강병책과 진효공 상앙이 기초한 법치 위에 전국칠웅 중 가장 강력한 군대와 국부를 쌓아놓고 있었다. 그러나 진왕 정()의 나이가 어린 관계로 여불위와  진왕 정()의 생모 조태후가 섭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전국시대 일반적인 정권교체가 아닌 경우 특히 나이 어린 그리고 정치적 기반이 약한 태자가 왕이 될 경우는 반역이나 조정 내부 대신들의 권력 다툼이 일어나나 진()왕 정()이 왕이 될 때의 기록을 보자면 전혀 그런 기록은 없었다. 이는 여불위라는 막강한 정치 경제적 후견인이 있었기도 했지만 그 보다 진나라 국가시스템이 법치(法治)의 안정성 위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진나라는 정()이 왕이 되기 전에 파() () 한중(漢中)을 합병하고 초나라 도읍 영()을 차지하여 남군(南郡)을 설치하였으며 북으로는 상군(上郡) 동으로 하동(河東), 상당(上黨)을 점령하고 있었다. 또한 동주와 서주를 멸망시키고 삼천군(三川郡)을 설치하여 명실상부한 전국시대 패자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또한 진나라는 빈객과 유세객을 초빙하여 실력 있는 인재들에게 작위를 주어 일을 맡기고 정무를 보게 한 것이다. 이때 등용된 인재가 통일 진나라의 통치 시스템을 설계한 초나라 출신의 이사(李斯)와 진왕 정()의 정복전쟁에 선두에서 큰 공을 세운 왕전(王翦) 몽염(蒙恬) 등이 있다. 이 또한 여불위의 섭정 시기에 있었던 것으로 진왕 정()의 실권은 없었던 시기였다.

 

진왕 정()의 친정(親政)은 노(嫪毐)의 반란이 계기가 된다. 역사적으로 조태후는 여불위의 애첩에서 시황제의 아버지 자초의 부인으로 들어가서 영정을 낳는다. 그뒤 자초가 진왕에 오르고 4년뒤 죽자 진왕 정()이 그 뒤를 잇게 되며 정()이 성장함에 따라 후일을 두려워한 여불위가 노애라는 거근을 지닌 사내를 조 태후에게 보이고 환관으로 들이면서 사통을 하게 만든다. 조태후의 후광으로 노애는 장신후에 봉해지며 이후 조 태후와의 사이에 얻은 아들을 진나라 왕으로 세우고자 반란을 꾀하게 된다.기원전 238년 영정의 관례식(성인식)이 있던 날 노애는 사병을 동원하여 수도 함양 한 복판에서 반란을 일으키나 진왕은 침착하고 일거에 노애의 반란을 진압해버린다. 바로 이 노애의 난을 계기로 여불위와 조 태후가 하였던 섭정을 폐하고 맡겨놓은 군주의 권력을 찾아오는 데 성공한다.

 

이후 진왕은 노애와 두아들을 죽이고 조 태후도 옹땅에 유폐시킨다. 그리고 섭정이던 여불위를 상국에서 파면시키고 하남으로 내쫓아버리며 함양의 중앙정부와 연결고리를 단절시킨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각국의 제후와 빈객이 여불위와 왕래하자 영정은 촉지 방으로 가라는 명령을 여불위에게 내리자 복권은 불가능하다 생각한 여불위는 스스로 독약을 마시고 자살을 한다. 이로서 섭정기간9년 뒤 진왕 정은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사(李斯) 왕전(王翦) 등을 앞세워 중국 통일 전쟁을 진행한다.

 

3. 폭군과 명군 사이_진시황을 위한 변론(辯論)

 

진왕 정이 왕에 오른 지 전국 칠웅 중의 하나인 한(韓) 나라를 가장 먼저 공격하여 멸망시킨다. 한나라 안 왕은 진왕 정()이 한나라 정벌을 알고 한비(韓非)로 하여금 진왕 정의 유세객으로 보내게 된다.

 

 

사마천 사기의 기록에는 한비가 쓴 저서 고분(孤憤)과 오두(五蠹) 편을 본 진시황이 크게 감명을 받고  이 사람과 교유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라고 했다고 한다. 진나라 재상이던 이사가 한비를 얻고자 하면 한나라를 공격하고 그가 사신으로 오면 그때 회유하라 진시황에게 간하니 이에 진시황은 한을 침공하고 韓非가 한 안왕의 명으로 유세를 하러 진에 오게 되며 역사적 만남을 가진다. 그러나 결국 그 유세는 성공하지 못하고 李斯의 간계에 의해 감옥에 갇힌 한비자는 음독자살을 하게 된다. 결국 기원전 230년 한나라는 진나라의 정복전쟁의 첫 희생양이 되어 멸망해간다. 한(韓) 나라를 필두로 조() 나라 228 위(魏)나라 225 () 223 연(燕)나라 멸망 222 마지막 제나라가 221년에 멸망한다.

 

전쟁의 기록에서 진시황은 잔인무도한 폭군이라는데 이견(異見)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전쟁을 할 수밖에 없는 배경에는 220년간 이어져온 피비린내 나는 전국(戰國)시대의 종식이라는 염원이 담겨있다. 그리고 자국 내 백성들을 위해 힘쓴 부국강병책은 백성들의 일사불란한 지휘체계 국가를 만들고 인재 등용에 출신성분과 친소를 가리지 않는 기용책에 지금으로 말하자면 전 세계에 인재들이 진(秦) 나라로 몰려온 것과 같은 것이다. 과연 유교적(儒敎的) 사관을 가진 평가처럼 과연 폭군이었을까 하는 반문을 가지게 한다. 국가를 망치는 군주의 종류에는 혼군(昏君) 암군(暗君) 폭군(暴君)등이 있다.

 

분서갱유를 예를 들어 폭군이라 한다. 통일 중국에서 다른 무엇보다 가장 힘든 통일이 사상적 문화적 통일이다. 통일 초기 6 제후국의 풍습과 문화의 잔재가 남아있고 진()의 통치 원리인 법치(法治)를 부정하는 유가(儒家)의 불복종 선동방사(方士)의 속임등이 진나라 이외의 지역에서 횡행하였다. 또한 서복이라 하는 서불(徐市)은 불사약을 구한다 하여 돈을 챙겨 사라졌고 노생(盧生)과 후생(侯生)이라는 방사또한 많은 재물을 사취하고 진시황의 부덕을 비난하였다. 이에 이사가 주장하여 채택된 정책이 진() 조정이 인정한 공식 서적 외에 전부 불태우고 반 정부행위를 일삼는 일부 유학자들과 방사들을 구덩이에 묻어버림으로써 법치주의의 확립을 통일 전국에 선포한 것이다. 이는 모든 제국에서 일어난 통일의 과정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대규모 공사를 일으켜 민중의 삶의 피폐하게 한 것을 말한다. 기본적으로 통일 진나라는 멸망시킨 6국의 부를 소유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통일 진의 아방궁과 진시황의 무덤을 만들어 갔다. 이것은 명백히 백성의 수탈이라 볼 수 있는 것이고 이를 미루어 폭군이라 칭한다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만리장성의 경우를 보면 실질적으로 조나라 위나라 연나라 등에 있던 장성을 연결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이것의 결과는 변방지역 백성들의 흉노로부터 안전을 보장하는 사업이어서 반드시 해야 하는 사업이라고 본다. 일부 희생을 감안해서라도 필요했던 사업인 것이다.

 

춘추시대 전쟁은 정벌(征伐) 전쟁이었다 즉 제후들의 잘못을 바로잡고 타이르고 전쟁 배상 토지나 재화를 내면 물러나는 전쟁이었다. 그러나 전국(戰國) 시대 전쟁의 양상은 정복(征服) 전쟁으로 흐른다. 전쟁을 하고 지게 되면 영토의 일부를 빼앗거나 할양을 받고, 전국 말기의 전쟁은 한 나라를 멸망시키는 치열한 전쟁으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전쟁을220여 년 지속되었다면 가장 고통받았을 계층은 일반 백성들이었을 것이다. 전쟁으로 인한 수탈 또한 일반 민중들이었을 것이고 부역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러한 전쟁의 참상을 어렸을 때부터 보았을 것이고 어느 한 군주가 패권을 차지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지속되었을 것을 보았을 것이다. 이는 비단 진왕 정()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들까지 전쟁을 종식시키려는 염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 연 태자 단()은 자객 형가(荊軻)를 시켜 진왕 정()을 시해하려 했다. 이러한 생각도 전쟁을 종식시키려 한 태자 단()의 하나의 방편이었을 것이라 본다. 진시황과 자객 형가의 이야기는 영화 영웅에 극화되어 나온다. 사기 내용과 다르게 영화에서는 형가가 진시황의 통일 대업을 이해하고 결국 시해를 포기하는 마지막 장면이 나온다. 결국은 형가와 진시황 둘 다 중원의 영구적 평화를 원하는 것에 뜻을 같이하고 형가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이다. 진시황의 통일 대업의 이해를 바탕으로 역사적 사실을 본다면 상황을 영화 속 형가와 같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4. 불멸의 진시황

 

진시황은 볼로 장생을 원했다. 또한 불멸을 원했던 역사적 군주였다. 불노장생의 염원은 이루지 못했으나 불멸의 진시황은 아직도 동아시아의 문화와 역사 속에 남아있다. 이는 진시황릉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진시황이 남긴 법치(法治)의 기틀은2200여 년이 지난 지금 차이나에서도 불멸하고 군현제(郡縣制)는 한국 중국 일본의 행정단위에서 불멸하고 있다. 진(秦)이후 한(漢) 나라가 융성하고 강력한 중앙집권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것은 문자의 통일 제도의 통일 도량형의 통일 등을 들 수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통일이 문자이다. 중앙 집권 국가의 가장 근본은 중앙정부 정책의 군현까지 하달이고 수행이다. 이들 문자가 서로 다르면 효과적으로 중앙 정부의 정책을 집행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진나라 소전(小篆)체 문자 통일을 기반으로 한(漢) 나라는 발전시켜 지금 중국 번 자(繁體)의 효시인 해서(楷書)가 나오게 된 배경이 된다.

 

문자통일

 

그다음이 도로 정비와 운하 개통을 들 수 있다. 이런 사업을 통해 보다 효과적으로 중앙 정부의 정책을 지방으로 전달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으며 민간에서 이를 통해 교역을 활발하게 하고 물산을 장려하여 상업이 발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진시황은 도량형과 수레바퀴를 통일한 최초의 군주이기도 하다. 당시 지방마다 무게와 크기를 재는 단위가 각기 달라 교역과 상업 발달에 큰 장애가 되었으니 이를 통일함으로 물자의 유통을 보다 더 원활하게 하였다. 이외에도 반량전으로 화폐 통일을 이룬다  이러한 위대한 업적을 통해 진시황은 역사 속에서도 동아시아 현실 세계에서도 불멸하고 있는 것이다.

 

화폐통일

 

진시황은 통일 이듬해인 기원전 220, 옛 진(晉) 땅에 해당하는 서북쪽 일대의 순행에 나선 것을 시작으로 사망할 때까지 10년 동안 모두 다섯 차례 통일 중국을 순행한다. 순행의 목적은 지역의 민심을 살피고 황제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진시황은 각지를 돌며 각석에 새긴 글에 자신이 치른 통일 전쟁의 정당성과 업적에 대한 찬양 국가제도 통일의 필요성, 풍속의 개량과 천하의 교화 등을 담았다. 즉 통일 진() 제국의 안정화에10여 년 동안 5차례 순행을 하며 통일 진 제국의 안정화에 역점을 둔 것이다. 하루에 죽간을 기준으로  120권의 서류를 검토하지 않으면 잠을 자지 아니할 정도로 워커 홀릭의 일면을 보여주는 기록도 있다. 이를 미루어 보면 진시황이 혼군(昏君) 암군(暗君) 폭군(暴君)등의 평가는 맞지 않은 것이다. 어머니 조 태후의 영향으로 정실 왕후를 두지 않고 성생활 또한 문란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 독선적인 리더십으로 인해 후계를 제대로 양성하지 아니한 결과 간교한 환관 조고(趙高)와 어리석은 이사의 잘못된 선택과, 무리한 아방궁과 만리장성 진시황릉의 건축 등으로 피폐해진 민중의 봉기 등으로 말미암아 통일 진나라는 얼마 되지 않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간다.

 

역사적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리나 고대 통일 제국을 만들어낸 각종 법과 제도와 문자 통일은 그 뒤 왕조를 세운 한(漢) 나라에는 가장 강력한 통치기반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