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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사기/본기

주본기_군주가 이(利)를 밝히고 좋아하면

1. 주나라의 흥망성쇠

 

하상주 3대 연대표

 

주본기는 기원전 11세기 설립되어 기원전 770년 수도를 시안(西安, 서안)에서 낙양으로 옮기기 전의 서주(西周)와 제13대 평왕(平王) 때에 도읍을 장안(長安)에서 지금의 낙양으로 옮긴 후의 이름 東周시대로 나뉘며 주나라를 건국한 주 무왕(武王)부터  37대 난 왕이 진()에 멸망되기까지 약 800년간의 역사를 서술한다. 본기 편중에 가장 길며 이때부터 역사적 기록에 의한 중국 역사가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주나라의 시조는 후직으로 요임금의 농관(農官)이 되었고 순임금이 태()에 봉토를 주어 후직이 되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의 의미를 유추해보면 본격적인 농경사회의 시작을 즉 유목생활에서 정착생활로 사회구조가 바뀌는 과정에서 나타난 상징적 인물이라 유추할 수 있다. 주나라는 문왕(文王)에 이어 아들 무왕(武王)이 상()나라의 주왕(紂王)을 정벌하여 서안(西安부근의 호경(鎬京)에 세운 나라로 하(夏) 나라와 상(商) 나라와 더불어 삼대(三代)라고 한다.

 

()나라의 흥망성쇠를 단계적으로 돌아보자면

첫째로 후직의 후손인 공유, 고공단보, 공계등의 업적이 기본적으로 농업 생산을 위민(爲民)정치를 제일의 기치로 삼아 공적을 쌓았고 이를 통한 백성들의 생활 안정과 선정과 덕을 쌓은 결과로 무왕(武王)에 이르러 천명을 받고 주왕조를 세웠음을 말하고 있다. 무왕의 뒤를 이은 성왕(成王) 강왕(康王)은 문왕의 창업(創業)을 계승하여 나라를 발전시키고 수성(守成)을 한 어진 임금들이었다. 즉 군주의 기본적인 덕성이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하는 군주들의 시대였다. 또한 당시에 그 군주를 보좌한 이들 또한 현명한 재상들이었던 것이다.  문왕의 넷째아들 주공(周公) (), 소공(召公) (), 필공(畢公)과 사일(史佚)과 같은 현명한 신하를 등용하여 정치를 잘해서 문물은 흥성하고 물자도 풍부하고 전쟁도 일어나지 않은 태평성세를 구가한 것이다.

 

주 유왕과 포사 : 봉화불 놀이

 

두번째 쇠락의 이유는 상() 멸망후 서주 270여년 역사가 속에서 형제의 의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것은 주 무왕(武王) 다음의 주 성왕(成王) 때 일이다. 주 성왕(成王)이 나이가 어려 태공망 주공(周公)이 대리 섭정을 하던 중 관숙과 채숙 등 여러 동생들이 태공망 주공을 의심하며 반란을 일으키고 주나라를 배신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때 주공이 무경과 관숙을 주살하고 채숙은 내쫓은 일이 있었다. 서주시대의 막을 내린 주 유왕(幽王) 또한 주나라를 쇠락시킨 주범 중 하나이다서주 말기에 무도(無道)한 유왕의 총애를 받던 후궁 포사는 자신이 낳은 아들 백복(伯服)을 태자로 옹립하고자 권신들과 결탁하여 적장자인 의구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했다. 유왕은 포사에게 미혹되어 정실부인 신후와 태자로 있던 의구를 폐위시키고, 포사와 백복을 왕후와 태자로 삼았다. 즉 기본적인 적장과 서자의 질서를 어긴 것이다. 결국 폐비 신씨의 아버지 신후(申侯)가 증국(繒國, 후베이(湖北)성 북부에 있던 나라)과 견융의 군대를 끌어들여 서주를 공격하여, 여산(驪山, 산시(陝西)성 시안(西安) 동쪽의 리산) 아래에서 유왕과 백복을 죽이고, 포사를 잡아갔다.

[네이버 지식백과] 주평왕 [周平王, zhōu píng wáng] (중국인물사전)

 

 

세 번째 단계로 13대 주 평왕의 수도 천도이다. 서주 장안에서 동주 낙양으로 옮기며 주왕실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제후국의 쿠데타로 세워진 주 평왕의 권위는 추락해 갔으며 동으로 수도를 옮기며 낭비된 국력이 춘추 오패보다 더 약한 명목상의 왕으로 전락해 간 것이다. 이런 힘의 균형의 파괴가 힘 있는 제후들을 춘추 패자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즉 제후국중 가장 부강한 나라의 제후를 주왕실이 패자로 인정해주고 천자의 대리자로 제후들을 회맹을 가질 수 있는 권력을 준 것이다. 천자를 대신해 정()과 벌()의 권한을 준 춘추 오패의 시대의 시대인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주 난 왕은 전국시대 이름뿐인 존재로 전락한다. ()이 본격적으로 전국(戰國)의 패권을 차지하며천하 대세는 덕()에서 력()으로 전환되었다. 천명(天命)론이 아닌 유물론적 인간의 존재를 자각하는 시대로 접어들며 천명에 의해 결정되는 천하 패권이 아닌 무력과 국력으로 천하의 패자가 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결국은 인간의 의지가 운명을 결정하는 유물론적 사유를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제나라 직하학파 수장 순자가 쓴 순자의 텍스트에 잘 드러나 있다. 이를 이사와 한비자 등이 계승하며 법가사상으로 발전하여 진(秦)나라의 통치 시스템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런 진()의 동진정책에 희생양으로 주(周) 나라는 멸망해버린다.

 

 

2. 주나라 패망의 단초_ 위정자들이 이()를 밝히면…..

 

맹자의 양혜왕 장구장에 나오는 글을 먼저 읽고 주 본기의 쇠락 과정을 들여다보면 맹자가 역사적인 사실을 통해 오늘날 자본(資本) 주의와 부()에 대한 지나친 탐욕을 경계하라는 까닭을 알 수 있다. 군주가 이익을 탐하면 제후와 대부들 그리고 백성들까지 이익을 욕망하고 그로 인한 다툼이 백성들 간에 대부들과 제후들까지 이르러 결국은 국가 운영에 영향을 미쳐서 국가 전체가 불안해지고 백성들은 궁핍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맹자가 역사를 통해서 이()의 탐욕이 가져올 국가적 위태로움은 오늘날 ‘자본(資本)주의와 부()의 탐욕에 빠진 오늘날을 경계하라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孟子見梁惠王

 

맹자(孟子)께서 양혜왕(梁惠王)을 뵈셨는데,

양혜왕이 말하기를어른께서 천 리를 멀다 않고 오셨는데, 장차 어떻게 우리나라를 이롭게 하시렵니까?”

맹자께서 대답하기를왕께서는 하필이익을 말하십니까. 인의(仁義)가 있을 뿐입니다. 왕께서어떻게 내 나라를 이롭게 할까하고 말하면, 대부들은어떻게 내 집안을 이롭게 할까하고 말하며, 사족들과 서민들은어떻게 내 몸을 이롭게 할까하고 말할 것이니, 위아래가 서로에게서 이익을 취하려고 하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만승(萬乘)의 나라에서 임금을 시해하는 것은 반드시 천승(千乘)의 집안이며, 천승(千乘)의 나라에서 임금을 시해하는 것은 반드시 백승(百乘)의 집안이니, 만 중에 천을 취하고 있는 것과, 천 중에 백을 취하고 있는 것이 많지 않은 게 아니건마는, 진실로 도의(道義)를 뒤로 하고 이익을 앞세운다면, 빼앗지 않고서는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짊에도 부모를 버려두는 자는 있지 않으며, 의로움에도 임금을 뒤로하는 자는 있지 않으니, 왕께서는 또한인의(仁義)가 있을 뿐이다.’라고 말해야 할 것인데, 하필이익[]’을 말하십니까

 

 

 

 

 

주본기 中 이(利)에 대한 탐욕을 경계한 글

 

사마천이 쓴 열전 중 가장 욕을 먹고 있는 것이 화식열전이다. 또한 시대가 바뀜에따라 가장 찬사를 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당시 유학을 국가 지배 이념으로 올려놓은 漢의 유학자들은 사마천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유가의 경제관념에서 크게 위배되는 경제관념이기때문이다. 유가에서는 상업을 억제하고 중농주의 정책을 펼쳐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하려 했기때문이다. 그러나 사기를 좀더 깊게 이해하며 읽어가면 그가 말하고자 했던 利 와 富에 대한 후대 유가적 사유의 비판이 잘못되었음을 볼 수 있다. 아래 주 려왕(미상 ~ BC 828년)과  영나라 군주 이왕이 저지른 利에 대한 탐욕이 나라를 망치는 과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마천이 이야기하는 부와 이익은  '利  不可專也 : 이익은 혼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화식열전의 주된 내용도 마찬가지다. 상인의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말하고 있다.

계연(춘추 송나라의 거상 월 범려의 스승)은 '물건값이 오르면 쓰레기를 내다 버리듯 팔고 값이 떨어지면 보석을 얻듯이 사들였다. '라는 내용을 보면 상인의 기본적인 덕성이 물가안정과 조절에 기여하여 백성의 생활안정에 힘써야 하는 것으로 나온다.  범려(춘추 월나라 정치가, 상인)는 19년동 세번 천금을 모아 모두 가난한 친구와 먼 친척에게 자신의 富을 나눈 상인의 덕성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부자가 되어 덕을 행한다는 것을 천하에 몸소 실천하여 알린 것이다. 유가적 개념이 탑재된 자공을 유상(儒商)으로 앞세웠고, 자공이 벌어들인 富를 바탕으로 공자 천하주유를 도와 유학의 발전을 이뤄 낸 인물이다.

사마천 사기 전편에 흐르는 利, 富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소유가 아닌 천하의 것으로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을 강조한 글로 읽어 내는 것이 더 합당한 것이다. 

 

夷王崩,子厲王胡立。厲王即位三十年,好利,近榮夷公。大夫芮良夫諫厲王曰:「王室其將卑乎?夫榮公好專利而不知大難。夫利,百物之所生也,天地之所載也,而有專之,其害多矣。天地百物皆將取焉,何可專也?所怒甚多,不備大難。以是王,王其能久乎?

이왕붕 , 자려왕호립. 려왕즉위삼십년 , 호리 , 근영이공. 대부예랑부간려왕왈 : [왕실기장비호? 부영공호전리이부지대란. 부리 , 백물지소생야, 천지지소재야 , 이유전지 , 기해다의. 부지백물개장취언 , 하가전야 ? 소노심다 , 불비대란. 이시교왕 , 왕기능구호 ?

 

이왕(夷王: 서주 시대의 제9대 왕)이 세상을 뜨자 아들 여왕(厲王:) ()가 즉위했다. 여왕은 30년간 재위하면서 이익을 탐하고 영(榮) 나라 군주 이공(夷公:포악하고 사치스러운 데다 오만한 성격))을 가까이했다. 대부 예량부(芮良夫)가 여왕(厲王)에게 간했다.

“왕실이 쇠약해질 것 같지 않습니까? 영공(榮公)은 이익()을 독차지하기 좋아하고 큰 어려움이 닥칠 것은 알지 못합니다. 무릇 이익이란 만물에서 생겨나는 것이고, 천지에 널리 실려 있는 것인데 누군가가 독점하면 그 해로움이 많게 됩니다. 천지만물은 모든 사람이 그 이익을 취해야 하는 것인데 어찌 독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되면 많은 사람들의 분노가 심해지면 커다란 재앙에 대비할 수 없습니다이것으로 왕을 가르치니 왕께서 어찌 오래 자리를 지킬 수 있겠습니까?

 

夫王人者,將導利而布之上下者也。使神人百物無不得極,猶日惕懼怨之來也。

》曰『思文后稷,克配彼天,立我蒸民,莫匪爾極』。大雅曰『陳錫載周』。是不布利而懼難乎,故能載周以至于今。今王學專利,其可乎?匹夫專利,猶謂之盜,王而行之,其歸鮮矣。榮公若用,周必敗也。」厲王不聽,卒以榮公卿士,用事

 

무릇 왕 노릇을 하는 사람은 장차 이익을 골고루 소통시켜서 상하의 사람에게 널리 퍼지도록 해야 합니다. 신과 사람 그리고 만물로 하여금 그 지극함을 얻지 못함이 없도록 하되 그러하면서도 오히려 날로 떨면서 경계하며 원망을 초래할까 봐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런 까닭에 <시경> <주송(周頌)>에 이르기를 [‘문덕(文德) 높으신 후직(后稷), 저 하늘과 짝하실 수 있네, 우리 온 백성을 곡식 먹게 하신 일, 당신의 은덕 아닌 것 없네. ] 라고 했고<시경> <대아(大雅)>에서는상제(上帝)께서 주나라에 많은 복 내리셨네.’라고 했습니다.

이는 이분들이 이익을 널리 베풀어 주고도 재난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주나라가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입니다. 지금 왕께서 이익을 독차지하려는 것을 배우 셔서야 되겠습니까?

보통 사람이 이익을 독차지해도 오히려 도적이라고 하거늘 왕으로서 독차지하는 일을 행하신다면 왕에게 귀의하는 사람이 드물 것입니다만약 영공을 등용하시면 주나라는 반드시 패망할 것입니다.”

여왕은 듣지 않고 끝내 영공을 경사(卿士)로 임명하고 정사를 다스리게 하였다.

 

王行暴虐侈傲,國人謗王。召公諫曰:「民不堪命矣。」王怒,得衛巫,使監謗者,以告則殺之。其謗鮮矣,諸侯不朝。三十四年,王益嚴,國人莫敢言,道路以目。厲王喜,告召公曰:「吾能弭謗矣,乃不敢言。」召公曰:「是鄣之也。防民之口,甚於防水。水壅而潰,傷人必多,民亦如之。是故水者決之使導,民者宣之使言。故天子聽政,使公卿至於列士獻詩,瞽獻曲,史獻書,師箴,瞍賦,矇誦,百工諫,庶人傳語,近臣盡規,親戚補察,瞽史誨,耆艾修之,而後王斟酌焉,是以事行而不悖。民之有口也,猶土之有山川也,財用於是乎出:猶其有原隰衍沃也,衣食於是乎生。口之宣言也,善敗於是乎興。行善而備敗,所以財用衣食者也。夫民慮之於心而宣之於口,成而行之。若壅其口,其與能幾何?」王不聽。於是國莫敢出言,三年,乃相與畔,襲厲王。厲王出奔於彘

 

여왕의 행위가 포악하고 대단히 오만하여 국인(國人)이 왕을 비방했다. 소공(召公)이 간하였다. “백성들이 왕의 명령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여왕이 노하여 위(衛) 나라의 무당을 불러들여 비방하는 자들을 감시하게 해서는 보고가 올라오면 비방한 사람들을 곧 죽였다. 비방이 드물어졌지만 제후들은 조회하러 오지 않았다.

여왕 34, 왕이 더욱 엄해지자 국인은 감히 말을 하지 못했고 길에서 만나면 눈짓으로 뜻을 전했다. 여왕(厲王)은 기뻐하며 소공(召公)에게 말했다. “내가 능히 비방하는 것을 그치게 하니 이제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구나.”

소공이 말했다. “이는 막은 것입니다. 백성의 입을 막는 일은 물을 막는 것보다 폐해가 심합니다.

물이 막혔다가 터지면 필시 많은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처럼 백성들 또한 이와 같습니다. 그런 까닭에 치수를 하는 자는 물을 잘 흐르게 터서 소통시키고,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은 드러내 놓고 말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자는 정사를 처리할 때 공경과 일반 관리들에게 시를 써서 바치게 하고, 소경 악사에게는 음악을 지어 올리게 하며, 사관에게는 사서(史書)를 바치게 하고, 악관에게는 잠언을 올리게 하며, 눈동자가 없는 맹인에게는 바친 시를 낭송하게 하고, 눈동자 있는 소경에게는 잠언을 외게 하며, 백관들은 간언을 올리게 하고, 서민들은 여론을 전달하게 하며, 가까운 신하들에게도 올라온 직언을 살피는데 힘을 쓰게 하고, 친인척은 왕의 잘못을 살펴 보좌하며, 소경 태사(太師)와 태사(太史)는 가르쳐서 깨우치게 하고, 원로대신들은 훈계하는 말을 하게 한 뒤에 왕이 이를 헤아려서 참작하여 시행하면, 모든 일이 잘 시행되어 사리에 어긋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백성에게 입이 있는 것은 마치 땅에 산과 강이 있어 재물이 여기에서 나오는 것과 같고, 또 평야와 습지와 평평한 땅과 기름진 땅이 있어서 입고 먹을 것이 여기에서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입으로 드러내 놓고 말하게 하면 정사의 잘잘못이 여기에서 일어납니다. 백성들이 좋다는 것은 실행하고 잘못한다는 것을 방지하는 것은 재물을 생산하여 입고 먹는 것에 쓰는 방법과 같기 때문입니다. 무릇 백성들은 속으로 생각한 다음 입으로 드러내 놓고 말하며 잘 생각한 뒤에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의 입을 막으면 그것이 얼마나 오래가겠습니까?” 여왕은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이에 나라에는 감히 말하려는 자가 없어졌고, 3년 뒤 서로 힘을 합쳐 반란을 일으켜서 여왕을 습격했다. 여왕은 체()로 도망갔다.

 

주 여왕은 결국 백성과 수도를 버리고 체()로 도망갔다. 예랑부라는 현신(賢臣)을 두었으나 그의 간언(諫言)을 쓰지 않고 영신(佞臣) 이공(夷公)을 곁에 두고 정사를 논하며 스스로 망해간 것이다. 사마천은 주 유왕(幽王) 보다 많은 글로서 주 려 왕의 실정을 말하고 있다. 예랑부와 소공이 간언한 말은 어느 것 하나 버릴 만한 것이 없다. 사기 중에서 손꼽을 명문장이기도 하다 논리의 전개와 설득력 있는 비유와 예시 등이 바로 앞에서 내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사마천은 이를 통해 주나라의 쇠망이 포사를 끼고 놀기만 한 주 유왕(幽王) 보다 오히려 이권(利權)에 관심을 두고 아첨하는 신하를 곁에 두고 현명하고 능력 있는 신하를 멀리한 주 려왕의 실정을 나쁘게 평가하고  더 신랄하게 붓을 통해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