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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사기/본기

질투와 권력욕의 화신_여태후

 

한고조와 여태후

여태후의 본병은 여치(呂雉)이다. 아버지 여공에 의해 패현에서 건달 노릇을 하던 유방에게 반강제로 결혼은 하였다. 당시 유방은 과부인 조 씨와 정을 통하여 훗날 제나라 왕이 되는 유비(劉肥)를 낳은 상태에서 여치를 본처로 맞아들인 것이다. 한고조 본기와 여태후 본기를 통해 그려지는 여태후의 파란만장한 삶을 들여다보면,평민의 여식으로 태어나 통일 한나라 황제의 황후로서 그 어느 누구도 가지지 못할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한왕으로 등극하는 시점부터 한고조와 부부로서의 관계는 소원해지고 본인이 누렸어야 할 여자로서의 행복은 척부인과 박부인 그리고 여러 후궁들(諸姬)에게 빼앗겨 버린 것이다. 한고조와 여태후사이에 적장자 유영(劉盈)과 노원공주를 낳게 된다. 이 유영이 훗날 효혜제가 된다.

 

사마천이 후대 역사학자들에게 욕을 먹는 이유 중 하나가 여태후를 본기에 올린 것이다. 본기는 제왕의 역사기록임에도 불구하고 여태후를 본기에 올렸다. 이는 사마천이 15년간 실질적 권력을 행사한 여태후의 역사적 위치를 평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 당시 정치적 변란은 심하였으나 한나라의 富와 민간 경제는 엄청난 발전을 한다. 이를 바탕으로 한 문제와 경제로 이어지는 한나라의 태평성세 문경지치(文景之治)’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어찌 보면 역사적인 아이러니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어다 보면 고조 유방의 여민휴식(與民休息)에 바탕을 둔  約法三章이 그 근간을 이루었다.

 

1. 여태후의  질투가 원한으로...

 

유방은 진시황 사후 일어난 봉기에 가담하여 전장을 누비며 여러 여자를 품게 된다. 사마천 기록에 나오는 척부인이 세 번째 여자이고 그다음이 위나라 왕 위표의 아내였던 박(薄) 부인이다.그 후로도 많은 여자를 맞아들여 사마천 사기에서 제희(諸姬)로부터 여러 아들을 얻었다고 나온다. 한고조 유방은 모두 여덟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중 척부인의 총애가 깊어 유방은 여태후를 멀리하며 그로 인한 상실감과 원망은 깊어만 갔을 것이라 보인다.한고조 유방이 말단관리인 정장 시절부터 초패왕과 천하 쟁패하던 당시의 인질생활의 고초를 겪으면서도 시아버지 태공과 집안 식구를 유방을 대신하여 돌보았던 것이다. 이와 반대로 한왕은 그 전란 중에도 척부인과 많은 후궁을 거느리고 여태후는 멀리한 것이다. 이러한 고조 유방의 여성 편력은 여태후 여치로 하여금 질투의 화신으로 만든 것이다. 유방이 거느린 비빈들 중 단 한 명도 동복(同腹) 형제도 없다는 것은 한 여자에게 만족을 하지 못하고 여러 여자를 거느린 것을 말하며 이것을 평생 지켜봐 온 여태후의 마음 상함을 미루어 짐작해본다.

 

 

한고조가 죽기 전 태자였던 유영을 폐하고 척부인의 아들인 유여의를 태자로 세우려 하였다. 이를 안 여태후는 유후 왕량의 지혜를 빌어 태자 폐위 시도를 무력화시킨다.이러한 척부인과 한고조의 시도가 여태후를 가족 간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의 화신으로 만들어버렸다. 여태후의 성정을 잘 알고 있는 고제 유방은 여의를 조나라 왕으로 봉하고 개국공신 주창을 여의의 신하()로 딸려 보낸다. 주창의 성정은 고지식하나 그의 충성스러움은 여의를 여태후의 음모로부터 지켜낼 적임자였다.

 

한고조 유방이 죽자그녀의 아들 효제가 황제에 자리에 오르자 여태후의 시기심은 잔악한 성정으로 바뀌어 간다. 그 첫번째 타깃이 척부인과 여의였던 것이다. 그 첫번째 조치가 척부인을 죄지은 시녀들이 있는 영항(永巷)으로 보내었고 조왕 여의를 궁으로 불러들여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이를 알아챈 조() 상국(相國) 건평후 의 반대하여 세 번이나 사자를 돌려보냈다. 이에 여태후는 건평후 주창을 불러들이고 주창이 없는 틈을 타 조왕 여의를 궁으로 소환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여태후의 의도를 간파한 효혜제는 조왕 여의를 끼고 살다시피 하며 여태후의 살해시도를 적극적으로 막아선다.그러나 혜제가 잠시 긴장의 끈을 놓고 사냥을 나간 사이 여태후는 조왕 여의를 독살한다. 그리고 얼마 후 척부인을 인간 돼지(사지를 자르고 눈을 파내고 귀를 멀게 하고 벙어리로 만듦)로 만들어 측간(厠間)에 버리고 그 모습을 혜제에게 보여준다. 동생 여의의 죽음으로 받은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 척부인의 모습을 본 혜제는 그 충격에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에 대성통곡하며 여태후를 원망한다. 그 뒤로 큰 병이 난 혜제는 1년이 지나도록 일어나지 못하였고, 사람을 보내 여후에게 말하였다.

이는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이 몸은 잔혹한 태후의 아들이니 더 이상 천하를 다스리지 못하겠습니다. “

결국 그 트라우마를 견디지 못하고 정사는 돌보지 않고 술과 향락에 빠져 재위 7년만(BC 188)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한 평민의 딸로 태어나 천하 건달 유방의 처가 되고 초한 쟁패 시 온갖 수모를 이겨내고 유방을 대신하여 가족을 보살펴왔다. 유방이 한왕이 되어 첩을 들이며 여태후를 멀리하기 시작하며 척부인의 애교에 눈이 먼 고조로 인해 하나뿐인 태자 유영이 폐위될 뻔한 기억, 이 모든 것들이 여태후로 하여금 질투의 화신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 타고난 성정이 모질고 악하여 정적이던 한신과 팽월을 모략으로 죽여버리고, 척부인의 아들 마저 독살시키고 유방이 살아생전에 총애하였던 척부인을 인간 돼지를 만들었다. 이 모든 역사적 사실을 사마천은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2. 여씨 천하의 시작

 

유방이 죽고 유영이 제위를 물려받아 효혜 제가 된다. 유방의 아들 여덟명은 모두 영지를 받고 제후가 되었으며 척희의 아들 여의는 조나라 왕이 되었다.  하나뿐인 아들 혜제가 죽고 여태후는 망연자실한다. 본기의 내용중 혜제의 상중에 여태후는 哭은 하였으나 泣은 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본 장량의 아들 장벽강(15세 侍中)이 좌승상 진평에게 여태후의 심정을 일러 말한다.

“효혜제께서 장성한 아들을 두지 않으셨으니 대신들이 어찌 나올지 몰라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좌승상(진평)께서는 여태 여산 여록등을 장군삼아 남군과 북군을 통솔하게 하시고 여씨들을 궁으로 불러 벼슬을 내린 뒤 조정의 일을 맡기겠다 청하십시오. 그리하면 태후마마께서 안심하실것이고 대신들도 화를 면하실 것입니다.”

이에 진평은 장벽강이 건의한 대로 처리했다. 여후는 그때서야 안심하고 슬퍼하고 울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유씨의 한나라에서 연결고리가 없어진 여태후의 불안함이 ‘哭’ 은하고 泣은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여태후는 여씨 일가의 한나라를 꿈꾼다. 소제가 즉위했지만 여태후가 섭정하고 여씨 일가로 권력이 하나둘씩 넘어가기 시작한다. 여후는 여씨를 제후로 봉하려 하자 우승상 왕릉이 눈치 없이 반대한다. 그 반대의 명분은 한고조 유방이 유언한 유씨 성을 가진 자 외에 왕()을 만들지 말라고 하는 유언을 말한 것이다. 그러자 여태후는 우승상 왕릉의 관직을 빼앗아버리고 태부의 자리로 좌천시켜버린다. 그러자 왕릉은 병을 핑계삼아 낙향을 해버린다. 그뒤 여후는 진평을 우승상에 자신의 최측근 심이기를 좌승상에 앉히고 전횡을 시작한다.

 

그 첫 타깃이 유방의 장자였던 제나라 도혜왕 유비를 독살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신하의 기지를 발휘해 노원공주에게 제나라 성 일부를 바치고 살아서 제나라로 돌아간다. 조나라 隱王 유여의는 독살되고, 이어 왕위에 오른 유왕(幽王) 유우도 장안으로 불려가 굶겨죽였다. 연나라 영왕(靈王) 유건(劉建)이 죽자 여후는 사람을 보내 유건의 하나뿐인 아들마저 죽여 후사를 없애버린다. 그녀의 악행은 지속된다. 그녀가 세운 허수아비 왕 소제(?)가 그녀 친모가 살해됨을 알고 복수를 다짐하자 소제를 영항(永巷)에 가두고 신하들에게 병이 심하다는 이유로 접견을 막는다. 결국 모함하여 폐위시키고 독살한다. 그런 다음 상산왕 유의(劉義)를 황제로 세우고 이름을 유홍()으로 개명시킨다. 그녀의 뼛속 깊히 사무친 원한이 16년 권력의 정점에서 자신과 관련 없는 유 씨의 제후 왕들을 제거해 나간 것이다. 이와 같은 유씨성의 제후들의 제거작업은 어찌 보면 한고조 유방에 대한 복수를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태후의 권력욕은 유씨 왕족의 권력 찬탈로 이어진다. 유씨성의 왕족들에게 여씨 성을 가진 이와 결혼을 시킨다. 그리고 여씨 성을 가진 제후들을 본격적으로 만들어 간다. 왕과 후로 책봉한 인사들 만 9명에 달하였고 병권을 장악하기 위해 남부군과 북부군의 장군으로 여씨 일가로 채워버린다.

 

16년동안 정권을 장악하고 결국 병으로 여태후는 죽어간다. 죽기전 여태후는 여산 여록등에게 유언을 남긴다.

나는 곧 죽을 것이다. 황제가 어리니 대신들의 정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반드시 병권을 장악하고 황궁을 지켜야 한다. 영구 행렬을 따른답시고 궁을 비워서는 절대로 안되며 다른 사람에게 궁을 맡겨서도 안 된다.”

 

그러나 여후가 죽자(BC 180) 여후의 염려대로 원로공신과 유 씨 성을 가진 제후들이 연합하여 여 후세력을 제거해 버렸다. 이렇게 파란만장한 여태후의 생은 마감한다. 평민의 딸에서 제국의 황후로 그리고 태후로 권력의 정점에 있던 여태후가 죽어간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다져진 원한과 두려움이 가슴속에 응어리처럼 남아있었고 정권 초기에 그 두려움은 공신들의 제거로 표출되었고, 원한은 척부인에게 복수와 유씨 성을 가진 왕들에 대한 제거로 이어졌다. 사마천은 이러한 고통스런 여태후의 삶을 글을 통해 보여준 것이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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