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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사기/본기

초한쟁패(楚漢爭覇) 의 시작

 

1. 항우(項羽)

 

초패왕과 한고조

 

항우(기원전 232 ~ 202) 이름은 적() 자는 우()이다. 전국시대 말 초나라 말 대장군 항연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 조국 초나라의 멸망을 겪었고 장성하여서는 진나라의 통일의 상황에서 삼촌 항량에게 맡겨져 몰락한 귀족 가문의 자제로 자라났다. 젊은 시절 키가 8척 큰 솥을 들어 올릴 정도로 힘이 장사여서 역발산기개세 (力拔山氣蓋世)란 말이 있을 정도였다. 항우의 품성을 알 수 있는 두 일화가 있다. 그 첫째가 삼촌 항량이 항우에게 글을 가르치고 검술을 배우게 하였으나 다 마치지 못하고 핑계를 댄 글이 있다.

 

項籍少時(항적소시),學書不成(학서불성),去學劍(거학검),又不成(우불성)。項梁怒之(향량노지)

籍曰(적왈) 「書足以記名姓而已(서족이기명성이이)。劍一人敵(검일인적),不足學(부족학),學萬人敵(학만인적)。」 於是項梁乃教籍兵法(어시항량내교적병법),籍大喜(적대희),略知其意(약지기의),又不肯竟學(우불긍경학)

항적이 어릴 때 글을 배웠으나 다 마치지 못하였고 학문을 포기하고 검술을 배웠으나 또한 머치지 못하였다 항량이 이 때문에 화를 내었다. 그러자 항적이 말하길 [글은 이름과 성을 쓰는 것으로 족합니다. 검은 한 사람을 대적하는 것이니 배우기에 부족하니 만인을 대적할 수 있는 것을 배우렵니다]….. 중략….. 병법 역시 대략 그 뜻만 알고 끝까지 배우려 하지 않았다.

 

그 두 번째가 진시황의 행차를 보고 자신이 대신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숙부인 항량에게 내비친 일이다. 이것으로 항량은 항우의 비범함을 깨닫고 그를 곁에 두고 길러나간다. 이러한 호방함은 훗날 장수로서의 능력을 극대화시키는 요소로 작용하여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수의 반열에 오르게 한다. 서초패왕이라는 말은 있었지만 황제라는 칭호는 없었다. 사마천이 사기를 쓰며 한고조와 같은 반열에 초패왕 항우를 놓은 것만으로도 불손한 것이다. 게다가 그 시절이 한(漢) 왕조 한 무제(武帝)의 엄혹한 시절이었음에도 기록을 해나간 것만으로도 미루어 본다면 이 사기를 쓴  사마천의 숨겨진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를 본다. 항우와 한고조 본기를 비교해 연구하다 보면 그 의중을 미루어 짐작만 할 뿐이다.    

 

秦始皇帝游會稽(진시황제유회계),渡浙江(도절강),梁與籍俱觀(양여적구관)。籍曰(적왈):「彼可取而代也(피가취이대야)。」

진시황이 회계를 유람하고 절강을 건널 때 항량과 항우가 함께 구경하였다. 항우가 말했다: [저 자리는 빼앗아 대신하겠습니다.]

 

위의 두 사례는 항우의 성정을 잘 드러나는 글로서 오만함과 대담함이 같이 묻어나는 글이다. 초나라 명장의 후손으로 귀족의 기품과 위엄이 서린 대장부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으나 그의 이런 대범한 성격을 비범한 방법으로 통제하지 않으면 누구도 통제가 불가능한 것이었다.

 

 

 

 

2. 거록(巨鹿)과 팽성 전투

 

거록전투와 항우 유방의 진격로

 

項羽已殺卿子冠軍,威震楚國,名聞諸侯。乃遣當陽君、蒲將軍將卒二萬渡河,救鉅鹿。戰少利,陳餘復請兵。項羽乃悉引兵渡河,皆沈船,破釜甑,燒廬舍,持三日糧,以示士卒必死,無一還心。於是至則圍王離,與秦軍遇,九戰,其甬道,大破之,殺蘇角,虜王離。涉閒不降楚,自燒殺。當是時,楚兵冠諸侯。諸侯軍救鉅鹿下者十餘壁,莫敢縱兵。及楚擊秦,諸將皆從壁上觀。楚戰士無不一以當十,楚兵呼聲動天,諸侯軍無不人人恐。於是已破秦軍,項羽召見諸侯將,入轅門,無不膝行而前,莫敢仰視。項羽由是始諸侯上將軍,諸侯皆屬焉

………. 개침선 , 파부증, 요로사, 지삼일량, 이시사졸필사, 무일환심. ……

………. 초전사무불일이당십 초병호성동천, 제후군부불입인인췌공. 어시기파진군, 항우소견제후장, 입원문, 무부슬행이전, 막감앙시……

 

…..(중략) 모두가 타고 온 배를 침몰시키고, 밥솥을 깨뜨렸으며 화로를 버리고 삼일 치 식량만지니고 병사들이 죽을지언정 돌아올 마음을 한 사람도 지니지 않았다…..

()의 전사들은 한 명이 열 명을 당해내지(以一當十)  못하는 사람이 없었고, 부르짖는 소리는 천지(天地)를 흔들었으며, 제후들의 군사들은 서로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이미 진()의 군사를 깨뜨리고 항우(項羽)는 제후들의 장수들을 불러 보았는데, 원문(轅門)으로 들어오는 제후들의 장수들 중 무릎으로 기어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감히 올려다보는 사람도 없었다.

 

기원전 207, 진나라 장수 장한(章邯)이 항량(項梁)의 군대를 격파한 후, 조(趙)나라를 공격하자 조왕(趙王)이 거록성(鉅鹿城)으로 도망하였다. 장한과 부장 왕리‧섭간이 거록성을 포위하니, 초 회왕(楚 懷王)이 송의(宋義)를 상장군(上將軍으로), 항우(項羽)를 차장(次將)으로 삼아 조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초나라 군대가 안양(安陽)에 이르자 송의(宋義)는 진나라 군대를 두려워하여 진영에 머문 채 46일을 관망하자 항우(項羽)가 화가 나서 송의를 죽이고, 장하(漳河)를 건너 거록(鉅鹿)에서 진나라와 싸워 진나라 군대를 대파했다.

 

거록에 이르자 봉기한 제후들 모두가 진과 조나라 둘의 싸움에서 눈치만 보는 중이었다. 항우는 이 거록 전투의 중요성을 익히 알고 있었다. 진승과 오광이 이끌던 봉기군의 주력을 진 장수 장한이 격파하고 그 여세를 몰아 조나라까지 진압하려 군대를 보낸 것이니 이 진나라 군세를 깨트리지 못하면 봉기군에게는 어려워질 국면을 알고 있었다.

 

이러던 차에 전쟁에 소극적이던 송의를 참살하고 장하를 건너며 타고 온 배는 침몰시키고 밥을 짓던 솥도 깨트려 버리는(파부침주(破釜沈舟)) 극단적 전략을 통해 병사들의 사기를 극대화시킨다. 아홉 번에 걸친 대회전 중 항우는 진나라의 보급로를 끊어버리는 전술로 결국 진나라 왕리가 이끄는 군대를 격파한다. 거록전투에서 패한 장한은 항우에게 항복한다. 결국 이 거록 전투는 진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전투가 되었고 항우는 10개 제후들을 복속시키며 봉기 군의 상장군이 되어 모든 병권을 손에 쥐고 사실상 패자로 올라서게 된다.

 

사마천이 항우를 왜 본기에 올렸을까?를 고민해 본다. 표면적으로는 진나라를 멸하고 초 회왕을 죽이고 나서 스스로 초패왕으로 올라서며 봉기 반란에 참여하였던 제후들의 봉토를 나눠주었다는 표면적인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전 생애를 걸쳐 진행되었던 전투의 승리와 그의 성과가 사마천 시대 이전의 어느 누구도 해내지 못한 전과가 있어서 일 것으로 짐작해본다. 거록전투에서 승리 후 사실상 봉기 군의 패장(覇將)의 위치에 올라서고 팽성 전투에서만의 병사로 56만의 유방 연합군을 물리친 역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대승리도 기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 무려 19배에 가까운 전력차를 극복하고 승리한 이 전투는 항우를 중국 최강의 용장으로 각인시킨 대전(大戰)이었다.

 

항우의 대담함과 비범함은 초패왕 되기 전까지 장수로서의 능력으로서는 유효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운영은 그 둘만으로 되기에는 부족한 것이다. 기본적인 국가운영의 철학이 부족했다. 남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는 오만함으로 신하를 모셔오고 일을 맡기어 국정운영을 해나가는 능력이 부족했다. 유방은 소하와 장량 한신이라는 세 능신(能臣)을 모셔와 그들에 일을 맡기어 국가를 운영할 수 있었던 반면  이십 세 나이에  거록 전투에서 승리하고  그것에 취한 오만과 독선으로 뭉쳐진 항우는 결국 초나라 명 책사인 범증의 말을 듣지 않아 결국 천하를 유방에게 빼앗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2. 항우의 실책_ 천부적 재능이 가져온 오만과 경솔

 

진나라의 패망의 단초는 진시황의 폭정과 무능한 호해의 실정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그보다 일반 백성들 특히 난을 일으킨 진승과 오광의 난에서 미루어 본다면 진나라의 법과 엄형(嚴刑)의 집행이었다. 그리고 전한(前漢)의 학자 가의(賈誼)가 쓴 과진론(過秦論)에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즉 통일 중국에 인의가 베풀어 지지 않고550여 년의 춘추 전국시대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중의 삶은 돌보지 아니하고 아방궁 만리장성 황릉 축조, 도로 건설 등의 부역에 동원된 백성들의 견디기 힘든 삶이었다.

 

초패왕과 한고조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이 부분이다. 한고조는 덕()으로써 인재들을 감화시켜 자기편으로 만들었고 전쟁을 하는 상대편 장수와 백성들에게도 전쟁보다는 설득을 통해 전투와 적()을 최소화시킨 것이다. 이와 반대로 항우는 초나라 명문가 출신과 그의 8척에 이르는 체구 그리고 그의 카리스마 넘치는 용병술로 위세에 복종하는 신하들이 많았던 것이다. 인의(仁義)의 베풂보다는 강력하지만 무자비한 리더십을 통한 용병술에 기반하여 적을 많이 만들어 내게 된 것이다. 결국 이 차이가 중원의 제후들이 항우보다 유방에게 이끌리게 되고, 천하는 유방의 차지가 되었다.

 

 

진시황 본기중()

且夫天下非小弱也,雍州之地,函之固自若也。陳涉之位,非尊於齊、楚、燕、趙、韓、魏、宋、衛、中山之君;棘矜,非錟於句戟長也;適戍之,非抗於九國之師;深謀遠慮,行軍用兵之道,非及時之士也。然而成敗異變,功業相反也。試使山東之國與陳涉度長大,比權量力,則不可同年而語矣。然秦以區區之地,千乘之權,招八州而朝同列,百有餘年矣。然後以六合家,宮,一夫作難而七廟墮,身死人手,天下笑者,何也?仁義不施而攻守之勢異也

중략…… 연후이육합위가, 효함위관, 일부작난이칠조타, 신사인수, 위천하소자, 하야? 인의불시이공수지세이야.

 

그런 다음 천하를 한 집으로 만들고 효산과 함곡관을 궁으로 만들었는데 한낱 사내가 난을 일으켜 천자의 사당이 무너지고 자신은 남의 손에 죽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된 것은 왜인가? 인의를 베풀지 않았고 공격과 수비의 형세가 다른 까닭이다.

 

항우의 기본적인 전술은 죽이거나 멸(滅)하는 것이었다. 그 첫 번째가 회계태수 은통을 살해하고 회계 지역의 반란군의 전권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 진(秦)전쟁의 지작에서 항우는 별동대를 이끌고 양성(襄城)의 공격에서 양성 주민의 결사항전으로 전투가 어려웠으나 결국 함락하였다. 양성 주민의 결사 항전에 분노한 항우는 양성 주민 5천여 명을 모두 구덩이에 파묻어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로 인해 항우의 잔인성과 참을성이 부족한 그리고 오만한 성정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또 다른 일화는 초나라 상장군인 송의와 그의 수하가 된 항우 간의 전술적 견해차로 인해 그 불만을 참지 못하고 송의와 그의 아들을 죽이며 조나라를 구원하러 간 사건이다. 물론 역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송의의 전술적 오류가 있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항우의 성정이 눈앞의 적을 설복을 통해 전투 없이 승리를 하는 것보다 치열한 전투를 치르며 승리를 하는 편을 택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결국 적의 설복을 통해 낙양으로 한 발 앞서간 항우의 전술에 한참 뒤지는 것이었다.

 

항우는 모든 전투에서 승리한다. 먼저 왕리가 이끄는 진나라 주력군을 격파하고 장한을 항복시켜 진나라 멸망을 앞당겼다. 이때 항우가 한 가장 큰 전술적 실수는 신안(新安) 대학살이다. 유방과 함양 입성을 다투던 항우는 진나라 20만 포로가 함양으로 가는 진군에 걸림돌이 된다 여겨 낙양(洛陽)에 있는 신안(新安)에서 이들 모두를 생매장해 죽인 사건이다. 앞서 있었던 모든 전투에서 항우는 죽이거나 멸절시키거나 하였다. 이와 반대로 유방의 책사 장량의 도움으로  전투없이 승리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 둘의 극명한 전술적 차이가 그들을 따르던 반란군들의 충성도의 깊이를 달리한 것이다. 항우는 위압적 고압적인 리더십으로 유방은 관용과 인덕의 리더쉽으로 조직을 이끌었다. 결국 이 둘의 차이가 유방으로 하여금 항우를 이기고 한(漢) 나라를 건국하게 만든 것이다. 

 

 -. 젊은 꼰대 항우, 진정한 리더 유방

 

吾不如子房, 吾不如蕭何, 吾不如韓信 :나는 장량보다도, 소하보다도, 한신보다도 못하다.

 

장량 소하 한신

 

리더십의 완성은 인재를 데려와 쓰는 것이 아니라 인재를 모셔와 그의 말을 듣는 것이다. 항우와 유방을 가르는 두 번째 가장 큰 특징은 유방의 리더십에서 보인다. 항우는 초나라 명문가에서 태어나 글과 검술과 병법을 익혔다. 앞 장에서 그의 심성을 엿볼 수 있는 있다. 그러나 그의 생 전반을 통해 그의 개인적인 자질 검술 능력과 군대 운용술에 대해서는 기록을 통해서도 오만할 자격이 있다 여겨질 정도이다. 그의 마지막 전투인 해하(垓下) 전투를 제외한 모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그의 수하에 용장과 용사들이 많은 이유도 있지만 역사적 기록을 통해 보여준 그의 전술의 탁월함에서 이의(異意)를 달 수가 없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온 전투에서 승리가 그를 더욱 오만하게 적을 가벼이 보고는 경솔함으로 이끌었다. 그의 그런 자신감은 결국 유방을 쉽게 여겨 홍문지연에서 그를 놓아주고, 그를 그 당시 오지였던 한중(漢中)으로 보내버린 것으로 방심하였다. 항우는 다 잡은 호랑이를 놓아주는 어이없는 실수를 범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책사였던 범증의 책략을 내쳐서 유방과의 패권 다툼에서 지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15살이나 더 많은 유방보다 더 꼰대스럽게 변해간 것이다.

 

위정자(爲政者)로써의 유방의 자질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한 고조본기 57

 

高祖置酒陽南宮。高祖曰:「列侯諸將無敢隱朕,皆言其情。吾所以有天下者何?項氏之所以失天下者何?」高起、王陵對曰:「陛下慢而侮人,項羽仁而愛人。然陛下使人攻城略地,所降下者因以予之,與天下同利也。項羽賢嫉能,有功者害之,賢者疑之,戰勝而不予人功,得地而不予人利,此所以失天下也。」高祖曰:「公知其一,未知其二。夫運籌策帳之中,決勝於千里之外,吾不如子房。國家,撫百姓,給,不糧道,吾不如蕭何。連百萬之軍,戰必勝,攻必取,吾不如韓信。此三者,皆人傑也,吾能用之,此吾所以取天下也。項羽有一范增而不能用,此其所以我擒也。

….중략 [공지기일, 미지기이. 부운주책유장지중, 결승어천리지외, 오불여자방. 진국가, 무백성, 급궤양, 부절양도, 오불여소하. 연백만지군 전필승, 공필취, 오불여한신

 

군막 안에서 계책을 내어 천 리 밖의 승리를 결정짓는 일은 나는 자방(子房:장량)만 못하다. 국가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위로하고, 군량을 공급하고 식량 운송로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은 내가 소하(蕭何)만 못하다. 백만 대군을 통솔해 싸우면 반드시 승리하고 공격하면 반드시 빼앗는 일은 내가 한신(韓信)만 못하다.

 

-. 전국시대 최후의 승자 유방과 도쿠가와 이에야스

 

일본의 전국시대 당시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사의 변으로 죽자 1568년 히데요시가 정권을 차지한다.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세력을 견제하고 약화시키려는 심산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영지 변경의 명한다. 선조 대대로 살아온 혼슈지방을 내놓고 마지막으로 정벌한 호조 우지마사의 영지 지금의 에도로 이전을 명한 것이다. 그 당시 영지 변경은 영주에게 치욕일 뿐만 아니라 그 변경된 영지의 관리나 백성들이 새로 오는 영주에게 우호적이지 않아 잦은 반란과 다툼이 일어난다. 결국 역량이 부족한 영주는 새로이 부상하는 사무라이나 주변 영주에게 땅을 빼앗기거나 죽임을 당하게 되기도 한다. 이에야스는 도요토미로부터 치욕스러운 영지 변경의 명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의 기본적인 덕성인 애민(愛民)과 경제 개혁을 통해 지역 주민의 충성심을 얻었으며 그 당시 정치의 중심지인 오사카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 후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각 지방 영지에 제후들에게 징병을 명한다. 다른 모든 가문은 일정의 전쟁비용과 군대를 징집당하지만 히데요시의 견제로 영지를 변경당한 이에야스는 징집과 전쟁비용 부담에서 해방되는 행운을 얻게 된다.이에야스 가문만이 온전히 군대와 전쟁비용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또한 영지 변경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이에야스를 보며 히데요시는 방심을 한다. 결국 이를 바탕으로 이에야스는 임진왜란 이후 히데요시가 죽고 난 다음 권력을 잡게 되는 계기가 된다.

 

항우 또한 히데요시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결국 유방을 견제하기 위해 영지의 변경과 동일한 패현 지방이 아닌 한중 땅으로 유폐에 가까운 봉지(封地)를 하사한다. 유방은 한중(漢中) 땅으로 들어가며 유일한 도로였던 잔도(棧道)를 부수면서 항우를 방심하게 만들어 버린다. 항우는 유방의 역량을 과소평가하였다. 유방 개인으로서의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평민출신에 정치적 기반도 명문가의 자제도 아닌 유방이 었기에 과소평가는 어찌 보면 당연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유방이 가진 군주로써의 덕성은 간과하였다.그의 덕성은 인재를 모이게 하였고 모인 인재의 역량을 십분 발휘할 수 있게 자신을 낮추는 리더십을 보였던 것이다.

 

결국 항우는 장수로서의 자질은 중국 역사상 최고였으나 국가운영을 위한 군주로서의 자질은 형편없었던 것이다. 통일 중국의 군주로서의 부족한 자질과 그의 과격하고 오만하고 경솔한 심성은 천하 민심(民心)이 유방을 택하게 하였다.

 

3. 영웅의 마지막 기개(氣槪)

 

 

項王軍壁垓下,兵少食盡,漢軍及諸侯兵圍之數重。夜聞漢軍四面皆楚歌,項王乃大驚曰:「漢皆已得楚乎?是何楚人之多也!」項王則夜起,帳中。有美人名虞,常幸從;駿馬名騅,常騎之。於是項王乃悲歌慨,自詩曰:「力拔山兮氣蓋世,時不利兮騅不逝。騅不逝兮可柰何,虞兮虞兮柰若何!」歌數闋,美人和之。項王泣數行下,左右皆泣,莫能仰視。

…중략… 역발산기개세 시불리혜추불서, 추불서혜가내하, 우혜우혜내약하!....

 

해하가(垓下歌)

힘은 산을 뽑을 만하고, 기운은 세상을 덮을 만한데

때가 불리하여, 오추마는 나아가지 않는구나

오추마가 달리지 않으니, 이를 어찌할 것인가

우희야, 우희야, 이를 어찌한단 말이냐?

 

虞姬歌 (우희가)>

漢兵已略地 四面楚歌聲 大王義氣盡 賤妾何聊生! 한병이략지 사면초가성 대왕의기진 천첩하료생

 

한나라 병사가 이미 초나라 땅을 차지했고

사면의 들리는 것은 초나라 노랫소리

대왕의 의기가 다 했으니

천첩이 어찌 살리오!

 

패왕별희는 중국의 경극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사면초가에 몰린 초패왕이 마지막 전투 해하(垓下)에서 마지막을 직감하고 우희(虞姬)와 이별을 할 당시 부른 노래가 있다. 이 해하가(垓下歌)는 사기에 그 내용이 나와있다. 우희는 항우가 가장 총애하는 미인이고 추()는 항우가 즐겨 타는 애마이다. 항우 옆에는 우미인이 막사 옆에는 명마 추()를 바라보며 감상에 젖은 어조로 노래를 불렀다. 이에 우미인이 화답하는 답가는 사기에 나와 있지 않으나 사기 본문에 미인화지(美人和之)라는 글을 미루어 당의 장수절이 초한 춘추에 따라 사기 정의에 수록하여 지금까지 전한다고 한다(나무 위키)이 초패왕과 우미인의 이야기는 소설로 그리고 경극으로 영화로 만들어지며 그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볼 수 있는 것이다.

 

항우는 마지막 전투 해하에서 팔백의 기병을 이끌고 일기당천(一騎當千)의 기세로 한(漢) 나라 군대의 포위망을 뚫고 밤새 남쪽으로 달아난다. 그 사실은 안 한나라 군대가 한나라 장수 관영에게 기병 오천을 주어 추격하게 하니 회수(淮水)를 건넜을 때 남은 군사는 백여 명에 이르렀다. 항우가 동성(東城)에 도착하니 그때 남은 병사는 겨우 스물여덟 한나라 수천의 군사는 몰려오고 더 이상 도망치기는 어렵다 판단한 초패왕은 부하들에게 이야기한다.

 

“거병한 지 팔 년 칠십여 차례 전투를 치르는 동안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기에 천하의 패권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서 곤경에 처했다. 이는 하늘이 나를 버리려는 것이지, 결코 내가 싸움을 못해서가 아니다. 어차피 여기서 죽을 운명이라면 내가 너희들에게 삼연 승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 너희를 위해 포위를 뚫고 적장을 베고, 적군의 깃발을 찢을 것이다. 그러면 너희들은 내가 진 것이 싸움을 못해서가 아니라 하늘이 나를 버렸기 때문임을 알게 될 것이다.”

 

결국 포위를 뚫어내고 오강에 이르렀으나 그 강은 건너지 않고 일부 수하들과 함께 마지막 결전을 벌여 수백 명과 치열한 접전을 벌인다. 결국 전투에 지친 초 패왕은 온몸에 상처를 입고 옛 부하인 여마동에게 자신의 목을 내주며 자결을 한다.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사마천이 써 내려간 항우 본기에서 항우에 대한 연민과 증오를 같이 느낀다. 한 고조와 대척점에 서 있었고 초패왕이라는 칭호를 받은 항우를 황제와 같은 반열에 올려 본기에 수록한 것만으로도 한() 조정에 미움을 받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항우를 본기에 올린 것이 항우를 향한 존경 내지 연민으로 볼 수 있다. 자신과 같은 실패자로서의 연민일 수도 있고 항우가 보여준 용기와 기백 그리고 마지막 영웅으로서의 참모습을 존경했으리라 보인다.또 다른 일면은 항우의 잔혹성에 대한 비판을 넘어선 증오이다. 천하를 도모하며 일삼았던 살육행위들 특히 거록 전투에서 사로잡은 포로20만 명의 생매장을 붓을 통해 단죄하고 그리고 마지막 자기 성찰의 부족을 비판하고 있다. “ 하늘이 버린 것이지 자신이 전투를 못해서가 아니다. “라는 글에서도 항우의 성격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