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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사기

오패중 단연 으뜸 초장왕(楚莊王)

*본편은 춘추좌전 초장왕의 일부를 편집하여 올립니다. 중복내용이 있을 수 있으니 참고바랍니다

 

초장왕은 개인적으로 그리고 요즘말로 간지나고 인싸의 표현이 딱 들어 맞는 군주이다. 불비불명, 문정경중, 절영지연등 군주로서 가져야되는 자질이 잘 표현된 고사들이다. 춘추좌전 기록에 의하면 초장왕은 노 선공 14 (기원전 613)에 왕이 되었다.  초나라의 제22대 군주(재위: 기원전 613 ~ 기원전 591)이다. 이름은 려()이다. 초성왕의 손자이자 목왕의 아들이며, 공왕의 아버지이다. 목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나 공자 섭()이 모반을 일으켜 초장왕은 잡혀 갖히는 수모를 겪는다. 그러나 초나라 내에 공자 섭의 반대 세력에 의해 섭공자가 축출되고 장왕은 구출되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사기 초세가에는 풀려난 장왕은 수도로 돌아와 정사는 돌보지 않고 삼년 동안 놀고 먹기만 했다. 불비불명(不蜚不鳴)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오게 된다. 춘추좌전에 상세한 기록이 나와 있어서인지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다소 적은 비중으로 다스리고 있다.

 

() 목왕이 죽고 왕위를 물려 받을 때 초나라 내부의 권신대부 세력들의 힘이 강하였고 또한 외부의 세력들 제(), ()을 위시한 주변국의 패권 경쟁에서도 뒤지고 있고 이양기간에 약해진 왕권을 틈타 약소국 마저 변방을 침략해오는 상황에서 현명한 군주 장왕은 삼년 동안 있는 듯 없는 듯이 지켜보며 누가 국가 경영에 도움되고 도움되지 않는 지를 살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난신 적자를 제거하고 인재를 등용해 나라를 안정시켜 백성들이 기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불비불명(不蜚不鳴)_한번 울면 세상을 놀라게 하리라.

 

 

초장왕 즉위 삼 년이 되도록 정령을 내리지 않으며 밤낮으로 음악을 들으며 도성 안에 명령을 내리길 " 감히 간언하는 자가 있다면 용서치 않고 죽일 것이다! " 충신 오거가 들어와 간언하였다. 장왕은 좌측에 정나라 미녀를 우측에 월나라 여인을 끼고 앉아 한가로이 음악을 듣고 있었다. 오거가 말하길 "수수께끼를 올리겠습니다. 언덕 위에 새가 있는데 삼년 동안 날지도 울지도 않는데 무슨 새인지 아십니까?" 장왕이 말하길 "삼년을 날지 않았으니 날아오르면 장차 하늘을 가득 채울 것이고 ; 삼년을 울지 않았으나 운다면 장차 세상사람들이 놀랄 것이다. 물러가라.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수개월이 지나고 음탕함은 더욱 심해졌다. 대부 소종이 입궐하여 간언하였다. 왕이 말하길 "내 명령을 듣지 못하였는가?" 대답하길 " 신이 죽어 군주를 밝힌다면 신이 원하는 바입니다. 그러자 장왕은 음란한 음악들 그만 두게 하고 정사를 돌보며 벌준 사람이 수 백 명 중용시킨 자들이 수 백 명이었다. 오거와 소종으로 하여 정무를 맡기니 나라사람이 크게 기뻐하였다. 이 해에 용나라를 멸망시켰다.                                                       

 

 

莊王即位三年(장왕즉위삼년),不出號令(부출호령),日夜(일야위악),令國中曰(령국중왈):「有敢諫者死無赦(유감간자사무사)!」伍入諫(오거입간)。莊王左抱鄭姬(장왕좌포정희),右抱越女(우포월녀),坐鐘鼓之閒(좌종고지한)。伍(오거왈):「願有進隱(원유진은)。」曰():「有鳥在於阜(유조재어부),三年不蜚不鳴(삼년부비부명),是何鳥也(시하조야)?」莊王曰(장왕왈):「三年不蜚(삼년부비),蜚將沖天(비장충천);三年不鳴(삼년부명),鳴將驚人(명장경인)退矣(거퇴의),吾知之矣(오지지의)。」居數月(거수월),淫益甚(음익심)。大夫蘇從乃入諫(대부소종내입간)。王曰(왕왈):「若不聞令乎(약부문령호)?」對曰(대왈):「殺身以明君(살신이명군),臣之願也(신지원야)。」於是乃罷淫樂(어시내파음악),聽政(청정),所誅者數百人(소주자수백인),所進者數百人(소진자수백인),任伍(임오거)、蘇從以政(소종이정),國人大說(국인대설)。是歲滅庸(시세멸용)。六年(륙년),伐宋(벌송),獲五百乘(획오백승)

 

초장왕의 정권초기 왕권이 안정 되기 전 시련을 겪게 되는데 그 첫해가 공자 섭의 반란으로 왕권 탈취와 대기근으로 인한 기아와 융족을 등에 업은 용나라의 침입을 들 수 있다. 그 내용이 좌전 문공 14년과 16년에 기록이 나온다. 초장왕은 즉위 초 3년 환란 극복을 기반으로 하여 왕권을 안정화시켜 가며 춘추 오패의 세번째 패자로 등장을 하며 이후 전국시대까지 초나라가 강대국으로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사기와 좌전의 기록에서 초 장왕의 리더쉽을 본다. 춘추시대 초나라와 같은 제후국은 강력한 왕권이 통치하던 시대도 있었지만 대부의 세력이 강한 시기가 더 오래 존속된 것이 사실이다. 노나라의 삼환세력(, , 숙손) 晉 나라의 (,,) 제나라의 (전성) 등이 있다. 이들 대부의 세력이 막강하여 왕권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고 실제 강씨 성의 제나라는 전성자에게 나라가 넘어가고 대제국 晉나라는 조, 위 한, 대부에 의해 나라가 쪼개어지며 전국시대에 들어 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춘추시대 어린 나이에 왕이 되고 공자 섭의 난과 대부 약오씨 세력의 견제, 대기근으로 국가의 재난과 융(오랑캐)와 용국의 침입등을 당한 것이다. 이에 초 장왕은 3년을 준비하였을 것이고 3년 준비 후 힘차게 날아오른 대붕이 된 것이다. 국가의 인적 쇄신을 통해 난신적자를 몰아내고 재능 있는 신하를 중용하여 국가의 대기근을 이겨내고 융족을 토벌한 것이다. 이에 강화된 왕권을 기반으로 노 선공 4(기원전 605) 최대의 정적이었던 약오씨 세력을 꺽어 버린 것이다. 이후 국가 안으로 정치를 안정시키고 근심이 사라진 장왕은 영토확대를 이루며 중원의 패권을 쟁취하였다. 이에 초나라는 제 환공 진문공에 뒤를 이어 세번째 패자가 된 것이다.

 

역사적 사실 관점에서 본다면 춘추좌전에 기록된 초장왕의 행적으로 보아 과연 불비불명의 시절이 있을 수 있었겠느냐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어린 나이에 왕이 되고 그 해 공자 섭의 반란으로 왕위를 잠깐이나마 잃어 버렸고 왕의 권위를 수습해야 될 기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즉위 3년 대기근으로 인해 민심이 이반되고 또한 융족을 등에 업은 庸나라의 침입 등으로 정신 없을 상황에 음주가무와 여색에 빠져있는 것을 용인할 백성과 대부들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춘추좌전 노문공 14

 

楚莊王立,子孔,潘崇,將襲群舒,使公子燮與子儀守,而伐舒蓼,二子作亂,城郢,而使賊殺子孔,不克而還,八月,二子以楚子出,將如商密,廬戢黎及叔誘之,遂殺克,及公子燮   

 

초장왕이 즉위하고 자공 반숭이 서의 여러 지방을 공격할 때 공자 섭과 자의로 하여 수비를 맡게하고 서료를 정벌하였다. 두 사람이 난을 일으켜 영땅에 성을 쌓고 적으로 하여 자공을 죽이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돌아왔다 8월 두 사람은 초장왕을 데리고 탈출하여 상밀로 가려 했지만 노대부 집려와 숙균이 투극(자의)과 공자 섭을 유인하여 죽였다.       

 

 

노문공 16

 

楚大饑(초대기),戎伐其西南(융벌기서남),至于阜山(지우부산),師于大林(사우대림),又伐其東南(우벌기동남),至于陽丘(지우양구),以侵訾枝(이침자지),庸人帥群蠻以叛楚(용인수군만이반초)人率百濮聚於選(균인솔백복취어선),將伐楚(장벌초),於是申息之北門不(어시신식지북문부계),楚人謀徙於阪高(초인모사어판고)賈曰(위가왈),不可(부가),我能往(아능왕),寇亦能往(구역능왕),不如伐庸(부여벌용),夫與百濮(부균여백복),謂我饑不能師(위아기부능사),故伐我也(고벌아야),若我出師(약아출사),必懼而歸(필구이귀),百濮離居(백복리거),將各走其邑(장각주기읍),誰暇謀人(수가모인),乃出師(내출사),旬有五日(순유오일),百濮乃罷(백복내파)

自廬以往,振廩同食,次于句澨,使廬戢黎侵庸,及庸方城,庸人逐之,囚子揚窗,三宿而逸,曰,庸師眾,群蠻聚焉,不如復大師,且起王卒,合而後進,師叔曰,不可,姑又與之遇,以驕之,彼驕我怒,而後可克,先君冒所以服陘隰也,又與之遇,七遇皆北,唯裨,,魚,人實逐之,庸人曰,楚不足與戰矣,遂不設備,楚子乘馹(초자승일),會師于臨品(회사우림품),分二隊(분위이대),子越自石溪(자월자석계),子貝自仞(자패자인),以伐庸(이벌용),秦人巴人從楚師(진인파인종초사),群蠻從楚子盟(군만종초자맹),遂滅庸(수멸용)

 

 

 

초나라에 대기근이 들어 융이 초의 서남쪽을 공격하여 부산까지 이르고 대림에 주둔했다. 다시 그 동남쪽을 공격하여 양구까지 이르고 자지를 침략했다. 용나라가 여러 만족을 이끌고 초나라를 배신하고 균나라는 백복을 선에 집결하여 장차 초나라를 치려했다 이때 신, 식은 북문을 굳게 닫고 지켰다. 초나라사람이 판고로 천도하려 하자 위가가 말하길 " 안됩니다. 우리가 갈수 있다면 적들도 올 수 있으니 용나라를 치느니만 못합니다. 균과 백복은 우리나라가 기근이 들어 군사를 동원할 수 없다 이르고 있어서 우리를 공격한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출병시키면 그들은 두려워하여 돌아갈 것입니다. 백복은 흩어져 거주하므로 각자의 거주지로 도망갈 것이니 누가 서로 도모해줄 겨를이 있겠습니까? 이내 군사를 동원하고 보름이 지나자 백복의 무리는 곧 흩어져 귀환했다. --- 중략 ---

초장왕이 역참마를 타고 임품에서 주둔한 군대와 합류하여 군사를 둘로 나누어 자월은 석계에서 자패는 인에세 용나라를 무찔렀다. 진인나라와 파나라의 군사들이 초나라 군을 따르고 만족 무리들이 초나라와 동맹을 맺어 결국 용나라를 멸망시켰다.  

 

 

문정경중(問鼎輕重)_천자를 꿈꾸다

 

문정경중

 

구정(九鼎)은 중국 하나라의 우임금이 구주(九州)의 장관들이 동을 거두어 주조한 큰 솥을 말하며 두 개의 손잡이와 3개의 발이 있는 거대한 솥이다. , , 주시대에 천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기물로 궁중에 보관하였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천하 권력을 상징하는 보물이기도 하다. 초장왕이 국가 내부의 반란과 대기근을 슬기롭게 해쳐 나가고 육혼의 융족을 정벌하며 주나라에 이르러 천하 패권의 야심을 드러내며 주나라 대신 왕손만에게 정의 무게를 물은 것이다. 춘추 패권의 야욕을 넘어 천자의 자리를 넘보는 물음으로 다소 오만해 보이는 이 물음을 왕 손만은 슬기롭게 답을 해 위기를 모면하고 있음을 본다. 초장왕 또한 구정을 차지하려 하지만 마땅한 명분이 없어 한 걸음 물러나 패자로서의 권위를 인정받고 물러난다.

 

 

八年(팔년),伐陸渾戎(벌륙혼융),遂至洛(수지락),觀兵於周郊(관병어주교)。周定王使王孫滿勞楚王(주정왕사왕손만로초왕)。楚王問鼎小大輕重(초왕문정소대경중),對曰(대왈):「在德不在鼎(재덕부재정)。」莊王曰(장왕왈):「子無阻九鼎(자무조구정)!楚國折鉤之喙(초국절구지훼),足以九鼎(족이위구정)。」王孫滿曰(왕손만왈):「嗚呼(오호)!君王其忘之乎(군왕기망지호)?昔虞夏之盛(석우하지성),遠方皆至(원방개지),貢金九牧(공김구목),鑄鼎象物(주정상물),百物而之備(백물이위지비),使民知神姦(사민지신간)。桀有亂德(걸유란덕),鼎遷於殷(정천어은),載祀六百(재사륙백)。殷紂暴虐(은주폭학),鼎遷於周(정천어주)。德之休明(덕지휴명),雖小必重(수소필중);其姦回昏亂(기간회혼란),雖大必輕(수대필경)。昔成王定鼎于郟鄏(석성왕정정우겹욕),卜世三十(복세삼십),卜年七百(복년칠백),天所命也(천소명야)。周德雖衰(주덕수쇠),天命未改(천명미개)。鼎之輕重(정지경중),未可問也(미가문야)。」楚王乃歸(초왕내귀)

 

장왕 8(기원전 606)에 육혼(陸渾)의 융()을 정벌하고, 낙수(洛水)에 이르러 주()나라의 교외에서 군대를 사열하였다. 주나라 정왕(定王)은 왕손만(王孫滿)을 보내 초왕을 위로했다. 초왕이 구정(九鼎)의 크기와 무게를 묻자 왕손만이 대답했다. “왕자(王者)가 되는 것은 덕에 달린 것이지 정()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장왕이 말했다. “너희들은 구정을 믿지 마라! 초나라는 창끝만 부러뜨려도 충분히 구정을 만들 수 있다.”

 

 

초장왕이 육혼의 융족을 정벌하고 결국 낙수까지 이르고 주나라 국경에서 열병식을 거행하니 주정왕이 왕손만으로 하여 초왕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초장왕이 구정의 크기와 경중을 물으니 왕손만이 답하길 "정의 무게는 군주의 덕에 있지 정 자체의 무게에 있지 않습니다. 옛날 하나라가 덕을 지녔을 당시 먼 나라에서 기물에 그림을 그려 바치고 구주의 장관들은 금을 바쳤습니다. 구정을 주조할 때 사물을 세겨 만물이 정에 구비되어 사람들로하여 신령한 것과 간사한 것을 구별을 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백성이 강과 저수지 산과 밀림에 들어가도 사악한 정령들과 마주치지 않았고, 피할 수 있었습니다, 상하가 서로 협력하여 하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하 걸왕이 덕이 어지러워지자 구정은 상나라로 옮겨지고 나라의 제사는 600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상나라 주왕이 정치가 포학해지자 구정은 주나라로 옮겨졌습니다. 군주의 덕이 크고 아름다우면 비록 작으나 무거워 옮길 수 없고 군주의 덕이 간악하고 혼란스러우면 비록 크나 가벼워져 옮길 수 있습니다. 하늘의 밝은 덕을 가진이에게 복이 내리면 정은 자리잡을 곳이 있게 되고 성왕께서 정을 겹욕에 안치하실 때 30 700년을 기원하시자 천명을 내려 주었습니다. 주나라의 덕이 비록 쇠잔해졌지만 천명은 아직 고칠 기미가 없습니다. 구정의 경중을 물을 수 없습니다.

 

 

말의 장례식

 

초장왕의 군주로서 출중한 자질중 하나가 신하들의 충간을 잘 들어준다는 것이다. 3년 동안 놀고놀고 잇을 때 오거와 소종의 충간을 들어 왕의 권위를 세워 대부들에게 있던 권력을 찾아왔음을 보았다. 그리고 초장왕 13(기원전601) 장왕은 서()나라를 멸망시킨다. 16년에는 진()의 하징서가 군주를 죽인 사건으로 정벌에 나섰다. 하징서가 죽고 진()나라도 멸망하자 장왕은 진나라를 초나라의 현으로 편입시킨다. 그러나 초나라 대신 신숙시의 충간에 진나라를 다시 복원시켜준다.신숙시가 말하길 이웃사람의 소가 내밭에 함부러 들어왔다하여 그 소까지 빼앗는다면 지나친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왕께서 진나라의 내란을 진압한 것은 도의에 맞지만 그일을 빌미로 진나라를 멸하고 현으로 삼은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초장왕의 애마가 죽자 말의 성대한 장례를 치르고자 한 장왕은 말의 관을 짜서 신하의 예로 안장하겠다하였다. 이에 신하들이 반대하자 초장왕은 누가 되었던 이 일로 간언하는 자가 있다면 죽음으로 다스릴 것이다.” 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농을 잘하는 우맹이라는 악인이 우회적으로 장왕의 행동을 비꼬아 간언을 한다.  우맹이 말 장례이야기를 듣고 궁궐로 달려와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자, 놀란 장왕이 우맹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우맹이 답하길 우리 초나라는 강대국인데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대왕께서  이렇듯 사랑하는 말인데 신하의 예로 아장한다는 것으로 끝 낼 수 있겠습니까? 군주의 예로 안장하심이 옳은 줄 아옵니다.” 장왕이 말하길 오그래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라고 물었다. 그러자 우맹은 관은 아름다운 옥으로 가래나무로 곽을 단풍나무로 관을 짜서 만들고 각국 제후들에게 조문사절을 보내라 명하고 만 호정도의 읍에서는 대대로 제사를 내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리하면 대왕이 말을 얼마나 아끼고 백성을  얼마나 비천하게 여기는지 주변 제후국이 알게 될 것이라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장왕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내린 명령을 거두어 들인 일화가 있다.    

 

장왕과 우맹

 

골계열전 6

優孟(우맹),故楚之樂人也(고초지악인야)。長八尺(장팔척),多辯(다변),常以談笑諷諫(상이담소풍간)。楚莊王之時(초장왕지시),有所愛馬(유소애마),衣以文繡(의이문수),置之華屋之下(치지화옥지하),席以露床(석이로상),啗以棗脯(담이조포)。馬病肥死(마병비사),使群臣喪之(사군신상지),欲以棺槨大夫禮葬之(욕이관곽대부례장지)。左右爭之(좌우쟁지),以不可(이위부가)。王下令曰(왕하령왈):「有敢以馬諫者(유감이마간자),罪至死(죄지사)。」優孟聞之(우맹문지),入殿門(입전문)。仰天大哭(앙천대곡)。王驚而問其故(왕경이문기고)。優孟曰(우맹왈):「馬者王之所愛也(마자왕지소애야),以楚國堂堂之大(이초국당당지대),何求不得(하구부득),而以大夫禮葬之(이이대부례장지),薄(),請以人君禮葬之(청이인군례장지)。」王曰(왕왈):「何如(하여)?」對曰(대왈):「臣請以彫玉(신청이조옥위관),文梓(문재위곽)楓豫章題湊(편풍예장위제주),發甲卒穿壙(발갑졸위천광),老弱負土(로약부토),齊趙陪位於前(제조배위어전),韓魏翼衛其后(한위익위기후),廟食太牢(묘식태뢰),奉以萬戶之邑(봉이만호지읍)。諸侯聞之(제후문지),皆知大王賤人而貴馬也(개지대왕천인이귀마야)。」王曰(왕왈):「寡人之過一至此乎(과인지과일지차호)之柰何(위지내하)?」優孟曰(우맹왈):「請大王六畜葬之(청위대왕륙축장지)。以壟灶為(이롱조위곽),銅歷(동력위관),齎以薑棗(재이강조),薦以木蘭(천이목란),祭以糧稻(제이량도),衣以火光(의이화광),葬之於人腹腸(장지어인복장)。」於是王乃使以馬屬太官(어시왕내사이마속태관),無令天下久聞也(무령천하구문야)

 

17(BC 597) 봄 장왕은 정나라 정벌에 나서 석 달만에 함락시키고 정나라 수도에 들어가자 정나라 군주 정백이 웃통을 벗고 양을 끌고서 장왕을 마중 나왔다. 그 자리에서 자신의 잘못을 사죄하고 나라의 존속을 청하였으나 초나라 군신들이 반대하자 초 장왕이 말하였다. “ 정나라 군주가 스스로를 낮추어 말하는 것을 보니 백성을 성실히 다스릴 것이 분명하다 어찌 한나라의 명을 쉽게 끊을 수 있겠는가? “ 그리고 정나라와 강화를 맺었다. ()나라가 정나라를 구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으나 이에 맞선 초나라는 황하강가에서 진나라 군대를 물리치며 사실상 춘추의 세 번째 패자로 올라서게 된다.

 

 

 

절영지연(絶纓之宴)_관용의 리더쉽

 

초장왕이 군주로서의 덕성을 이야기 해주는 유명한 일화가 절영지연이라는 고사 성어이다.  초장왕이 투초의 난을 평정한 뒤 공을 세운 신하를 위로하기 위해 연회를 열고 주흥이 무르익어 갈 무렵 바람이 불어 촛불이 꺼지며 누군가 초장왕의 애첩의 옷을 잡아 당기며 희롱을 한 사건이 있다.  유향의 설원에 그 일화가 나온다. 이때 초장왕의 군주로서의 관용의 리더쉽에 감화되어 초장왕이 위기에 빠진 상황을 빠져 나올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다. 즉 초 장왕의 이러한 관용의 리더쉽이 인재를 모으고, 모인 인재를 적재적소에 등용을 하여 당시 중원의 패자로 우뚝 서는 기반이 된 것이기도 하다.

 

 

설원(說苑)  복은(復恩)

 

楚莊王賜群臣酒(초장왕사군신주),日暮酒酣(일모주감),燈燭滅(등촉멸),乃有人引美人之衣者(내유인인미인지의자),美人援其冠纓(미인원절기관영),告王曰(고왕왈):「今者燭滅(금자촉멸),有引妾衣者(유인첩의자),妾援得其冠纓持之(첩원득기관영지지),趣火來上(취화래상),視纓者(시절영자)。」王曰(왕왈):「賜人酒(사인주),使醉失禮(사취실례),奈何欲顯婦人之節而辱士乎(내하욕현부인지절이욕사호)?」乃命左右曰(내명좌우왈):「今日與寡人(금일여과인음),不冠纓者不懽(부절관영자부환)。」群臣百有餘人皆去其冠纓而上火(군신백유여인개절거기관영이상화),卒盡懽而罷(졸진환이파)。居三年(거삼년),晉與楚戰(진여초전),有一臣常在前(유일신상재전),五合五奮(오합오분),首卻敵(수각적),卒得勝之(졸득승지),莊王怪而問曰(장왕괴이문왈):「寡人德薄(과인덕박),又未嘗異子(우미상이자),子何故出死不疑如是(자하고출사부의여시)?」對曰(대왈):「臣當死(신당사),往者醉失禮(왕자취실례),王隱忍不加誅也(왕은인부가주야);臣終不敢以蔭蔽之德而不顯報王也(신종부감이음폐지덕이부현보왕야),常願肝腦塗地(상원간뇌도지),用頸血湔敵久矣(용경혈전적구의),臣乃夜纓者(신내야절영자)。」遂敗晉軍(수패진군),楚得以(초득이강),此有陰德者必有陽報也(차유음덕자필유양보야)

 

초장왕 군신들에게 술을 내려 날이 저물도록 주연을 즐기고 있는데 등불과 촛불이 모두 꺼져버렸다. 이내 누군가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사람이 있어 애첩은 그자의 갓끈을 잡아 뜯고는 초장왕에게 호소했다. 대왕, 속히 촛불을 켜시고 신첩의 옷을 잡아당기는 자가 있어 신첩이 그자의 관 끈을 당겨 가지고 있습니다. 불을 가져와 관 끈이 끊어진 자를 찾아주십시오." 왕이 말하길 " 내가 저들에게 술을 내려 술에 취해 예의가 없는 것인데 내 어찌 부인의 절개를 드러내기 위해 저들을 욕보인단 말이오? “ 이내 조우에 명을 내려 오늘 과인과 더불어 술을 먹으며 관모의 끈을 끊지 않는 자는 즐겁지 않는 자로 간주 할 것이다.” 군신들 백 여명이 관모의 끈을 끊어버리고 불을 밝혀 연회를 다 즐기고 끝마쳤다. 삼 년이 지나고 晉나라와 초나라간에 전쟁을 치를 때 신하 한 명이 항상 선두에 있으며 다섯 번 싸워 다섯 번 분투를 하고 맨 앞에서 적을 물리치고 결국 승리하였다. 초장왕이 괴이하게 여기며 묻길 과인의 그대에게 잘해준 적이 없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이와 같이 죽을 각오로 나가 싸우는가? “ 대답하길 신은 죽어 마땅했습니다. 지난날 술에 취해 실수를 함에도 왕께서는 못 본척하시고 벌하지 않으셨습니다. ; 신은 감히 덮어주신 은혜 세상이 다 알게 왕의 은덕을 갚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항상 몸이 망가져 간이나 머리 골이 진흙바닥에 뒹굴고 목을 다쳐서 솟아나오는 피를 적에게 뿌리려 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신이 그 밤에 관모의 끈이 끊긴 자입니다. “ 마침내 晉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초나라는 강성해졌으며 이것이 음으로 행한 은덕은 반드시 겉으로 드러나 보은을 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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