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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사기

오월동주(吳越同舟)_그 같은 듯 다른 역사

 

 

1. 오나라와 오자서(伍子胥)

 

사마천 사기에서 세가의 첫 편명은 오태백 세가이고, 열전의 첫 편명은 백이열전이다. 공교롭게도 둘 다 장남이면서 군주의 자리를 받지 않고 동생들에게 양보하였다. 태백은 고공단보의 장남으로 막내 계력의 아들이 뛰어남을 알고 스스로 제위를 계력에게 넘겨주어 계력의 아들이 후에 주나라 시조인 주 문왕이 된다. 백이도 고죽국의 맏이로 아버지 묵태조가 막내 숙제에게 자리를 물려주려는 뜻이 있음을 알고 막내에게 양위하려 하였다. 막네 숙제도 마찬가지로 군주의 자리에 뜻이 없어 둘다 국외로 떠나자 대신들은 하는 수 없이 둘째 아들 아빙을 군주로 세우게 된다. 오태백 세가에는 연릉 공자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합려의 숙부 일대기도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싣고 있다. 계찰도 마찬가지로 군주의 자리를 탐하지 않는 덕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사마천은 역사를 통해 권력의 자리를 탐하여 혼란에 빠진 많은 나라를 기록을 통해 접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후대 그의 사기를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특히 위정자) 권력을 탐하지 않는 미덕이 국가의 부국강병의 기본이 되며 백성을 안녕의 길로 인도하는 것을 강변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오태백 세가에서 가장 많은 부분은 계찰과 합려 부차로 이어지는 오나라 왕실과 춘추시대 비운의 재상 오자서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오자서(BC ?~ 484)는 초나라 명문가 출신으로 이름은 이고 자는 자서이다. 대대로 초나라 군벌 명문 출신으로 오자서의 조부는 초영왕의 충신이자 명신으로서 춘추시대의 강대국으로서의 위상을 떨치게 만든 오거(伍擧)였으며, 아버지 오사(伍奢) 역시 조정의 고관으로서 태자 웅건의 스승 겸 보좌 역인 태부 벼슬을 맡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정략적으로 강대국인 진()에서 태자 비를 맞이하게 되고 건의 비()가 될 진의 공주 맹영(孟嬴, 백영(伯嬴)이라고도 함)이 초나라로 오자 초평왕은 그녀의 미모에 반하고 비무기의 간사한 말에 속아 며느리가 될 그녀를 가로챈다. 그대신 태자 건에게는 제나라 출신 시녀를 공주라 속이고 혼인시킨다. 평왕과 맹영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자 오사의 정적이었던 비무기는 늙은 평왕이 죽은 뒤 후환을 두려워하여 평왕을 부추겨 태자와 그의 후견인인 오사의 가문을 없애려 모략을 꾸민다. 비무기는 자신이 꾸미고 평왕이 실행에 옮긴 진 공주를 찬탈한 일을 태자가 원망함을 들어 밤낮으로 참소를 일삼는다. 이에 초 평왕은 태자의 사부인 오사를 불러 심문하고 옥에 가둔다. 그러나 오사는 그의 뜻을 굽히지 않고 충언으로 간하나 평왕은 어리석음과 비무기의 참소에 눈이 멀어 듣지 않고 오히려 사람을 보내 태자를 죽이라 명한다. 그러나 이를 미리 알아챈 태자는 송나라로 달아난다.

 

비무기의 악행과 평왕의 어리석음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오사의 두 아들이 무예가 출중하고 현명한 능력을 두려워하여 오사를 잡아두고 두 아들에게 수도인 영으로 불러들인다. 그러나 오사는 두 아들의 성격을 워낙 잘 알고 있는 터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아들 상()은 사람됨이 어질어서 부르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은 고집이 세고 모진 데다 능히 치욕을 참고 견디는 성격이라서 장차 큰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애는 오기만 하면 함께 사로잡힐 줄 알고 오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어질며 효성스러운 오상은 불려가서 죽고 현명하고 지혜로운 오원(자서)는 송나라 정나라를 거쳐 이후 오나라로 도망을 가 후일을 도모하게 된다.

 

無忌言於平王曰:「伍奢有二子,皆賢,不誅且楚憂。可以其父質而召之,不然且楚患。」王使使謂伍奢曰:「能致汝二子則生,不能則死。」伍奢曰:「尚為人仁,呼必來。員人剛戾忍,能成大事,彼見來之禽,其勢必不來。」王不聽,使人召二子曰:「來,吾生汝父;不來,今殺奢也。」伍欲往,員曰:「楚之召我兄弟,非欲以生我父也,恐有脫者後生患,故以父質,詐召二子。二子到,則父子俱死。何益父之死?往而令讎不得報耳。不如奔他國,借力以雪父之恥,俱滅,無也。」曰(오상왈):「我知往終不能全父命(아지왕종부능전부명)然恨父召我以求生而不往(연한부소아이구생이부왕),後不能雪恥(후부능설치),終天下笑耳(종위천하소이)。」謂員:「可去矣!汝能報殺父之讎,我將歸死。」尚既就執,使者捕伍胥。伍胥貫弓執矢向使者,使者不敢進,伍胥遂亡。聞太子建之在宋,往從之。奢聞子胥之亡也,曰:「楚國君臣且苦兵矣。」伍至楚,楚殺奢與

중략……

“내가 간다고 끝내 아버지의 목숨을 건질 수 없다는 것은 나도 안다. 그러나 아버지가 우리를 불러 목숨을 구하려 하는데도 가지 않고, 훗날에 원수도 갚을 수 없게 되면 결국은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따름이다.” 이어 원에게 일렀다. “너는 달아나거라! 그래서 아버지 죽인 원수를 갚아다오. 나는 이제 가서 죽겠다."

 

2. 오왕 합려와 오자서의 만남

 

초평왕은 오자서의 목에 곡식 오만석과 작위를 내걸고 그를 잡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자서가 초나라와 오나라의 경계에 위치한 소관을 지날 때, 국경 수비대에 걸려 추격을 당하였다. 그때 강가를 지나던 어부가 오자서를 도와 국경을 건너게 되자, 오자서는 그의 보검을 그에게 주며 고마움을 표시하였다.그러나 그 어부는 받지 않고 이렇게 말하였다. “초나라의 법령에는 오자서를 잡는 사람에게는 곡식 5만 섬과 집규의 작위를 내린다고 했으니 어찌 헛된 백 금의 칼이 문제이겠소!” 이후 망명길에 병에 걸리기도 하고 걸식을 하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백성들이 도와주어 결국 초나라에 이르게 된다. 이를 미루어 보면 그의 4대에 이르는 명문가 출신으로 선대들이 쌓은 덕에 감화를 받은 백성들이 그의 망명을 도와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당시 오나라의 왕의 이름은 요()였다. 요가 왕에 오른 지년 (BC 522) 오자서는 훗날 오왕 합려가 되는 공자 광()의 소개로 오왕을 만난다. 그 자리서 오자서는 유세하며 자신의 능력을 소개한다. 그러나 공자 광()이 만류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지 못한다. 그러면서 공자 광()이 군주 자리에 관심이 있음을 간파하며 물러나 초야에서 농사를 지으며 때를 기다린다.

 

久之,楚平王以其邊邑鐘離與吳邊邑卑梁氏俱蠶,兩女子爭桑相攻,乃大怒,至於兩國兵相伐。吳使公子光伐楚,拔其鐘離、居巢而歸。오자서설오왕료왈(伍子胥說吳王僚曰):「초가파야(楚可破也)。원복견공자광(願復遣公子光)。」공자광위오왕왈(公子光謂吳王曰):「피오서부형륙어초(彼伍胥父兄戮於楚),이권왕벌초자(而勸王伐楚者),욕이자보기수이(欲以自報其讎耳)。벌초미가파야(伐楚未可破也)。」伍胥知公子光有內志,欲殺王而自立,未可說以外事,乃進專諸於公子光,退而與太子建之子勝耕於野

중략….

“초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습니다. 청컨대 다시 공자 광을 보내도록 하십시오.” 공자 광이 오왕 요에게 말하였다. “오자서는 아버지와 형이 초나라에 죽임을 당해서 왕을 권유해서 초나라를 치려는 것은 자신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입니다. 초나라를 치더라도 아직 멸망시킬 수 없습니다.” 오자서는 그 말을 듣고 공자 광이 왕을 죽이고 보위에 오르고자 하는 속셈을 알아차렸으며, 지금은 외부 문제를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전제(專諸)라는 자객을 공자 광에게 천거하고 그 자신은 물러나 태자 건의 아들인 승과 함께 들판에서 농사를 지었다.

 

사실 광()의 아버지 제번은 오왕 수몽의 첫째 아들로 20대 군주였다. 수몽은 가장 어진 막내 계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으나 고사하여 첫째 제번이 왕위를 물려받았다. 재위13년 만에 죽자 둘째 여제와 여매 순으로 왕위는 승계되었다. 마지막 여매도 자리를 계찰에게 물려주려 하였으나 계찰이 고사하여 그의 아들 요()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공자 광은 여기에 불만을 품었다. 삼촌 계찰이 아니라면 마땅히 자신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왕의 자리는 사촌동생 요()에게 돌아간 것이다. 이것이 화근의 씨앗이 되어 오나라의 왕권 쟁탈의 음모가 조금씩 피어난다. 이 시기에 오자서가 공자 광()의 추천으로 오왕 요를 만난 것이다. 이 분위기를 감지한 오자서는 공자 광에게 제번을 소개하며 자신은 농사를 지으며 스스로 권력의 중심부에서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오왕 요() 13 (BC 515) 초 평왕이 죽고 이 즉위했다. 비무기의 중상모략으로 태자 건과 오사의 일가족이 죽은 것을 알고 소왕은 백성의 원성을 잠재우기 위해 비무기를 죽였다. 어찌 보면 오자서의 원한을 갚을 대상이 사라진 것이다. 그 국상 기간에 오나라는 초나라를 공격하나 초나라의 군세에 밀려 어려움에 처하자, 공자 광은 기회라 여기고 전제를 불러 요왕 암살 계획을 논의한다.공자 광은 오왕 요를 집으로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던 중 전제를 요리사로 위장시켜 생선을 진상하는 척하며 단도로 요왕의 가슴을 찔러 죽인다. 그런 뒤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르니 그가 춘추오패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합려(闔閭)이다. (BC 514) 합려는 오자서를 불러들여 외교를 담당하는 행인(行人)이란 작위를 주어 나랏일을 맡기며 초나라 대신 백주려의 아들 백비를 대부로 삼아 정치를 이끌어 간다.

 

3. 오자서의 복수_ 내눈을 파내어 동문에 걸어두라

 

오나라란 예리한 복수의 칼을 허리에 찬 오자서는 오왕 합려와 손무 등과 함께 정벌 전쟁을 해 나간다. 그 첫 번째가 초나라와의 전쟁에서 투항한 오나라 공자 개여(蓋余), 촉용(燭庸)이 점령하고 있던 서읍(舒邑)을 빼앗고 둘을 죽인다. 합려에게는 오자서뿐만 아니라 궁녀를 정예병으로 훈련시킨 손무(孫武)도 있었다. 그야말로 좌 오자서 우 손무로 호랑이 날개를 단 격이었다. 합려 4년 초나라의 육과 첨 땅을 공격하여 차지하였고 5년 월나라를 공격하여 굴복시킨다. 합려 9(BC 506) 손무의 제안에 따라 당(唐)나라 채(蔡)나라와 연합하여 초나라를 공격하며 승승장구해나간다.초나라와 5번의 큰 전투를 치르며 결국 초소왕은 수도 영 땅을 버리고 도망가고 오자서가 이끄는 군대는 영()으로 입성하게 된다.

 

아버지와 형이 살해당한 지년 만에 오자서는 드디어 고향 땅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초 평왕과 비무기는 이미 죽고 난 뒤여서 복수의 대상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불타는 증오심에 발로로 결국 평왕의 무덤에서 시신을 파내어 유해에 대고 채찍질 삼백 번을 하고 나서야 멈추게 된다. 여기서 나오는 고사성어가 굴묘편시(掘墓鞭屍)이다. 중국에 역사를 살펴 은원(恩怨) 관에 대한 유명한 말 중에 하나가 원수는 같은 하늘 아래 두고 잠을 잘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복수극의 하나이다.

 

굴묘편시 ( 掘墓鞭屍 )

 

초 소왕이 수도 영을 버리고 달아나고 초나라의 충신 신포서는 진(秦)나라에 원병을 청하여 결국 원조를 얻어 점령당했던 영을 되찾는다. 오왕 10( BC 503) 봄 월나라가 오나라의 군대의 주력이 초나라 전투에 동원되어 수도 영성에 없음을 알고 오나라를 공격한다. 합려는 군대를 둘로 나누어 월나라 토벌군을 보내어 대적한다. 한편 초나라는 진애공에 군대 원조를 요청하자 진나라 군대가 구원병을 보내니 오왕 합려는 월나라 그리고 초, 진 연합군의 공격을 막아내느라 군대를 지치게 만든다. 이러던 와중 그의 동생 부개는 오나라로 돌아와 스스로 왕이 된다. 그 소식을 들은 합려는 군대를 돌려 영성의 부개를 공격하자 부개는 초나라로 도망을 친다.

 

오왕 합려 19(BC 496) 여름 오가 월나라를 공격하던 중 합려는 발가락에 상처를 입고 그 상처가 도져서 죽어버린다. 이후 그의 아들 부차가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다. 그러나 그의 성정(性情)은 잔인하고 여색과 재물을 밝혔으며 그의 부친 합려가 춘추 오패로 올라섬에 도취해 오만불손한 행동을 한다. 그 오만한 성정의 첫 번째 잘못은 오자서의 성취에 질투를 하는 백비의 중용이었다. 오자서의 정적인 백비는 그를 시기 질투하며 그의 의견에 반대의견을 내어 부차의 지지를 이끌어낸다.

 

부차가 그의 아버지 합려의 복수전에 성공하자 월왕 구천은 대부 문종으로 하여 백비에게 뇌물을 보내 강화를 요청하며 나라와 미녀를 바치고 신하가 되겠다고 말하게 하였다. 이를 부차가 허락하려 하자 오자서가 그를 살려주면 후환이 될 것이라 간()하였으나 뇌물을 받은 태제 백비의 주장에 따라 월나라와 강화했다. 이후 제나라를 정벌하는 것을 두고도 부차와 의견 대립이 있었다. 그 이후로 오자서와 부차는 점점 저 소원해진다. 제나라와 노나라 추나라를 위협하고 돌아오고 춘추 오패의 권위를 과시하던 부차는4년 뒤 제나라를 다시 공격하려 하자 오자서가 다시 말리며 간하였다. 이때 태제 백비는 월나라로부터 지속적으로 뇌물을 받고 부차에게 월나라를 두둔하는 발언을 하였던 것이다.

 

월왕구천내이여병오천인서어회계지상(越王句踐乃以餘兵五千人棲於會稽之上),사대부종후폐유오태재비이청화(使大夫種厚幣遺吳太宰嚭以請和),구위국위신첩(求委國為臣妾)。오왕장허지(吳王將許之)。오자서간왈(伍子胥諫曰):「월왕위인능신고(越王為人能辛苦)。금왕부멸(今王不滅),후필회지(後必悔之)。」오왕부청(吳王不聽),용태재비계(用太宰嚭計),여월평(與越平)。

 

와신상담 ( 臥薪嘗膽 )

 

월왕 구천은 지난날의 패배를 곱씹으며 와신상담(臥薪嘗膽)의 나날을 보내며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오자서는 걱정하고 대비하라 하였으나 월나라의 뇌물을 받은 백비는 부차에게 오자서에 반대되는 주장을 한 것이다. 오자서는 월나라를 가슴에 있는 병이라 하였다. 이를 정벌하여 없애지 않고서 중원을 도모한다는 것은 잘못이라 말하는 것이다. 이를 춘추 오패 진목공의 예를 살펴보면 진목공도 중원을 도모하고픈 大望(대망)은 품었으나 서쪽의 융적 그리고 부족한 영토와 인구를 들어 그 야망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서쪽으로 영지를 넓히며 그다음을 기약한 기록을 볼 수 있다.

결국 바로 옆에 큰 근심거리를 두고 그 당시 강국 제나라와 전쟁을 치르려 한다. 이에 오자서는 더 강력한 어조로 불가함을 간언 하나 태재 백비는 오자서가 그의 아들을 제나라에 보낸 것을 기회삼아 그를 참소한다. 오왕 부차는 오자서에게 자결을 명하자 오자서는 그 유명한 저주의 말을 남기고 자결한다. 오자서란 충신이 사라진 오나라는 국력을 소모하고 결국은 월왕 구천에게 아들 잃고 영토를 침탈당한다.

 

吳太宰嚭既與子胥有隙,因讒曰:「子胥人剛暴,少恩,猜賊,其怨望恐深禍也。前日王欲伐齊,子胥以不可,王卒伐之而有大功。子胥恥其計謀不用,乃反怨望。而今王又復伐齊,子胥專愎彊諫,沮用事,徒幸吳之敗以自勝其計謀耳。今王自行,悉國中武力以伐齊,而子胥諫不用,因輟謝,詳病不行。王不可不備,此起禍不難。且使人微伺之,其使於齊也,乃屬其子於齊之鮑氏。夫人臣,內不得意,外倚諸侯,自以先王之謀臣,今不見用,常鞅鞅怨望。願王早圖之。」吳王曰:「微子之言,吾亦疑之。」乃使使賜伍子胥屬鏤之劍,曰:「子以此死。」伍子胥仰天嘆曰:「嗟乎(차호)!讒臣嚭為亂矣(참신비위란의),王乃反誅我(왕내반주아)。我令若父霸(아령약부패)。自若未立時(자약미립시),諸公子爭立(제공자쟁립),我以死爭之於先王(아이사쟁지어선왕),幾不得立(기부득립)。若得立(약기득립),欲分吳國予我(욕분오국여아),我顧不敢望也(아고부감망야)。然今若聽諛臣言以殺長者(연금약청유신언이살장자)。」乃告其舍人曰(내고기사인왈):「必樹吾墓上以梓(필수오묘상이재),令可以器(령가이위기);而抉吾眼縣吳東門之上(이결오안현오동문지상),以觀越寇之入滅吳也(이관월구지입멸오야)。」乃自剄死。吳王聞之大怒,乃取子胥尸盛以鴟夷革,浮之江中。吳人憐之,立祠於江上,因命曰胥山

 

오왕 부차가 말했다. “그대가 말하지 않았어도 역시 의심 하였소.” 그리고는 오자서에게 사람을 보내 촉루(屬鏤)라는 칼을 내리고 말하였다. “그대는 칼로 자결하도록 하라.” 오자서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하였다. “슬프다! 참신인 백비가 나라를 어지럽히려 하는데 왕은 도리어 충신인 나를 죽이려 하는구나. 나는 그대의 아버지를 패자로 만들었다. 그대가 즉위하기 전에 여러 왕자들이 보위를 다툴 죽음을 무릅쓰고 선왕에게 보위토록 하였으며 그렇지 않았다면 그대는 태자가 없었다. 그대가 즉위 오나라를 내게 나누어 주려했어도 나는 이를 바라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아첨하는 간신의 말만 듣고 연장자를 죽이려 하는가?” 그리고 그의 측근들에게 말하였다. “반드시 무덤 위에 가래나무를 심어서 오왕의 관을 짜도록 하라. 그리고 눈알을 도려내어 오나라 도성의 동문 위에 걸어 두어라. 월나라 군사들이 쳐들어와서 오나라를 멸하는 것을 똑똑히 보려 한다.” 그리고 자서는 스스로 목을 베어 죽었다. 오왕 부차는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오자서의 시체를 끌어내다가 말가죽으로 만든 자루에 넣어 강물에 던져버렸다. 오나라 사람들은 그를 불쌍히 여겨 강기슭에 사당을 세우고 이름을 서산(胥山)이라 불렀다.

 

 

4. 월왕 句踐(구천)과 범려_고난은 같이 할 수 있지만….

 

상인이며 성인으로 추앙받는 범려

 

월나라는 무여가 주왕실로부터 책봉받은 제후국으로 현재 저장성 북부에서 강소성에 위치한 나라였다. 몸에 문신을 하고 단발하여 한족과는 다른 동남의 夷()족이라 천시하였다6세기 초 句踐(구천)의 아버지 윤상 때 초나라의 도움으로 강성해지고 오나라와 길고 긴 전쟁을 이어간다. 그러던 중 오왕 부차에게 회계산에서 대패하며 신하로 嘗膽(상담)하던 중 오왕 부차가 북진하던 틈을 타 오나라를 공격해 부차의 아들을 죽이고 영토를 차지한다. 이 소식을 접한 오왕 부차는 회군하여 월과 전쟁을 벌이나 결국 패배하여 망해간다. 월나라는 그 후 쇠퇴하며 BC 334년 초나라에 멸망당한다.

 

월왕 구천에게는 중국 역사상 위대한 재상이자 상인이었던 범려 대부 문종 그리고 동봉이 있었다. 그들은 구천을 도와 오나라를 滅()하고 구천이 오패 중의 하나로 설 수 있도록 도와준다. 구천이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인 오판을 내릴 때마다 범려는 구천이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옆에서 보좌한다. 문종은 그의 지모로서 오나라의 정치적 상황을 이용하여 태재 백비의 탐욕과 오만함을 파고들어 오왕 부차가 월나라에 경계를 풀도록 한다. 이들 둘의 정치 외교술과 공자의 제자인 자공의 의견을 들어 오나라를 멸망시킨 것이다. 오나라를 정복한 월 구천은 오나라가 빼앗았던 여러 제후들의 땅을 회복시켜주며 패주의 자리로 올라가는 계기가 된다.또한 지금의 양쯔강 유역의 오나라와 월나라를 합친 광활하고 비옥한 국토를 등에 업고 정벌 전쟁을 이어간다. () () () ()의 중원 권력 공백을 틈타 잠시 동안 춘추오패의 자리에 올라서게 되는 것이다.

 

구천이 오나라 부차에게 복수를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기다릴 줄 아는 지혜를 가졌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대부 문종과 범려의 지혜 속에서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문종은 회계산에서 곤경에 빠졌을 때 구천을  과거 역사 속 탕 임금과 주문왕, 진문공 중이의 예를 들며 때를 기다리면 패왕이 될 수 있다 설득하였다. 그리고 그 절박함속에 구천은 스스로를 성찰하며 절약하고 유능한 인재를 모으고 가난한 이를 구제하며 빈객을 후하게 대접해 우군을 만들어 나갔다.

 

이후 오만해진 오 부차는 오자서를 자결케 하고 백비에게 모든 정권을 맡기며 3년이 지나자 구천은 오나라를 치고자 범려의 의견을 들었다. 이때 범려는 때가 아니라 말리고 구천은 이를 수용하였다. 이듬해 봄 오왕이 북쪽 황지에서 제후들과 회합을 할 때 오나라의 정예부대가 따라나섰다.이를 틈타 범려와 월왕 구천은 오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태자를 죽인다. 당시 강국 제나라와 진나라와 전쟁에서 국력을 낭비한 오나라는 월나라의 침공으로 결국 패망의 길을 걷는다.

 

구천이 오나라를 평정한 후 군대를 거느리고 晉()과 회맹 하고 주나라에 조공을 바치니 주 원왕이 사신을 보내 제사 지낸 고기를 내리고 伯()으로 임명하였다. 이로써 구천이 춘추오패에 들어간 것이다.

 

범려는 월왕 구천이 패주가 되자 그의 곁을 떠난다. 아마도 범려는 功成身退(공성신퇴) 공을 이루면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 세상의 이치임을 알고 있었는 듯하다. 아니면 월왕구천의 인간됨을 간파하였을 것이라 보인다. 고생은 같이 할 수 있으나 그 영광은 같이 누릴 수 없음을 알고 미련 없이 구천의 곁을 떠나간다. 그를 떠나며 대부 문종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며 그에게 경고를 한다.

 

范蠡遂去(범려수거),自齊遺大夫種書曰(자제유대부종서왈):「蜚鳥盡(비조진),良弓藏(량궁장);狡死(교토사),走狗烹(주구팽)。越王為人長頸鳥喙(월왕위인장경조훼),可與共患難(가여공환난),不可與共樂(부가여공악)。子何不去(자하부거)?」種見書(종견서),稱病不朝(칭병부조)。人或讒種且作亂(인혹참종차작란),越王乃賜種劍曰(월왕내사종검왈):「子教寡人伐吳七術(자교과인벌오칠술),寡人用其三而敗吳(과인용기삼이패오),其四在子(기사재자),子為我從先王試之(자위아종선왕시지)。」種遂自殺(종수자살)。

 

범려가 월왕을 떠나 제나라에서 문종에게 편지를 보내 말했다. “새 사냥이 끝나면 좋은 활은 창고에 묻히게 되고,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는 삶겨 죽게 됩니다. 월왕은 목은 길고 입은 새의 부리 같아 근심과 어려움은 함께 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오. 그대는 어째서 떠나지 않는가?” 문종이 편지를 보고는 병을 핑계로 조정에 들어가지 않았다. 누군가 문종이 난을 일으키려 한다고 중상하자 월왕 구천은 문종에게 검을 내리며 말했다. “그대가 과인에게 오나라를 정벌할 일곱 개의 방법을 가르쳐 주었으나 과인은 그중 세 가지만 사용하여 오나라를 물리쳤으며, 나머지 넷은 그대에게 있으니 그대는 나를 위해 선왕을 따라가서 그것을 시험하도록 하라.” 문종은 마침내 자살했다.

 

오월동주, 토사구팽, 등으로 유명한 오나라와 월나라와의 관계는 이로써 막을 내린다. 둘 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간 나라이지만 사마천 史記(사기) 속 초한쟁패 다음으로 가장 드라마틱한 요소가 있는 재미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수많은 영화로 드라마로 제작되고 있다. 그 오월 역사 속 가장 빼어난 인물은 꼽으라면 단연 범려와 손자병법을 쓴 손무이다. 범려는 특별한 저술을 남기진 않았지만 재산을 세 번 모으고 민중들에게 세 번씩이나 나누어준( 三聚三散) 중국 역사 속 가장 현명한 재상이자 상인이자 지금에 이르러서도 가장 추앙받는 인물 중 하나이다. 위정자이자 사업가(상인)로서 실천한 노블레스 오블리쥬는 오는 날에도 한 줄기 빛이 되어 어두운 현시대 사람들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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