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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사기

사기 세가_춘추 오패 제환공

 

1.춘추 오패(春秋五覇)의 등장

 

 

사마천은 사기에서 춘추 오패를 제환공 송양공 진(晉)문공 진(秦)목공 초장왕으로 분류하고 있다. 순자는 송양공 진문공을 대신하여 오 합려 월왕 구천을 넣기도 한다. 역사적 기록에 나타난 국가의 크기 제후의 치적 영속성 그리고 회맹 유무를 미루어 패자(覇者)를 뽑는다면 제환공 진문공 진목공 초장왕등 4패()밖에 없다. 그 밖의 송양공이나 오나라 부차 월왕 구천은 잠시 강성했을 뿐 국가도 영속적이지 못하고 춘추시대  패망의 길로 들어선다. 그러나 4개 패권(覇權)국은 춘추를 넘어 전국까지 융성하였다. 단 진(晉)나라는 대부들이 나라를 세 등분하여 전국 칠웅으로 명맥을 이어갔다.

 

그럼 여기서 춘추 오패가 나타나게 된 배경을 역사를 더듬어 살펴본다.제후국이 패자로 등장하기 시작한 시점은 주(周) 나라의 왕권이 약화되면서부터이다.주 려왕((周 厲王, ? ~ 기원전 828년 주나라의 제10대 왕)성정은 탐욕스럽고 잔인하였다. 간신이고 탐욕스러웠던 영(榮)나라 군주 이공(夷公)을 가까이하고 경사(卿士)로 임명하여 국정을 농단한다. 이에 충신 예랑부가 간언하여 말리지만 듣지 않는다. 그리고 나라 사람들이 주려 왕의 포악하고 오만함을 비방하자 주() 정공과 소목공이 간언을 하였으나 비방하러 오는 사람들을 죽여버려 국인(國人)들은 감히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닫았던 것이다. 이때부터 제후들은 조회하러 오지 않았고 제후국들은 서로 힘을 모아 반란을 일으켜 여왕을 습격하고 여왕은 체()로 도망간 것이다. 이때부터 주(周) 나라는 쇠락해갔다.

 

그 뒤를 이은 11대 선(宣)왕으로 여러 제후들과 주()의 중흥을 꾀하였으나 실패하고 하필 다음이 주나라 최악의 암군(暗君)인 주 유왕(幽王: 12대 왕대왕 재위 기원전 781 ~ 기원전 771)으로 여흥과 주색만 탐닉하다 주 왕실을 망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그는 유명한 웃지 않는 미녀 포사(褒似)를 총애하여 왕후였던 신후(申后)와 태자 의구(宜臼:훗날 東周의 평왕)를 폐위시키고 포사를 왕후에 그녀의 아들 백복(伯服)을 태자로 앉힌다. 그 일로 신나라의 군주 신후(申候)와 견융과 증(), 서이(西夷)의 연합군에 의해 공격받고 사살된다. 사기에는 주나라의 재물을 모두 약탈하여 떠났다고 되어 있다. 기록에는 남아있지 않으나 이때 주나라 궁궐에 남아 있던 기물 보화와 각종 중요 기록들이 소실 또는 멸실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곡자는 노나라의 역사를 춘추로 작성하였다. 천자의 나라인 주()가 아니라 노(魯) 나라의 역사를 편술한 것은 동쪽 주나라의 역사적 기록이 부족했으리라 짐작해본다.

 

평왕이 즉위한 후 동쪽의 낙읍(洛邑)으로 천도하고 견융의 침략은 피했으나 주 왕실은 쇠약해지고 천자국으로서의 권위는 쇠미해진 것이다. 이와 반대로 강한 나라의 제후들은 약한 나라를 병합하니 이때 등장한 나라가 제 초 진() ()이 강대해지기 시작했고 중원은 방백(方伯) 즉 패자(覇者)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2. 제 환공(桓公)_ 춘추의 첫 패자(覇者)

 

주왕실이 권위를 잃어가는 동주의 시대가 도래하여 천자의 어떠한 명으로도 강성해진 제후를 제압할 수 없었다. 이에 주 왕실은 제국간(諸國)혹은 제후간(諸侯)에 맺어지는 회합이나 맹약을 회맹이라 하며, 회맹의 맹주(盟主)가 된 자를 패자라고 하고 인정해 주길 시작한다. 이때 처음 패자(覇者)가 된 제후가 제 환공(齊 桓公 기원전 685 - 643, 재위)이다. 그리고 그의 패자를 만들어 준 이는 바로 관중(管仲)과 포숙아이다. 사마천은 세가 편에 제환공을 열전 편에 관중을 실으며 포숙아는 열전에 실지 않는다. 역사에 만약이 없다지만 만약 포숙아가 없었다면 관중도 제환공도 역사에 기록되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관중은 포숙아 덕에 제환공으로부터 죽음을 면하고 제나라 재상으로 천수를 누렸으며, 제 환공은 포숙아의 현명함으로 관중이라는 걸출한 재상을 두어 그 당시 중원의 패주로서 자리를 차지하였다.

 

제환공 관중 포숙아

 

제환공이 패주의 자리를 차지한 배경에는 그의 탁월한 사람을 보는 안목과 적인 관중의 실수를 용서하는 관용이 자리하고 있다. 관중이 제 환공(소백)의 형 공자 규의 심복이 되어 소백을 암살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리고 포숙아와 소백은 먼저 제나라에 들어가 군주의 자리에 오르고 나서 제 환공이 되어 관중을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포숙아의 설득에 의해 관중을 재상으로 임명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관중은 개혁을 추진해 농업과 상업을 장려하여 국력, 군사력, 문화 향상에 성공하게 된다. 당시 주왕실은 쇠퇴하고 제후들의 통제가 되지 않자. 각국의 제후들은 각 나라의 분쟁이나 문제를 제 환공에게 청탁하게 된다.

 

관중의 역할은 제나라의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상업의 장려를 통한 재화의 유통으로 모인 부를 국고로 쌓아놓고 부국강병의 국가로 나간다. 이런 그가 지은 관자(管子)에는 아래와 같은 말이 나온다. 관자의 국정운영 철학과 경제관념을 잘 보여주는 글이다. 즉 백성의 부유함을 부국강병의 제일 조건으로 보는 것이고, 위민(爲民)사상이 깊게 베인 글이라 할 수 있다.

 

백성은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풍족하면 영광과 치욕을 알게 된다. “윗사람이 법도를 준수하면 육친끼리 도타워지게 되고 사유(四維: (), (), (), ())가 베풀어지지 아니하면 나라가 곧 멸망하고 만다. 명령을 내림이 물의 근원에서 흘러내리듯 하여야 민심에 순응할 수 있다.”

 

管仲既任政相齊(관중기임정상제),以區區之齊在海濱(이구구지제재해빈),通貨積財(통화적재),富國彊兵(부국강병),與俗同好惡(여속동호악)。故其稱曰(고기칭왈):「倉廩實而知禮節(창름실이지례절),衣食足而知榮辱(의식족이지영욕),上服度則六親固(상복도즉육친고)。四維不張(사유부장),國乃滅亡(국내멸망) 下令如流水之原(하령여류수지원),令順民心(영순민심)。」故論卑而易行(고론비이이행)。俗之所欲(속지소욕),因而予之(인이여지);俗之所否(속지소부),因而去之(인이거지)。

 

이런 국가의 부를 바탕으로 제환공과 관중은 중국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길을 차츰차츰 밟아나간다. 그 처음 사건이 노나라에 땅을 돌려준 일이나 제환공 5 (기원전 681)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하여 노라라가 패하자 수(遂)읍을 바치며 화친을 청하자 환공이 따랐다. 조약을 맺으려 두 군주가 가(柯)땅에서 만났을 때 노나라 장군 조 말이 환공에게 비수를 들이대며 빼앗긴 땅을 돌려달라 협박하였다. 목숨에 위험을 느낀 환공이 수락하자 조 말은 비수를 버리고 신하의 예를 취하며 절을 하였다. 화가 난 환공이 땅을 돌려주지 않고 조 말을 죽이려 하자 관중이 말리며 제후와 백성의 믿음을 저버리지 말라고 주청하여 결국은 땅을 돌려주게 된다. 그 소식을 들은 제후들은 제 환공을 더 신뢰하게 되고 그때부터 맹주의 자리를 차자한 것이다.

 

그 두 번째가 약소국이었던 연나라를 예우한 일이다. 연나라에 산융(북방오랑캐)이 침략하자 그들을 구원하려 환공이 몸소 군대를 이끌고 산융을 물리치게 된다.전쟁이 끝나고 연 장공이 제환공을 배웅하려다 그만 국경을 넘어 제나라 땅으로 들어오게 된다.이때 예법이 제후간의 전송에 국경을 넘지 않는 것이 법이였으나 연 장공이 이 법을 어기게 된 것이다. 이에 제 환공은 연 장공이 넘은 땅을 연으로 넘겨주어 무례를 범하지 않게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이 소식도 제후에 귀에 들어가며 많은 제후들이 환공을 더 추종하게 되었다.

 

세 번째는 채나라 정벌을 빌미 삼아 초나라의 중원에 대한 야심을 꺾은 것이다. 제환공 30(기원전 656) 부인인 채희가 물놀이 도중 환공을 놀라게 하여 채희를 친정 국인 채 나라로 돌려보냈다.이때 채 나라 군주는 그 일을 치욕으로 여기고 채희를 재가시켜버리니, 환공이 격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채()를 공격한 사건이 있었다. 결국 채나라는 전쟁에 지고 항복하였다. 이때 관중은 주나라에게 공물을 바치지 않고 제후가 감히 왕이라 참칭하며, 호시 탐탐 중원을 노리고 있던 초나라 대하여 공격할 여 패권국의 위엄을 세울 것을 건의했다. 결국 초나라와 수차례 정쟁을 벌이고 맹약을 맺고 군사를 돌리었다.

 

제환공과 관중은 춘추 초기 제후국 간의 힘의 공백상태를 메꾸며 패권국으로 위상을 공고히 하였다. 재위기간동안 9번 회맹을 하여 패권 정치를 주(周) 왕조를 대신한 것이다.

 

 

3. 제 환공(桓公)_어리석은 패자(覇者)의 마지막

 

절대권력을 손에 쥔 제환공은 오만하고 경솔해져 간다.제환공 35(기원전 651) 구규라는 곳에서 회맹을 하고 있을 때 주 양공이 재공(宰孔) 을 파견하여 환공에게 문왕과 무왕의 제사에 올린 고기 화살 수레 등을 하사하였다. 그러면서 천자에 바치는 예법 중 엎드려 절을 하며 받는 예를 행하지  않아도 된다고 허락했다. 그 말에 따라 환공이 절하지 않고 받으려 하자 관중이 말리며 예를 표하라 주청을 하였다. 마지못해 예를 올리고 하사품을 받았다.  다음 회맹은 더욱 더 거만한 행동으로 인해 제후들은 이전처럼 순종하지 않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천자만 할 수 있는 봉선 의식을 거행하려 한다. 마찬가지로 관중이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만류를 하자 환공은 마지못해 봉선(封禪)을 포기하였던 것이다. 이 모두가 제환공이 패자로서의 권력이 완성되고 난 다음에 일어난 일들이다. 

 

정권 초기 인재를 알아보는 탁월한 안목으로 관중 포숙아 습붕 고혜와 같은 신하를 등용하여 춘추의 첫 패자의 자리에 올라서 천자보다 더한 권력과 위엄을 만 천하에 보였으나, 패자의 자리에 올라서며 그 오만함과 어리석음이 드러나며 현신(賢臣)과 능사(能士) 구별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게 된다.그리하여 군주에게 잘 보이려고 자기 자식을 삶아 환공에게 바친 역아, 스스로 거세하여 사랑을 받으려 한 수조, 군주를 섬기면서 15년 동안이나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 그의 친부모를 찾아보지 않았던 개방 등을 가까이 두며 총애하였던 것이다. 이 세명의 인물들은 관중의 통제하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있는 간신과 참신들이 었다.  관중이 병석에 눕자 제환공은 다음 대의 재상을 할 만한 인물을 관중에게 물어보며 관중에게 역아, 수초, 개방 등을 재상으로 임명하는 게 어떠냐고 묻는다. 이에 관중은 깜짝 놀라며 자신의 후임으로 포숙과 습붕을 추천하고 이 간신배들을 제거하라는 유언을 남긴다.

 

포숙은 정직하고 청렴결백하여 나라를 잘 다스릴 것입니다. 하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그 청렴결백과 정직이 때로는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포숙은 너무 곧아서 모든 간신의 무리를 내치고 말 것입니다. 너무 깨끗한 물에는 고기가 살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니 주공께서는 포숙을 재상에 앉히신다면 역아, 개방, 수초 등의 무리는 포숙과 상극이오니 나라를 위해서는 그들을 멀리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제환공을 관중의 충고를 듣지 않고 이 세 사람을 재상으로 임명하여 국정을 농단하게 만들었다. 관중의 예언대로 세 사람은 권력다툼을 하며 환공을 밀실에 가두어 굶어 죽고 67일 동란 다툼이 계속되어 환공의 시신을 수습할 때 구더기가 들끓었다고 한 것이다.

 

제환공과 간신 역아, 주조, 개방

 

여기서 보이는 관중의 첫 번째 잘못은 자신의 후계를 키우지 아니하여 관중 사후에 제나라 국가 권력의 공백이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두번째 잘못은 제환공을 초기의 영민함이 사라진 혼군(昏君)으로 길러냈다는 것이다. 즉 관중이라는 능신(能臣)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없는 어리석은 군주로 만들었다는 잘못이다. 또한 환공의 다섯 아들의 후계구도를 명확하게 하지 않아 결국 간신 셋과 권력 쟁탈의 장이 연출 되게 한 것이다. 이후 제나라는 혼란의 시기로 돌아가며 맹주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3. 중국을 대표하는 명 재상(宰相)_ 관중

 

주왕조 이후 중국 역사를 들어 높은 평가를 받는 전설적인 명재상이다. 재상이 된 이후로 내치에 힘을 써서 부국강병을 통해 제나라를 일약 중원의 패권국으로 길러냈고, 존왕양이(尊王攘夷)로 요약되는 외교정책을 펼쳐 춘추시대의 새로운 질서를 설계했다. 그의 뒤를 이은 진(晉) 나라 문공이 패권을 잡으며 강대해진 진나라 역시 존왕양이의 질서를 그대로 따라갔다. 또한 제나라 역시 워낙 관중이 다져놓은 유산이 탄탄했던 탓에 패권을 놓쳤을 뿐 진시황에게 멸망당할 때까지 30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한 번도 강대국으로써의 위치를 놓치지 않았다.

 

관안열전에 나온 관중의 기록을 보면 관중과 포숙의 관계를 이야기한 관포지교(管鮑之交), 포숙아의 추천을 통해 제환공에게 중용되어 부국 강병책을 통한 내치 강화 그리고 패권국의 자리를 차지하는 과정이 나온다. 사마천이 놓치지 않고 기록한 부분은 관중의 부가 공실(公室)의 부유함을 넘어섰음에도 제나라 백성들은 그를 비난하니 않았다는 기록이다. 관안열전편에 기록은 다소 부실하나 제환공에 나오는 치적은 관중을 더욱더 빛나게 하는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관안열전중

管仲富擬於公室(관중부의어공실),有三歸(유삼귀)、反(반점),齊人不以(제인부이위치)管仲卒(관중졸),齊國遵其政(제국준기정),常彊於諸侯(상강어제후)。後百餘年而有晏子焉(후백여년이유안자언)

 

이와 더불어 논어에 관중에 대한 평가가 등장한다. 상당히 후한 평가를 하는 것이다. 그 평가 이면에는 약간의 흠결이 있더라도 관중이 제환공과 시행한 정책이 중원의 백성들로 하여금 평화를 가져오게 만들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패자의 힘으로 춘추의 국제 질서를 바로잡았고, 북방민족 산융으로부터 연나라를 지켜준 일과 참람되게 왕이라 칭한 남방 초나라의 중원 진출을 전쟁을 통해 막아내고 주왕조를 섬기게 한 일 등을 공자는 우회적으로 칭찬하고 있다.

 

 

논어 헌문중 일부

子路曰(자로왈):「桓公殺公子糾(환공살공자규),召忽死之(소홀사지),管仲不死(관중부사)。」曰(왈):「未仁乎(미인호)?」子曰(자왈):「桓公九合諸侯(환공구합제후),不以兵車(부이병차),管仲之力也(관중지력야)。如其仁(여기인)!如其仁(여기인)!」

 

자로가 "환공이 공자 규를 죽였을 때 소홀은 주군을 따라 죽었으나 관중은 따라 죽지 않았으니 인하지 못한 사람 아닙니까?"고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제환공은 제후들을 아홉 번이나 자기 아래에 뭉치게 할 때도 무력을 사용하지 아니하였다. 그것은 관이오의 노력이 컸다. 그 정도면 어진 사람이다."

 

子貢曰(자공왈):「管仲非仁者與(관중비인자여)?桓公殺公子糾(환공살공자규),不能死(부능사),又相之(우상지)。」子曰(자왈):「管仲相桓公(관중상환공),霸諸侯(패제후),一匡天下(일광천하),民到于今受其賜(민도우금수기사)。微管仲(미관중),吾其被髮左衽矣(오기피발좌임의)。豈若匹夫匹婦之為諒也(기약필부필부지위량야),自經於溝瀆(자경어구독),而莫之知也(이막지지야)。

 

자공이"관중은 어질지 못한 사람 아닙니까? 자기 주군을 버리지 않고 죽은 소홀과 달리 자기 주군을 배신하고 그를 죽인 제환공을 도와 재상이 되었으니?"라는 질문을 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관중은 제환공의 재상으로써 그를 도와 제후들의 패자로 만들었고 천하를 바로 세웠다. 그래서 백성들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의 은혜를 받고 있는 것이다. 만약 관중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오랑캐의 풍습을 따랐을 것이다. 어찌 필부와 아녀자가 信義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도랑에서 목매어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는 것과 같이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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