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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사기

춘추오패_진목공

1. 서쪽의 패주 진목공

 

 

성은 영()이고, ()는 조(), 이름은 임호(任好)로 진목공()으로 일컬어진다. 진나라가 역사에 등장하는 시기는 비교적 늦다. 주평왕(재위 BC 770~720)이 서융과 신후의 공격을 받고 서주가 망하여 낙읍으로 수도를 옮길 때 이때 진양공이 군사를 일으켜 서융을 막고 주평왕을 낙읍으로 호송하여 그 공을 치하하며 제후의 반열로 올려준 것이다. 초기 진나라는 서쪽 서융과 같은 변경에 위치하여 오히려 서융(西戎)에 가까운 후진국이었다.

 

진 목공의 계보를 살펴보면 춘추(春秋)시대 진(秦)나라의 군주(君主)로 진덕공(秦德公)의 작은 아들이자 진선공(秦宣公), 진성공(秦成公)의 아우이다. BC 659년부터 BC 621년까지 재위에 있으면서 백리혜(百里奚), 건숙(蹇叔), 유여(由余), 맹명시(孟明) 등의 인재들을 등용하였다. 또한 오만불손한 진(晋)나라를 격퇴시키고, 진혜공(晋惠公)을 포로로 잡았으며 양(), 예(芮)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진문공(晋文公)을 후원하여 진진(秦晋) 연맹을 맺어 진목공은 서쪽의 패주로 진(晉)문공은 동쪽의 패주로 자리하게 된다. 진목공은 국내 정세를 안정시킨 후 촉() 및  함곡관(函谷關) 서쪽의 국가를 정벌하여 영토를 천리(千里)나 넓혔다. 이 때문에 주양왕(周襄王)이 그를 서방제후 백()으로 삼고, 서 패주로 일컬었다.

 

시기적으로 본다면 진 목공은 제환공과 진목공의 패주 시기와 겹치는 부분이 있다. 제환공이 죽은 BC 643년에서 진문공이 등장한 BC 636년 사이에 존재감을 드러냈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진 목공의 성정으로 미루어 본다면 굳이 강한 제후국을 상대로 국가의 부와 백성을 잃어가며 그 당시 패주 국인 제나라와 진나라를 적대하지 않는 현명한 정치를 펼쳤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대신 서쪽으로 눈을 돌려 파() ()등의 서쪽의 비옥하고 광활한 영토를 점령함으로써 후에 진시황이 전국을 통일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진 목공의 군주로서의 덕성 패주로서의 자질을 잘 드러내어주는 고사가 있다. 그 하나가 秦()과晉() 두나라에 饑饉(기근)이 번갈아 들며 두 군주가 취한 행동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에 기근이 들자 백리해와 의논하여 식량을 원조하였다. 그러나 秦()에 기근이 들자 晉(진)헌공은 이를 기회삼아 秦(진)땅을 빼앗고자 전쟁을 벌이게 된다. 이에 진 목공은 15(기원전 645) 군대를 일으켜 비표(丕豹)를 장수로 삼아 몸소 공격에 나섰다. 그 당시 두나라의 국력과 군세는 비등하였다. 그러나 전쟁의 명분에서는 秦(진)목공은 꿀릴게 없는 싸움이었고 진헌공은 제후간 국가 간의 도의에 어긋나는 행위였던 것이다.

 

결국 진(晉)나라 군주가 자신의 군대를 뒤로한 채 홀로 진격해 진(秦)나라 군사와 재물을 다가 진흙에 빠져 곤경에 빠지고, () 군대가 목공을 오히려 진(晉)나라 군대에게 포위당했다. 진(晉)나라 군사들이 목공을 공격하니 목공이 부상을 당했다. 이때 기산 아래에서 목공의 좋은 말을 훔쳐서 잡아먹었던 300명의 백성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진(晉)나라 군대로 돌진하여 포위를 풀어주어 마침내 목공은 위기에서 벗어나고 거꾸로 진(晉)나라 군주를 사로잡게 된다.

 

 

十四年(십사년),秦饑(진기),請粟於晉(청속어진)。晉君謀之群臣(진군모지군신)。虢射曰(괵사왈):「因其饑伐之(인기기벌지),可有大功(가유대공)。」晉君從之(진군종지)。十五年(십오년),興兵將攻秦(흥병장공진)。繆公發兵(무공발병),使丕豹將(사비표장),自往擊之(자왕격지)。九月壬戌(구월임술),與晉惠公夷吾合戰於韓地(여진혜공이오합전어한지)。晉君棄其軍(진군기기군),與秦爭利(여진쟁리),還而馬騺(환이마치)。繆公與麾下馳追之(무공여휘하치추지),不能得晉君(부능득진군),反為晉軍所圍(반위진군소위)。晉擊繆公(진격무공),繆公傷(무공상)。於是岐下食善馬者三百人馳冒晉軍(어시기하식선마자삼백인치모진군),晉軍解圍(진군해위),遂脫繆公而反生得晉君(수탈무공이반생득진군)。初(초),繆公亡善馬(무공망선마),岐下野人共得而食之者三百餘人(기하야인공득이식지자삼백여인),吏逐得(리축득),欲法之(욕법지)。繆公曰(무공왈):「君子不以畜害人(군자부이축산해인)。吾聞食善馬肉不酒(오문식선마육부음주),傷人(상인)。」乃皆賜酒而赦之(내개사주이사지)。三百人者聞秦擊晉(삼백인자문진격진),皆求從(개구종),從而見繆公窘(종이견무공군),亦皆推鋒爭死(역개추봉쟁사),以報食馬之德(이보식마지덕)。於是繆公虜晉君以歸(어시무공로진군이귀),令於國(령어국),齊宿(제숙),吾將以晉君祠上帝(오장이진군사상제)。周天子聞之(주천자문지),曰(왈)「晉我同姓(진아동성)」,為請晉君(위청진군)。夷吾姊亦為繆公夫人(이오자역위무공부인),夫人聞之(부인문지),乃衰绖跣(내쇠질선),曰(왈):「妾兄弟不能相救(첩형제부능상구),以辱君命(이욕군명)。」繆公曰(무공왈):「我得晉君以為功(아득진군이위공),今天子為請(금천자위청),夫人是憂(부인시우)。」乃與晉君盟(내여진군맹),許歸之(허귀지),更舍上舍(경사상사),而饋之七牢(이궤지칠뢰)。十一月(십일월),歸晉君夷吾(귀진군이오),夷吾獻其河西地(이오헌기하서지),使太子圉為質於秦(사태자어위질어진)。秦妻子圉以宗女(진처자어이종녀)。是時秦地東至河(시시진지동지하)。

 

 

2.진목공의 명신들_오고대부 백리해 그의 친구 건숙

 

진목공과 명신들(진문공이 여기에 왜?)

 

진목공을 도와 서쪽 패주의 반열에 오르게 한 사람은 백리해이다. 그의 생몰연대는 사료에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 자는 정백(井伯)이며 완() 사람이다. 아내 두씨(杜氏)와 아들 백리시(百里視, 맹명)를 두었다. 그러나 계속 가난에 시달렸고 아무도 그를 알아주지도, 천거해 주지도 않자 그는 우(虞)나라를 떠날 결심을 하게 되고 제나라로 향했다. 당시 제나라 임금이었던 제양공이 죽고 공손무지가 제나라 임금이 되었지만, 제나라에서 알게 된 건숙(蹇叔)의 조언으로 임관하지 않았고 변란을 피할 수 있었다. 이어 주(周)나라 왕자 퇴를 섬기려 하자 건숙의 만류로 섬기지 않았다. 그 후 다시 우나라로 돌아가서 우나라의 궁지기의 천거로 대부 벼슬을 얻었다. 그 후 진(晉)나라의 침략으로 우나라가 멸망한 후 진나라 헌공의 딸과 진(秦)나라 목공의 결혼식에 따라가는 남자 종의 신세가 되어, 진나라로 가는 길에 초나라로 도망가서 소를 치면서 있다가 초성왕(楚成王)이 백리해를 말 키우는 일을 시켰다.

 

진목공은 그 후 진나라에서 명단에 있던 백리해가 없는 것을 알게 되었고 수소문 끝에 초나라에 있음을 알고 데려오려 하였으나 초나라가 백리해의 인재됨을 알아볼까 두려워하며 사신에게 일러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하였다. “ 나의 잉신(왕비가 시집올 때 데려오는 신하) 백리해가 초나라에 있습니다. 양가죽 다섯 장에 그를 팔아주길 청합니다결국은 초나라가 이를 허락하고 백리해를 데려오니 그의 나이 70세였다. 지금으로 치면 천수를 다 누리고 죽음을 앞둔 나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그 후 진나라 사람들은 그를 오고(五羖)대부라 불렀다.

 

秦(진)나라에 들어오고 목공은 국사를 논하려 하자 백리해는 자신의 친구 건숙을 추천한다. 자신보다 더 유능하고 현명함을 알리며 목공에게 추천하자 목공은 그를 모셔와서 상대부의 자리에 앉히고 국사를 같이 논의한다. 주 문왕이 강태공을 얻은 일화, 그리고 제환공이 관중과 포숙을 얻는 과정과 묘하게 닮아있다. 다소간 픽션적인 요소가 깔려있긴 하나 사마천이 말하고자 한 바는 패도나 왕도를 이룩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신하를 보는 군주의 안목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국정을 이끌어가는 그 주체는 결국 군주가 아니라 그들의 아래서 국정을 이끌어가는 賢臣(현신)과 能臣(능신)들이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五年(오년),晉獻公滅虞(진헌공멸우)、虢(괵),虜虞君與其大夫百里傒(로우군여기대부백리혜),以璧馬賂於虞故也(이벽마뢰어우고야)。既虜百里傒(기로백리혜),以為秦繆公夫人媵於秦(이위진무공부인잉어진)。百里傒亡秦走宛(백리혜망진주완),楚鄙人執之(초비인집지)。繆公聞百里傒賢(무공문백리혜현),欲重贖之(욕중속지),恐楚人不與(공초인부여),乃使人謂楚曰(내사인위초왈):「吾媵臣百里傒在焉(오잉신백리혜재언),請以五羖羊皮贖之(청이오고양피속지)。」。楚人遂許與之(초인수허여지)。當是時(당시시),百里傒年已七十餘(백리혜년이칠십여)。繆公釋其囚(무공석기수),與語國事(여어국사)。謝曰(사왈):「臣亡國之臣(신망국지신),何足問(하족문)!」繆公曰(무공왈):「虞君不用子(우군부용자),故亡(고망),非子罪也(비자죄야)。」固問(고문),語三日(어삼일),繆公大說(무공대설),授之國政(수지국정),號曰五羖大夫(호왈오고대부)。百里傒讓曰(백리혜양왈):「臣不及臣友蹇叔(신부급신우건숙),蹇叔賢而世莫知(건숙현이세막지)。臣常游困於齊而乞食铚人(신상유곤어제이걸식질인),蹇叔收臣(건숙수신)。臣因而欲事齊君無知(신인이욕사제군무지),蹇叔止臣(건숙지신),臣得脫齊難(신득탈제난),遂之周(수지주)。周王子穨好牛(주왕자퇴호우),臣以養牛干之(신이양우간지)。及穨欲用臣(급퇴욕용신),蹇叔止臣(건숙지신),臣去(신거),得不誅(득부주)。事虞君(사우군),蹇叔止臣(건숙지신)。臣知虞君不用臣(신지우군부용신),臣誠私利祿爵(신성사리록작),且留(차류)。再用其言(재용기언),得脫(득탈),一不用(일부용),及虞君難(급우군난):是以知其賢(시이지기현)。」於是繆公使人厚幣迎蹇叔(어시무공사인후폐영건숙),以為上大夫(이위상대부)。

 

목공 5(기원전 655), 진 헌공(晉 獻公)이 우(虞)나라와 괵(虢)나라를 멸망시키고 우나라의 군주와 대부 백리혜(百里傒)를 포로로 잡은 것은 진 헌공이 먼저 백옥(白玉)과 좋은 말을 우나라의 군주에게 뇌물로 주었기 때문이다. 진 헌공은 백리혜를 포로로 잡아온 후 딸을 진 목공(秦 繆公)에게 시집보낼 때 시종으로 딸려 보냈다.

백리혜는 진(秦)나라에서 완()으로 도망쳤다가 초나라 변경 사람에게 잡혔다. 백리혜가 현명하다는 것을 들은 진 목공은 비싼 값을 치르고라도 데려오려고 했으나 초나라 사람이 내주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 초나라에 사람을 보내 전하기를 “나의 잉신(媵臣)인 백리혜가 거기에 있는데, 검정 숫양의 가죽 다섯 장을 몸값으로 치르고자 한다.”라고 했다. 초나라 사람이 이를 받아들여 백리혜를 놓아주었다. 이때 백리혜의 나이는 이미 70살이 넘었다.

목공은 백리혜를 풀어주고 그와 함께 국사를 의논하고자 했다. 백리혜가 사양하며 말했다. “저같이 망한 나라의 신하에게 무엇을 물으신단 말입니까! 목공이 말했다. “우(虞) 나라 군주가 그대를 기용하지 않아서 망한 것이지 그대 죄가 아니잖소. 고집스럽게 질문을 하며 백리혜와 사흘 동안 이야기를 나눈 목공은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국정을 맡기고 오고대부(五羖大夫)로 부르려 했다.

백리혜는 사양하며 말했다.

“신은 신의 친구인 건숙(蹇叔)만 못하고 건숙은 현명한데도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습니다. 신이 일찍이 벼슬을 구하러 돌아다니다가 제나라에서 곤경에 빠져 질(絰)이란 곳의 사람에게 구걸을 할 때 건숙이 신을 거두어 주었습니다. 신이 제나라 군주 공손무지(公孫無知)를 섬기려 하자 건숙이 말려서 덕분에 신은 제나라의 내란에서 벗어나 끝내 주나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주나라의 왕자 퇴()가 소를 좋아한다기에 신은 소를 기르는 재주로 자리를 구하려 했습니다. 왕자 퇴가 신을 기용하려고 했으나 건숙이 신을 말려서 신이 떠나는 바람에 죽음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우(虞)나라의 군주를 섬기려 할 때도 건숙이 신을 말렸습니다. 신은 우나라 군주가 신을 기용하지 않으리라는 알았지만 녹봉과 작위가 탐나 잠시 머물렀습니다.두 번은 그의 말을 들어서 재난에서 벗어났고, 한 번은 듣지 않아서 우나라 군주의 재난을 당했습니다. 이를 보면 그가 얼마나 현명한지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목공은 사람을 보내 후한 예물을 갖추어 건숙을 맞아들여 상대부(上大夫)에 임명했다.

 

3.진목공의 명신들_ 유여(由余)에게서 노자의 향기가….

 

먼저 노자 도덕경 38장 상덕부덕(가장 훌륭한 덕은 덕이라고 하지 않는다. )은 철학적 사유가 필요한 장이다. 군주가 가장 최우선으로 힘써야 될 것이 바로 德()이다. 노자 도덕경에 道理(도리)에서 출발하여 德(), (), (), () 순으로 생겨나 마지막으로 법과 제도가 있게 된다. 즉 이 예 법과 제도가 갖추어져 있는 문명국가임에도 중원의 나라는 춘추시대 패권쟁탈의 시대로 접어들어 서로 다투게 되는 모습을 유여는 여과 없이 진목공에게 진언을 한다.

 

無爲自然(무위자연)의 도와 덕이 사라지고 인위적인 인 의 예 그리고 법과 제도가 만들어져 인간을 구속하는 지경이 연출됨을 노자는 말하고 있다. 특히 禮()는 인간의 덕성 중 가장 말단의 것으로 인간의 참된 마음이 옅어져서 인간에 의해 작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그 예가 지켜지지 않는다면 팔을 걷어 부치고 억지로 잡아당긴다고 하는 것이다. 그나마 붙잡고 있어야겠지만 세상의 분란을 일으키는 근원이 되는 것이고 도를 겉치레한 것에 불과한 것이니 이러한 인위적인 예라는 것은 어리석음의 시작을 말하는 것이다.

 

노자 도덕경 38장

上德不德(상덕부덕),是以有德(시이유덕);下德不失德(하덕부실덕),是以無德(시이무덕)。上德無為而無以為(상덕무위이무이위);下德為之而有以為(하덕위지이유이위)。上仁為之而無以為(상인위지이무이위);上義為之而有以為(상의위지이유이위)。之而莫之應(상례위지이막지응),則攘臂而之(칙양비이잉지)。故失道而後德(고실도이후덕),失德而後仁(실덕이후인),失仁而後義(실인이후의),失義而後禮(실의이후례)者(부례자),忠信之薄(충신지박),而亂之首(이란지수)。前識者(전식자),道之華(도지화),而愚之始(이우지시)。是以大丈夫處其厚(시이대장부처기후),不居其薄(부거기박);處其實(처기실),不居其華(부거기화)。故去彼取此(고거피취차)

 

가장 훌륭한 덕은 덕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덕이 있다. 수준 낮은 덕은 덕을 잃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덕이 없게 된다. 가장 훌륭한 덕은 무위하면서 무엇을 위하여 함이 없다. 가장 훌륭한 인은 그것을 행하되 무엇을 위하여 함이 없다. 가장 훌륭한 의는 그것을 행하면서 무엇을 위하여 한다. 가장 훌륭한 예는 그것을 행하되 따라오지 않으면 팔을 걷어붙이고 억지로 끌어당긴다. 그러므로 도를 잃은 후에 덕이고, 덕을 잃은 후에 인이며, 인을 잃은 후에 의이고, 의를 잃은 후에야 예이다. 대저 예라는 것은, 진실하고도 신실한 마음이 얄팍해진 결과이며 혼란의 원인이다. 앞서 있는 인식 체계는, 도가 꾸며진 것이자 어리석음의 단초이다. 이렇기 때문에 대장부는 중후함에 처하지, 얄팍한 곳에 거하지 않는다. 그 참된 모습에 처하지, 그 꾸며진 곳에 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진 목공 당시 서융은 융 왕이라 일컫고 주왕실을 동으로 밀어낼 만큼 군사력은 강하였다. 진목공 춘추좌전에 나오는 진목공을 진백임호(秦伯任好)라고 나온다. () () ()등의 순으로 불리 우는 순서의 세번째이다. 춘추에서는 伯()으로 낮추어 불린 까닭은 지리적으로 서융과 국경을 접하며 거의 서쪽 변방 부족의 하나로 취급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때 유여가 서융왕의 사신으로 진나라에 들어오며 접견하는 자리에서 진목공은 진나라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궁실과 재물을 보여주며 자랑한다.이때 유여는 촌철살인 같은 말로 진목공을 눌러버린다.

 

“귀신에게 이렇게 만들지라도 힘들어할 것입니다하물며 사람에게 만들게 했으니 백성들 역시 고달팠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기죽을 진목공이 아닐 터, 진목공은 한마디를 덧붙이게 된다. “중원의 각 나라들은 시(), (), (), (), 법도(法度)로 나라를 다스리지만 오히려 수시로 난이 일어나는데 지금 융은 이런 것들이 없으니 무엇으로 나라를 다스리나어렵지 않은가?

진목공의 이런 반격에 유여는 역으로 받아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이 바로 중원의 각국이 난이 일어나는 이유입니다. 무릇 옛날 성인 황제(黃帝)께서 예악과 법도를 만들어 몸소 앞장섰기에 겨우 다스려진 것입니다. 그 후세는 날로 교만하고 음탕해졌습니다.

……..중략 ……… “()은 그렇지 않습니다. 윗사람은 순박한 德()으로 아랫사람을 대하고 아랫사람은 충성과 믿음으로 윗사람을 섬기니 한 나라의 정치가 마치 자기 한 몸을 다스리는 것 같으며 그런데도 어떻게 다스려지는지도 모르니 이것이 바로 성인의 다스림입니다.

 

유여의 이러한 화술과 해박함에 감탄한 진목공은 유여를 얻기 위해 서융에 미인계와 이간계를 쓴다. 유여를 일 년 동안 진에 붙잡고 서융에는 미인들을 보내어 융왕을 향락에 빠지게 만든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난 시점에 유여를 보내니 유여는 융왕에게 미색을 탐하는 것을 그만두라 간하나 듣지 않는다. 이에 진 목공이 수차례 유여를 설득하여 秦(진)나라로 들어오라 회유한다. 결국 유여는 투항을 하고 진나라로 들어와 객경이 되어 서쪽 서융땅 12개 부족 국가를 소멸시키고 천리나 되는 영토를 넓힌 일등 공신이 된다.이때부터 秦(진)나라는 서쪽에 기반한 풍부한 물산을 바탕으로 통일 중국의 기초를 다지며 진 목공은 서쪽의 패주로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戎王使由余於秦(융왕사유여어진)。由余(유여),其先晉人也(기선진인야),亡入戎(망입융),能晉言(능진언)。聞繆公賢(문목공현),故使由余觀秦(고사유여관진)。秦繆公示以宮室(진목공시이궁실)、積聚(적취)。由余曰(유여왈):「使鬼為之(사귀위지),則勞神矣(즉로신의)。使人為之(사인위지),亦苦民矣(역고민의)。」繆公怪之(목공괴지),問曰(문왈):「中國以詩書禮樂法度為政(중국이시서예악법도위정),然尚時亂(연상시란),今戎夷無此(금융이무차),何以為治(하이위치),不亦難乎(불역난호)?」

 

서융(西戎)의 왕이 유여(由余)를 진(秦)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유여는 그의 선조가 진(晉)나라 사람이었으나 융으로 도망하였기에 진나라 말을 할 줄 알았다. 융왕은 목공이 현명하다는 소문을 듣자 유여를 보내 진(秦)나라를 살피게 한 것이다. 진 목공은 궁실과 쌓아 놓은 재물을 보여주었다. 유여가 말했다. “귀신에게 이렇게 만들지라도 힘들어할 것입니다하물며 사람에게 만들게 했으니 백성들 역시 고달팠을 것입니다.” 목공이 괴이하게 생각하여 물었다. “중원의 각 나라들은 시(), (), (), (), 법도(法度)로 나라를 다스리지만 오히려 수시로 난이 일어나는데 지금 융은 이런 것들이 없으니 무엇으로 나라를 다스리나어렵지 않은가?

 

 

由余笑曰(유여소왈):「此乃中國所以亂也(차내중국소이란야)。夫自上聖黃帝作為禮樂法度(부자상성황제작위예악법도),身以先之(신이선지),僅以小治(근이소치)。及其後世(급기후세),日以驕淫(일이교음)。阻法度之威(조법도지위),以責督於下(이책독어하),下罷極則以仁義怨望於上(하극즉이인의원망어상),上下交爭怨而相篡弒(상하교쟁원이상찬시),至於滅宗(지어멸종),皆以此類也(개이차류야)。夫戎夷不然(부융이불연)。上含淳德以遇其下(상함순덕이우기하),下懷忠信以事其上(하회충신이사기상),一國之政猶一身之治(일국지정유일신지치),不知所以治(부지소이치),此聖人之治也(차진성인지치야)。」

 

 

유여가 웃으며 말했다. “그것이 바로 중원의 각국이 난이 일어나는 이유입니다. 무릇 옛날 성인 황제(黃帝)께서 예악과 법도를 만들어 몸소 앞장섰기에 겨우 다스려진 것입니다. 그 후세는 날로 교만하고 음탕해졌습니다. 법도의 위세에 의지하여 아랫사람들을 문책하고 감독하니 아랫사람들은 극도로 피로해져 윗사람이 인의가 없다고 원망하여 상하가 서로 다투고 원망하며 서로 찬탈하고 시해하니 종족이 멸망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모두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윗사람은 순박한 德()으로 아랫사람을 대하고 아랫사람은 충성과 믿음으로 윗사람을 섬기니 한 나라의 정치가 마치 자기 한 몸을 다스리는 것 같으며 그런데도 어떻게 다스려지는지도 모르니 이것이 바로 성인의 다스림입니다.

 

4.진목공의 가장 어리석은 선택 순장(殉葬)

 

진목공 39 (BC621) 진목공이 죽는다. 사기에는 진 목공의 죽음과 良臣(양신) 3명 포함명포함 177명에 달하는 순장의 내용만 무미건조하게 간단히 기록되어있다. 그리고 진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애석하여 여겨 황조가를 지어 노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三十九年(삼십구년),繆公卒(목공졸),葬雍(장옹)。從死者百七十七人(종사자백칠십칠인),秦之良臣子輿氏三人名曰奄息(진지량신자여씨삼인명왈엄식)、仲行(중항)、鍼虎(겸호),亦在從死之中(역재종사지중)。秦人哀之(진인애지),為作歌黃鳥之詩(위작가황조지시)。

 

그러나 춘추좌전에 그 상세한 기록이 나온다. 춘추의 필법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표현이다. 진 목공이 아닌 진백 임호(이름)가 卒()하였다는 기록이고 그 다른 하나는 진목(公도 붙이지 않음)이 맹주가 되지 아니함은 당연하다라고 나온다. 이를 미루어 보자면 177명의 선량한 백성과 3명의 良臣(양신)을 순장한 것을 직설적으로 비판한 글이기도 하다. 따를 수 있는 좋은 법을 만들어 후세에 전하기는커녕 순장이라는 악습을 따라 한 진 목공의 업보는 결국 진 목공이후 250년간 중국 역사의 전면에 나올 수 없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고 君子(군자)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국정의 중심이 된 신하들이 순장되어 사라져 갔기에 진의 국력은 크게 저하되고 중원의 무대에서 사라져 간 것이었다.

 

秦伯任好卒(진백임호졸),以子車氏之三子(이자차씨지삼자),奄息(엄식),仲行(중행),鍼虎(검호),為殉(위순),皆秦之良也(개진지량야),國人哀之(국인애지),為之賦黃鳥(위지부황조).

君子曰(군자왈),秦穆之不盟主也(진목지부위맹주야),宜哉(의재),死而棄民(사이기민),先王違世(선왕위세),猶詒之法(유이지법),而況奪之善人乎(이황탈지선인호),詩曰(시왈),人之云亡(인지운망),邦國殄瘁(방국진췌),無善人之謂(무선인지위),若之何奪之(약지하탈지),古之王者(고지왕자),知命之不長(지명지부장),是以並建聖哲(시이병건성철),樹之風聲(수지풍성),分之采物(분지채물),著之話言(저지화언),為之律度(위지률도),陳之藝極(진지예극),引之表儀(인지표의),予之法制(여지법제),告之訓典(고지훈전),教之防利(교지방리),委之常秩(위지상질),道之以禮(도지이례),則使毋失其土宜(칙사무실기토의),眾隸賴之(중례뢰지),而後即命(이후즉명),聖王同之(성왕동지),今縱無法以遺後嗣(금종무법이유후사),而又收其良以死(이우수기량이사),難以在上矣(난이재상의),君子是以知秦之不復東征也(군자시이지진지부복동정야)

 

진백(목공) 임호가 졸하니, (장례에) 자거씨의 세 아들 엄식 중항 검호를 순장하니 모두 秦의 良臣이다. 국인이 슬퍼하여 그들을 위해 황조를 읊었다.

군자 왈, 진목공이 맹주가 되지 못함은 당연하다. 죽으면서 백성을 버렸다. 선왕이 세상을 떠날 적에 오히려 자손에게 법도를 남겼는데 하물며 선인을 빼앗아 감에 있어서이겠는가? 시경에 왈, 인재가 죽으니 나라가 다 고달프다. 하였으니 선인이 없음을 이른 것이다. 어찌하여 선인을 빼앗는가? 고대의 왕자는 명(목숨)이 길지 아니함을 알았다. 이 때문에 널리 聖哲(성철)을 등용하여 명성(風聲)을 세우고 채물(채색으로 꾸민 사물로 등급에 맞는 의복, 수레 등)을 나누어 주며 좋은 말(話言)을 기록하며 율도를 제정하며 예극(세금의 표준)을 선포하며 법도와 예의로 인도하며 법제를 주어 사용하며 훈과 전으로 고하여 가르치며 부당 이익 추구 방지를 가르치며 일정한 직무를 맡기며 예절과 법칙으로 인도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자기 지방의 좋은 풍습을 잃지 아니하게 하여 직책을 가진 여러 백성(衆隸)이 이에 의지하여 명(죽음)에 나아가게 하니 성왕이 다 같이 한 것이다. 지금은 비록 법을 만들어 후사에 남겨주지는 못할지라도 또 그 良人을 거두어 죽이니 위에 있기가(패자가 되기는) 어렵다. 군자가 이 때문에 秦()이 다시는 東征(동정)을 못할 줄 알았다.

 

詩經 秦風 黃鳥

 

交交黃鳥(교교황조),止于棘(지우극)。 이리저리 날던 꾀꼬리 가시나무에 앉았네.

誰從穆公(수종목공)?子車奄息(자차엄식)。 누가 목공을 따라 죽는가, 자거엄식이로다.

維此奄息(유차엄식),百夫之特(백부지특)。 이 엄식은 백 사람 중에서도 뛰어났는데

臨其穴(림기혈), 惴惴其慄(췌췌기율)。 묘지에 이르자 두려움에 벌벌 떠네.

彼蒼者天(피창자천),殲我良人(섬아량인)。 푸른 하늘이여, 우리 어진 이를 죽이려는가.

如可贖兮(여가속혜),人百其身(인백기신)。 바꿀 수만 있다면 백사람으로 그 몸을 대신할 터인데.

 

交交黃鳥(교교황조),止于桑(지우상)。 이리저리 날던 꾀꼬리 뽕나무에 앉았네.

誰從穆公(수종목공)?子車仲行(자차중행)。 누가 목공을 따라 죽는가, 자거중행이로다.

維此仲行(유차중행),百夫之防(백부지방)。 이 중행은 백 사람에 필적하는데,

臨其穴(림기혈), 惴惴其慄(췌췌기율)。 묘지에 이르자 두려워 벌벌 떠네.

彼蒼者天(피창자천),殲我良人(섬아량인)。 푸른 하늘이여, 우리 어진 이를 죽이려는가.

如可贖兮(여가속혜),人百其身(인백기신)。 바꿀 수만 있다면 백사람으로 그 몸을 대신할 터인데.

交交黃鳥(교교황조),止于楚(지우초)。 이리저리 날던 꾀꼬리 가시나무에 앉았네.

誰從穆公(수종목공)?子車鍼虎(자차침호)。 누가 목공을 따라 죽는가, 자거침호로다.

維此鍼虎(유차침호),百夫之御(백부지어)。 이 침호는 백사람을 막을 수 있는데

臨其穴(림기혈),惴惴其慄(췌췌기율)。 묘지에 이르자 두려워 떠네.

彼蒼者天(피창자천),殲我良人(섬아량인)。 푸른 하늘이여, 우리 어진 이를 죽이려는가.

如可贖兮(여가속혜),人百其身(인백기신)。 바꿀 수만 있다면 백사람으로 그 몸을 대신할 터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