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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사기

진(晉) 제국의 興亡盛衰

 

 

1. 진(晉) 제국의 잔혹사

 

춘추시대 제후국

 

(, 기원전 1042 ~ 기원전 376)은 주나라 무왕의 둘째 아들 당숙 우(唐叔虞)가 형인 주() 성왕에게 삼감의 난이 평정된 이후 그 땅을 받아 세운 나라이다. 숙우의 아들 섭보(燮父)가 도읍을 진수(晉水) 가로 옮겨 진()으로 개명하였다. 진제국의 위치는 그 당시 제나라 초나라 진()보다 영토와 인구 측면에서 비등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왕실이 약화된 계기는 공족들간의 오랜 내전으로 인한 왕실 가계의 인구 증가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순장(殉葬)제로 인한 폐단이 그를 모신 대신과 시종 가족들까지 함께 죽임을 당하는 결과로 왕권강화를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숙우부터 9대 목후까지 특별한 역사적 기록은 없다. 그러나 목후 비왕이 죽고 동생 상숙이 스스로 군주로 즉위하자 비왕의 아들 태자 구()는 도망을 간다. 그리고 상숙 4(기원전 781)에 태자 구는 그의 무리를 이끌고 삼촌 상숙을 물리치고 제후가 된다. ()의 비극은 이때부터 형제간 사촌 간의 피비린내 나는 67년간의 내전상태로 몰리게 된다.

 

그 비극의 단초는 수도보다 더 큰 지방의 공족세력에 있었다. 진의 두 거대 도시는 수도인 익성(翼城)과 그보다 더 비옥하고 더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곡옥(曲沃)이 있다. 문후의 동생 환숙이 곡옥 지방의 영주로 선정을 베푸니 나라 사람 모두가 그를 따랐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한번 맛을 본 반란으로 반란의 모의를 더욱 쉽게 하게 된 간신들은 틈을 보아 군주를 배신하고 시해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진 소후 7 (BC 739) ()의 대신 반보가 그의 군주 소후를 시해하고 곡옥의 환숙을 맞아들이려 하였다. 그러나 진나라 사람들이 군대를 일으켜 환숙과 전쟁을 하여 물리치고 군주를 시해한 대신 반보를 죽이고 소후 아들 평을 군주로 세우니 이가 바로 효후(孝侯)이다.

 

 

내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이어진다. 효후 즉위 8년 곡옥의 군주 환숙이 죽고 아들 선이 대신하니 그가 곡옥의 영주 장백이다. 효후 15 (BC 725)에 장백은 그의 군대를 이끌고 익성으로 쳐들어가 효후를 시해하고 진군주 자리를 차지하려 하였으나 진나라 사람들이 다시 장백을 공격하여 곡옥으로 물러난다. 진나라 사람이 다시 효후의 아들 극(악후)을 군주로 세웠으나 재위8년 만에 죽자 곡옥의 영주 장백이 다시 진나라 도성으로 쳐들어 갔으나 이번에는 주(周) 평왕이 괵나라 군주에 토벌을 명하니 다시 곡옥으로 회군하였다.

 

그 뒤를 이은 진 애공과 곡옥의 장백의 뒤를 이은 칭()이 다시 한번 전쟁을 하여 애공을 사로잡아 죽이고 진나라 사람들은 그의 아들 소자 후를 진의 군주로 삼았으나 그리 오래가지 않아 곡옥의 무공이 소자 후를 유인하여 죽여버렸다. 이때 주() 환왕은 괵공을 진()으로 보내 그의 아들 민공을 군주로 삼아 28년을 재위에 있었으나 또다시 무공이 진 민후를 정벌하여 멸망시키고 진나라의 진귀한 보물들을 주() 희왕에 뇌물로 주어 제후에 봉해진다. 이로서 피비린내 나는 67년간의 내전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곡요와 익성의 전투

 

昭侯元年(소후원년),封文侯弟成師于曲沃(봉문후제성사우곡옥)。曲沃邑大於翼(곡옥읍대어익)。翼(익),晉君都邑也(진군도읍야)。成師封曲沃(성사봉곡옥),號為桓叔(호위환숙)。靖侯庶孫欒賓相桓叔(정후서손란빈상환숙)。桓叔是時年五十八矣(환숙시시년오십팔의),好德(호덕),晉國之眾皆附焉(진국지중개부언)。君子曰(군자왈):「晉之亂其在曲沃矣(진지란기재곡옥의)。末大於本而得民心(말대어본이득민심),不亂何待(부란하대)!」

 

환 숙이 이때 58세였는데 덕을 즐겨 베푸니, 진나라 백성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

군자가 말했다. “()의 난()은 곡옥에 있다. 가지가 줄기보다 크고 민심까지 얻었으니 어찌 난이 없겠는가!”

 

위에 글은 천자의 나라 주나라 보다 제후국이 강성해짐으로써 춘추의 시대가 되었고, 이와 마찬가지로 진나라가 분할되어 한, 조, 위의 삼가분진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진 나라 6경의 권력이 비대해지고 왕실의 권력이 약화되어 결국 晋은 나라가 분리되어 망하고 만 것이다.

 

 

2. 진 헌공과 중국 4대 악녀 여희(驪姬)

 

진문공 중의의 아버지는 진 헌(獻)공이다. 진무공의 아들이며 진()에서 가장 어리석은 군주 중 한 사람이다. 한 여자를 두고 아버지와 막장 드라마를 쓴 인물이기도 하다.아버지의 진 무공의 후처인 제강(제환공의 딸로 진무공(晉武公, B.C.715~677 재위)의 후취가 되었다가 그 아들인 진헌공(晉獻公, B.C.676~651 재위) 궤제(詭諸)의 정부인이 된 여성. 세자 신생과 후에 진목공의 부인이 된 목희(穆姬)를 낳았으나 요절했음.)을 아내로 맞이하여 장자 신생(申生)을 낳는다. 헌공은 제강이 죽자 적() 여인으로부터 딸 한 명과 중이(重耳)와 이오(夷吾)를 얻고 여융을 정벌하여 여희(驪姬)와 그녀의 동생을 얻는다. 헌공 12(BC 666)에 여희가 혜제를 낳으며 권력쟁탈의 장이 연출된다. 여희를 총애한 헌공은 태자 신생을 폐위시킬 생각으로 신생을 비롯하여 중이와 이오 등 아들들을 변방으로 쫓아 그곳을 지키게 한다.

 

 

헌공 21년 여희는 계략을 꾸며 신생을 태자 자리에서 몰아내려 하였다. 헌공에게 제사 고기를 진상하게 하며 그 고기에 독약을 넣어 누명을 씌우려 한 것이다.그 계략은 성공하여 헌공의 화를 부르고 그 사실은 안 신생은 그 길로 곡옥의 신성으로 달아났다. 누군가 모함의 사실을 헌공에게 스스로 해명하라 간언 하자 헌공에 대한 효심이 지극한 신생은 여희와 헌공의 관계를 해할까 두려워하여 스스로 자결하고 만다. 이일로 중이와 이오도 자신의 영지로 달아나 스스로 수비를 하였다. 헌공은 이것을 반역으로 여기고 두 포읍과 굴읍의 두성을 공격을 명한다. 이에 겁을 먹고 이오는 양(梁) 나라로 달아나고 중이는 적(翟) 나라로 달아나 숨게 된다.여희의 아들 혜제가 태자로 등극한다.   

 

헌공 26년 가을에 헌공이 죽고 태자 혜제의 세력에 맞서 세 공자의 무리를 모아 난을 일으키고 혜제와 그의 동생 탁자 죽여버린다. 천명을 어기고 욕심을 부린 여희는 그 화가 그녀와 아들에 미치어 그녀의 아들의 죽음으로 찾아온 것이다. 즉 여희의 욕심에 그녀의 잘못 없는 아들이 희생당한 것이다. 반란을 주도한 진()의 대신 이극(裏克)과 비정(邳鄭)은 중이를 군주로 옹립하려 하려 하였으나 중이는 거절하고 이오는 진(秦) 나라의 위세를 빌어 진(晉)나라로 들어가 군주가 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진(秦) 나라에 하서 땅의 할양을 약속하고 이극에게는 분양의 성읍을 봉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진() 군주 자리에 오른다. 여기서 중의의 선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67년간 권력투쟁으로 인해 약화된 왕실의 권위로서 국가를 이끌어갈 동력이 부족했음을 간파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어리석은 이오는 그것을 덥석 물어버린 것이다.

 

()은 군주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덕목이다. 진혜공은 국가 간 외교에서 상호 신뢰와 존중을 깨버린다. 그 첫 번째 사건이 하서 땅의 할양이었고 두 번째가 진(晉) 나라가 기근이 들었을 때 진()으로부터 구호물자를 받았으나, ()이 기근이 들자 이를 기회삼아 침공을 하며 신뢰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 세 번째는 그를 추대한 이극과 비정의 무리인7 대부를 척살하여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신뢰를 잃어버린 것이다. 결국 그 자신은 진(秦) 목공의 포로가 되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 혜공의 대표적인 실수는 진(秦) 나의 국력과의 목공(穆公)의 리더십을 간과한 것이다. 혜공 4년 진()에 기근이 들자 진()에 식량원조를 요청하였다. 목공(穆公)이 백리해(百里奚)와 상의하여 식량을 보내준다. 이와 반대로 그 이듬해에 진()에 기근이 들자 진()에 식량원조를 요청하였다. 이에 대신들을 모아 상의하자 경정(慶鄭)은 진()의 은혜를 갚자고 하였고, 괵석()은 이를 틈타 진(秦) 나라 정벌을 주장하였다. 혜공은 괵석의 계략을 들어 진(秦)을 정벌하였다. 이게 크게 진노한 진() 목공은 군대를 일으켜 진(晉)을 공격하니 한원에서 물리치고 진혜공을 포로로 사로잡아 군대를 물리고 돌아갔다. 진(秦)목공이 혜공을 죽여 상제에 제물로 삼으려 하자 진혜공의 누이인 목공의 부인이 상복을 입고 울며 반대하자 그 계획을 물리고 결국은 돌려보냈다.어리석은 군주와 멍청한 신하가 일으킨 국난(國亂)의 대표적인 예인 것이다.

 

진(秦) 목공 부인 목희는 진(晉) 혜공의 배다른 누나이다.  목희의 간곡한 청에 진목공은 혜공을 진(晉) 나라로 가게 한다.년 자신의 나라로 돌아온 혜공은 자신의 권위가 위협받는다는 생각에 이르자 혜공은 중이(重耳)의 암살을 시도하다 실패한다. 혜공 8년 자신의 아들 자어를 진()에 인질로 보내고, 10년 秦이 양나라를 멸망시킨다. 13년에 진혜공이 병이나고 태자 어()가 진나라를 도망쳐 돌아와 진혜공이 죽자 군주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그의 성정도 그의 아버지 못지않게 어리석어 중이를 내세운 秦나라의 군사와 진(晉) 나라의 중신이었던 난지와 극곡의 내응에 망하고 만다. 이에 춘추의 두 번째 패자 진 문공은 19년간의 망명생활을 끝내고 晉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3. 춘추 오패의 두번째 패자_진 문공(文公) 중이(重耳)의 등장

 

진문공과 5충신 그리고 중이의 망명도

 

진문공 중이(晉文公, 기원전 697 ~ 기원전 628)는 진나라 24대 군주이다. 진헌공의 차남으로 태어나 여희(麗姬)의 난()으로 19년간 망명생활을 하였다. 망명생활 동안 그의 인덕과 능력은 많은 이들의 눈에 띄어 명성을 얻고 진() 목공(穆公)의 도움을 받고 진나라에 돌아와 군주의 자리에 오른다. 중이는 진헌공과 적(狄 翟)족의 여인 호희(狐姬)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자였던 신생, 그리고 동생인 이오 夷吾(후의 혜공) 등이 있었다. 젊은 시절부터 인재를 좋아하여17세 때부터 조최(趙衰), 외삼촌 호언(狐偃), 가타(賈佗), 선진(先軫), 위주()를 부하로 삼았다. 이들은 나중에 중이와 망명생활을 함께 하게 된다.결국 이들의 도움과 중이 자신이 지닌 덕성으로 패업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여희의 난으로 적(狄)나라에 망명 중에 헌공이 죽고 여희 일족이 대부들에 의해 참살당하고 중이를 추대하려 하였으나 중이는 사양한다. 이에 이오를 군주로 추대하며 진(晉) 혜공이 된다. 혜공도 중이의 명성이 두려워 자객을 보내니 소국 적(狄) 국을 떠나 위나라를 거처 제환공과 관중이 군주로 있는 제나라로 떠난다. 제환공은 중이를 아끼어 제나라 여자 제강과 20승의 마차를 선물하며 후대한다. 그 편안한 생활을 이어가던 중 관중과 제환공이 죽자 수조와 같은 간신들이 정국은 혼란의 시대로 빠뜨린다. 이에 중이의 가신 조최와 구범이 떠날 모의를 하고5년 만에 제나라를 떠나려 하자 제강의 시녀가 그를 제강에게 알리자 제강은 시녀의 입을 막아버리고 중이를 떠가게 종용을 한다. 그러나 더 이상 유랑 생활을 하기 싫어하던 중이는 말을 듣지 않으려 하자 조최와 구범 등의 가신은 중이를 취하게 만들어 수레에 태워 강제로 제나라를 떠나게 하였다.중이가 깨어나 대노하여 외삼촌 구범을 죽이려 하였으나 진정 어린 설득으로 조나라에 도착한다.

 

조나라의 군주 조공공은 무례하게 중이의 통짜 갈비뼈를 신기해하여 그의 목욕장면을 훔쳐보았다. 이에 조나라를 떠나 송나라 이르니 송 양공은 중이에 대해 제후의 예로서 맞이하고 80마리의 말을 주고 환대하였다. 그러나 중이는 송나라가 전쟁으로 국가재정이 부족함을 알고 초나라로 향한다. 도중에 정나라에 들렸으나 위나라와 마찬가지로 푸대접을 받았다.

 

초의 성왕(成王)은 망명 공자 중이를 제후와 같은 예로서 대접했지만, 자신을 과시하려는 마음에 "만약 당신이 나라에 돌아가, 진의 군주가 되면 나에게 무엇을 답례해 줄 수 있소?"라고 물었다. 중이는 "만약 왕과 싸우는 일이 일어나면, 군을 3(: 군이 3일에 행군하는 거리) 물리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것을 들은 성왕의 부하 자옥(子玉)은 망명 공자에 지나지 않는 주제에 초나라 왕을 향해 건방지다고 분노하여 중이를 죽이려고 했지만, 성왕은 "하늘이 일으키려고 하는 것을 어째서 제지당할까"라고 자옥을 멈추었다.

 

기원전 637, 진 혜공이 죽자, 진의 인질이던 태자 어()가 진()으로 도망가, 회공(懷公)이 되었다. 이에 진 목공(秦穆公)은 전에 진 혜공에게 은혜를 원수로 받은 적도 있어 크게 화내었고, ()을 정벌하고 중이를 진나라 공으로 세우기 위해 초나라로부터 불렀다. ()의 대부들로부터 청을 받은 중이는, (秦軍) 뒤를 따라 진(晉)나라에 들어온다. 진나라 군(晉軍)은 반격에 나오지만, 평판이 나쁜 혜공과 그 아들 회공을 따르는 이는 그 수가 적고, 전투에 참여한 이는 측근의 군대만으로, 다른 대부분의 진나라군(晉軍)은 중이를 따라 진나라군(秦軍)과 함께 진나라 군(晉軍)을 멸했다. 중이는 진나라 공에 오른다. 실로 19년의 오랜 망명생활을 끝낸 뒤 62세의 새로운 진 문공은 천하 경영에 나선다.

 

기원전 635년 주(周) 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나 주 양왕이 도망을 오자 군대를 일으켜 반란군을 토벌하고 주양왕을 복위시킨다.또한 송나라를 침공한 초나라에 대응하여 군대를 일으켜 성복땅에서 전쟁을 치르게 된다. 이 전투의 승리로 인해 진 문공은 춘추의 두 번째 패자로 우뚝 서게 된다.이 전투에서 진문공은 초 성왕에게 약속한 삼사(三舍)를 지키게 된다. 세번 물러나고6일 만에 초군을 격퇴시키며 진문공의 위세는 온 천하에 알려지게 된다.이 성복 전투를 이김으로써 명분과 실리를 얻게 된 진문공은 천토에 행궁을 짓고 회맹을 소집하니 이것이 유명한 천토회맹인 것이다. 제나라 환공의 규구회맹과 더불어 가장 성대한 것이었으며 이 회맹에서 주왕은 진 문공에게 후백의 칭호를 내리며 중원의 패자가 된 것이다. 짧은 재위에 천하를 호령한 진 문공은 기원전 628 69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게 된다.

 

 

파란만장한 19년의 망명생활 동안 진 문공 중이는 군주로서 성장을 위한 많은 경험을 한다. 그중하나가 바로 위나라의 흙덩이 세례의 모욕이었다. 그것을 참지 아니하였더라면 아마도 중이는 존재하였을지언정  역사속에 없었을 것이다. 신생과 중이는 똑같은 곤경에 빠졌으나 신생은 자기 생각을 고집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중이는 위기를 자기 성장의 기회로 삼아 패주 수업을 착실히 받아 간 것이다. 이것은 진 문공 중이의 기본적인 덕성도 있었지만 그 덕성을 더 정비하게 다듬어준 조최를 비롯한 다섯 명의 현신(賢臣)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또한 그가 각 나라에서 맞이한 부인들 또한 역사 속의 진문공을 있게 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진문공은 중국 역사상 강태공과 함께 대기만성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많은 이들이 진문공을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인내하며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군자였기 때문이다. 사유중 하나인  지족불욕(知足不辱) 지지불태(知止不殆) 가이장구(可以長久)는 이 진 문공을 빗대어 한 말처럼 들린다. 이는 현재 동양적 사유와 처세 방식에 대단히 중요한 것이기도 하다. 진문공은 여희의 아들들이 진() 대부들에 죽어 비게 된 군주의 자리를 탐하지 않고 시기를 다시 한번 재고 있었던 것이었다. 즉 욕심은 내지 않아 치욕이 없었고 멈출 줄 알고서 위태로움이 없었던 것이다. 군주의 자리도 성복 전투에서도 그의 부드러움과 물러남 그런 인고의 세월을 견뎌냄만이 패주의 자리를 차지한 이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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