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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사기

전국 사대(四大)명장 기전파목(起翦頗牧)

2. 시작과 끝_백기 왕전

 

진나라의 전국통일의 기틀은 진효공과 상앙의 변법이었다. 강력한 중앙집권통치의 기반을 만들며 특히 군공수작제는 군에서 세우는 공에 따라 신분계급이 달라지는 강력한 동기를 부여하며 진나라 군대의 전투력은 엄청나게 증가한다. 거기에 전쟁의 기본조건이 하나 더 추가된다. 바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국력이다. 그 국력에는 병사의 수 전쟁을 수행할 무기도 물론 중요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경제력이다. 진나라 효문왕 때 파촉땅의 정벌은 엄청난 국력의 신장을 가져다준다.기름지고 비옥한 평야가 많은 파촉땅에서 수확되는 산물로 전쟁의 비용을 감당한 것이다. 강국 진나라와 조나라 간의 전쟁은 지금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만큼이나 군사적 경제적인 부분에서 차이가 심했던 것이다.

 

백기장군 주요 전투

 

백기(白起: ? ~ 기원전 257)와 왕전(王翦: ? ~ ? )은 진()나라가 전쟁을 통한 중국 통일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백전 불패의 장군(70여전 무패의 기록) 백기는 28대 군주 소양왕(BC 325~BC 251) 때때 인물 13(BC 294)에 좌서장으로 발탁되어 최종 상장군에 이를 때까지 주변국을 끊임없이 침탈하고 영토를 확장한다. 그의 전마(戰馬)가 휩쓸고 간 자리는 수많은 주검들만 남아 인간 백정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고대 그리스 도시연합국과 페르시아 간의 전쟁 마라톤전투에서 6600, 테르모필레 전투 그리스 2천 페르시아 수천, 살라미스 해전 양쪽 병력 수천 등 50여 년 동안 이어진 전쟁에서 전사자가 겨우 2만명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러나 백기가 치른 장평전투에서만 40의 생매장의 기록이 남아있고 아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역사에 기록된 상대국의 병사들의 전사자수만 82만 명에 이른다. 물론 다소간 역사적 과장이 포함되어 있다 하더라도 엄청난 수의 전사자가 발생했으리라 미루어 짐작된다.   

 

이러한 전과를 바탕으로 진나라의 국력은 6 제후국에 비해 날로 커지며 상대적으로 합종국들은 국력은 약화되고 영토와 백성은 줄어들게 된다.

 

장평전투_ 조나라 비극의 시작

1995년 중국 고평시 장평전투에서 발굴된 매장 군사들

 

조나라 군사 40만명이 생매장을 당한 장평전투는 진나라의 중국 통일을 힘겹게 막아내던 조나라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장평전투가 일어나게 된 배경은 조 효성왕의 어리석은 선택, 탐하지 말아야 될 독이 든 성배를 마신 것이다. 이이야기의 시작은 진()과 한()나라의 전쟁에서 진나라가 야왕(野王)을 점령하자 상당(上黨)과 한나라 본토는 끊어지게 된다. 이에 상당 태수 풍정은 상당을 진나라에 함락당하느니 차라리 조나라에 복속할 것을 결정하고 조나라 조정에 사람을 보내 알린다. 이에 조 효성왕은 평원군의 반대를 무시하고 상당땅을 취하게 되며 진(秦) 나라와 조(趙) 나라 간의 갈등으로 번지게 된다.

 

이에 진나라는 왕흘을 대장군 삼아 조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조나라의 명장 염파는 지구전과 수성전의 전략으로 왕흘이 이끄는 진나라를 효과적으로 막아낸다. 이때 진나라의 재상 범수는 조나라 조정과 중신이자 명장인 염파 사이에 이간계를 쓴다. 조나라왕에게 진나라 군대가 걱정하는 것은 '염파가 아니라 조괄이 대장군으로 나오는 것이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린 것이다. 염파가 성을 나서서 진 군대와 쌓우지 않고 수성만 하는 것이 불만이었던 조 효성왕은 염파를 장군에서 몰아내며 병법의 이론에만 치우치고 실전에 약한 조괄을 임명하게 된다.

반간계가 성공한 진나라는 조괄의 어리석고 성급한 성정을 이용하여 함정을 파고 도발을 하게 된다.공격하다 후퇴하며 조괄의 대군을 장평으로 끌어내는 데 성공하며 조나라 40만 대군을 46일 동안 고립시키고 조괄을 죽이고 조나라 군대의 항복을 받아낸다. 그리고 그 유명한 40만 병사의 생매장이 시작된다. 항복한 40만 대군중 어린 병사 240여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생매장시킨 것이다. 생매장의 구체적 방법은 사료에 나와 있지 않으나 1995년 고평시 장평으로 추정되는 지역에서 유골과 당시의 화폐, 그리고 칼과 화살등이  발견되었다.

 

위에 언급된 전투로 위나라, 한나라, 특히 군사 강국 조나라의 군사력은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된다.진나라 동진정책의 가장 큰 걸림돌인 조나라의 국력은 이 장평전투로 인해 쇠망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역사서에 수록된 법가 병가 종횡가로서 삶을 살아온 많은 이들의 말로는 좋지 않았다. 특히 병권을 다루는 장수들은 특히나 군주의 견제를 받으며 그 말로는 죽음으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백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전투에서 세운 전공이 너무나 큰 나머지 진나라 조정의 재상 범수의 질투를 받으며 정치적 갈등이 불행의 씨앗처럼 자라나고 있었다. 재상 범수는 백기의 위상이 더 커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정치적 모함을 하고, 조나라에서 온 세객 소대의 참소로 진소양왕은 백기를 멀리한다. 또한 진소양왕의 출전명령을 백기는 병을 핑계로 거부하자, 귀양을 보내고 결국 자결을 명하여 생을 마감하게 된다.

 

사마천 사기에서 장평대전의 기록을 살펴보면

 

2 四十五年(사십오년),伐韓之野王(벌한지야왕)。野王降秦(야왕강진),上黨道絕(상당도절)。其守馮亭與民謀曰(기수풍정여민모왈):「鄭道已絕(정도이절),韓必不可得為民(한필부가득위민)。秦兵日進(진병일진),韓不能應(한부능응),不如以上黨歸趙(부여이상당귀조)。趙若受我(조약수아),秦怒(진노),必攻趙(필공조)。趙被兵(조피병),必親韓(필친한)。韓趙為一(한조위일),則可以當秦(칙가이당진)。」因使人報趙(인사인보조)。趙孝成王與平陽君(조효성왕여평양군)、平原君計之(평원군계지)。平陽君曰(평양군왈):「不如勿受(부여물수)。受之(수지),禍大於所得(화대어소득)。」平原君曰(평원군왈):「無故得一郡(무고득일군),受之便(수지편)。」趙受之(조수지),因封馮亭為華陽君(인봉풍정위화양군)。

 

45, 한나라의 야왕을 공격하였다. 야왕이 진나라에 항복하자, 상당으로 가는 길이 끊겼다. 그 수비대장 풍정이 백성들과 상의하여 말하였다: '정나라로 가는 길이 이미 끊겼으니, 한나라는 백성들을 지킬 수 없다. 진나라 군대가 날마다 진격해 오는데, 한나라는 대응할 수 없다. 차라리 상당을 조나라에 넘기는 것이 낫다. 조나라가 우리를 받아들이면, 진나라가 분노하여 반드시 조나라를 공격할 것이다. 조나라가 공격을 받으면, 반드시 한나라와 친해질 것이다. 한나라와 조나라가 하나가 되면, 진나라에 대항할 수 있다.' 이에 사람을 보내어 조나라에 알렸다. 조나라 효성왕이 평양군과 평원군과 함께 이를 논의하였다. 평양군이 말하였다: '받지 않는 것이 낫다. 받으면, 얻는 것보다 재앙이 더 클 것이다.' 평원군이 말하였다: '이유 없이 하나의 군을 얻는 것이니, 받는 것이 좋다.' 조나라는 이를 받아들였고, 풍정을 화양군으로 봉하였다.

 

4  四十七年(사십칠년),秦使左庶長王龁攻韓(진사좌서장왕흘공한),取上黨(취상당)。上黨民走趙(상당민주조)。趙軍長平(조군장평),以按據上黨民(이안거상당민)。四月(사월),龁因攻趙(흘인공조)。趙使廉頗將(조사렴파장)。趙軍士卒犯秦斥兵(조군사졸범진척병),秦斥兵斬趙裨將茄(진척병참조비장가)。

六月(륙월),陷趙軍(함조군),取二鄣四尉(취이장사위)。七月(칠월),趙軍筑壘壁而守之(조군축루벽이수지)。秦又攻其壘(진우공기루),取二尉(취이위),敗其陣(패기진),奪西壘壁(탈서루벽)。廉頗堅壁以待秦(렴파견벽이대진),秦數挑戰(진수도전),趙兵不出(조병부출)。趙王數以為讓(조왕수이위양)。

而秦相應侯又使人行千金於趙為反閒(이진상응후우사인행천김어조위반한),曰(왈):「秦之所惡(진지소악),獨畏馬服子趙括將耳(독외마복자조괄장이),廉頗易與(렴파역여),且降矣(차강의)。」趙王既怒廉頗軍多失亡(조왕기노렴파군다실망),軍數敗(군수패),又反堅壁不敢戰(우반견벽부감전),而又聞秦反閒之言(이우문진반한지언),因使趙括代廉頗將以擊秦(인사조괄대렴파장이격진)。

秦聞馬服子將(진문마복자장),乃陰使武安君白起為上將軍(내음사무안군백기위상장군)。而王龁為尉裨將(이왕흘위위비장),令軍中有敢泄武安君將者斬(령군중유감설무안군장자참)。趙括至(조괄지),則出兵擊秦軍(칙출병격진군)。秦軍詳敗而走(진군상패이주),張二奇兵以劫之(장이기병이겁지)。趙軍逐勝(조군축승),追造秦壁(추조진벽)。壁堅拒不得入(벽견거부득입),而秦奇兵二萬五千人絕趙軍後(이진기병이만오천인절조군후),又一軍五千騎絕趙壁閒(우일군오천기절조벽한).

趙軍分而為二(조군분이위이),糧道絕(량도절)。而秦出輕兵擊之(이진출경병격지)。趙戰不利(조전부리),因筑壁堅守(인축벽견수),以待救至(이대구지)。秦王聞趙食道絕(진왕문조식도절),王自之河內(왕자지하내),賜民爵各一級(사민작각일급),發年十五以上悉詣長平(발년십오이상실예장평),遮絕趙救及糧食(차절조구급량식)。

 

47, 진나라가 좌서장 왕흘을 보내어 한나라를 공격하여 상당을 점령하였다. 상당의 백성들은 조나라로 도망갔다. 조나라 군대는 장평에 주둔하여 상당의 백성들을 보호하였다. 4, 왕흘이 조나라를 공격하였다. 조나라는 염파를 장군으로 보냈다. 조나라 군사들이 진나라의 척후병을 공격하였고, 진나라 척후병은 조나라의 부장 가를 참수하였다.

6, 진나라가 조나라 군대를 함락시키고, 두 개의 장벽과 네 명의 위를 점령하였다. 7, 조나라 군대는 성벽을 쌓고 방어하였다. 진나라는 다시 그 성벽을 공격하여 두 명의 위를 점령하고, 그 진영을 패배시키고 서쪽 성벽을 빼앗았다. 염파는 성벽을 굳게 지키며 진나라를 기다렸고, 진나라는 여러 번 도전하였으나 조나라 군대는 나오지 않았다. 조나라 왕은 여러 번 이를 질책하였다.

진나라 재상 응후는 사람을 보내어 천금을 주고 조나라에서 반간계를 펼치게 하였다. 그는 '진나라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마복자 조괄이 장군이 되는 것이다. 염파는 상대하기 쉬우며, 곧 항복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나라 왕은 염파의 군대가 많은 손실을 입고 여러 번 패배하였으며, 성벽을 굳게 지키며 싸우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진나라의 반간계의 말을 듣고 조괄을 염파 대신 장군으로 임명하여 진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진나라는 마복자가 장군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은밀히 무안군 백기를 상장군으로 임명하였다. 왕흘은 부장으로 임명되었고, 군대 내에서 무안군이 장군이라는 사실을 누설하는 자는 참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조괄이 도착하자, 군대를 출동시켜 진나라 군대를 공격하였다. 진나라 군대는 패배한 척하며 도망갔고, 두 개의 기병대를 배치하여 조나라 군대를 기습하였다. 조나라 군대는 승리를 쫓아 진나라 성벽에 도달하였다. 성벽은 견고하여 들어갈 수 없었고, 진나라의 기병 2 5천 명이 조나라 군대의 후방을 차단하였으며, 또 다른 5천 명의 기병이 조나라 성벽 사이를 차단하였다.

조나라 군대는 둘로 나뉘었고, 보급로가 끊겼다. 진나라는 경병을 출동시켜 공격하였다. 조나라 군대는 불리하게 싸웠고, 성벽을 쌓고 굳게 지키며 구원을 기다렸다. 진나라 왕은 조나라의 보급로가 끊겼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하내로 가서 백성들에게 각기 한 등급씩 작위를 주고, 15세 이상의 모든 사람을 장평으로 보내어 조나라의 구원과 식량을 차단하였다."

 

5  至九月(지구월),趙卒不得食四十六日(조졸부득식사십륙일),皆內陰相殺食(개내음상살식)。來攻秦壘(래공진루),欲出(욕출)。為四隊(위사대),四五復之(사오복지),不能出(부능출)。其將軍趙括出銳卒自搏戰(기장군조괄출예졸자박전),秦軍射殺趙括(진군사살조괄)。括軍敗(괄군패),卒四十萬人降武安君(졸사십만인강무안군)。武安君計曰(무안군계왈):「前秦已拔上黨(전진이발상당),上黨民不樂秦而歸趙(상당민부악위진이귀조)。趙卒反覆(조졸반복)。非盡殺之(비진살지),恐亂(공위란)。」乃挾詐而盡殺之(내협사이진갱살지),遺其小者二百四十人歸趙(유기소자이백사십인귀조)。前後斬首虜四十五萬人(전후참수로사십오만인)。趙人大震(조인대진)。

 

9월에 이르러, 조나라 군대는 46일 동안 식량을 얻지 못해, 모두 몰래 서로를 죽여 먹었다. 진나라 진지를 공격하여 나가려고 했으나, 네 개의 부대로 나누어 여러 번 시도했지만 나갈 수 없었다. 그 장군 조괄이 정예 병사를 이끌고 직접 싸웠으나, 진나라 군대가 조괄을 쏘아 죽였다. 조괄의 군대는 패배하고, 40만 명의 병사가 무안군에게 항복했다. 무안군은 '이전에 진나라가 이미 상당을 점령했으나, 상당의 백성들은 진나라를 좋아하지 않아 조나라로 돌아갔다. 조나라 군대는 배반할 것이다. 모두 죽이지 않으면, 반란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계산하여, 속임수를 써서 모두 구덩이에 묻어 죽이고, 어린이 240명을 남겨 조나라로 돌려보냈다. 전후로 45만 명의 목을 베고 포로로 잡았다. 조나라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2. 전국시대 종결자_ 왕전

 

왕전은 진나라 장군으로 빈양(頻陽) 동향(東鄕)사람이다. 생몰연대가 알려져 있지 않으며 최종 직위는 대장군으로 진시황에 의해 무성군으로 봉호를 받고,550여 년의 춘추전국시대를 전투로 종결시킨 명장이다. 진나라 명장 백기가 힘을 빼놓은 6국을 왕전은 그의 아들 왕분과 함께 조나라(BC 228), 위나라(BC 225) 초나라 (BC 223) 연나라(BC 222) 그리고 제나라(BC 221)를 차례차례로 멸망시키며 戰國(전국)의 통일을 이루는 정복전쟁을 끝내게 된다.

 

왕전이 치른 주요 전투를 살펴보자면 BC 229(진시황 18) 1년여 동안년여동안 조나라 정형(지금의 허베이성) 땅을 공격한다. 그러나 조나라 수비 수성의 달인 이목과 사마상에게 막혀 고전을 겪게 되다.전황인 일진일퇴의 답보상태에 놓이니 진나라는 이간계를 쓴다. 조나라 명장 염파를 몰아내었던 계략과 닮아있다. 망해가는 나라의 혼군(昏君)과 사리사욕에 어두운 간신(姦臣)의 계락에 조나라 정치는 놀아나게 된다.조나라의 마지막 간신 곽개는 참소하여 명장 이목을 죽게 만들고, 충신 사마상을 해임한다. 충신과 명장이 사라진 조나라 군대는 오합지졸과 같아 결국 BC 228년 왕전이 조나라 동양(東陽)을 모두 평정하고 결국 조나라를 멸망시킨다.

 

그 이듬해(BC227) 연태자 단()이 진시황 암살 계획이 실패하자 진나라는 왕전으로 하여금 군대를 출전시켜 역수(易水)에서 연나라 군대를 격파한다. BC 226 연 태자 단이 이끄는 군대를 물리치고 도읍 개성을 점령하자 연왕은 요동으로 달아나고 BC 223년 연왕 희가 왕전의 아들 왕분에게 잡혀 결국 연나라가 망한다.

 

왕전이 승전보를 써내려 가던 중 잠시 실각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진시황이 당시 떠오르는 신예 장수 이신(李信)과 왕전의 경쟁구도를 만들며 하나의 문제를 제시한다. 국 초나라를 정벌하는데 필요한 병력을 물을 때 왕전은 60, 이신은 20만 명만 있으면 된다는 서로 엇갈린 주장을 하게 되자.진시황은 이신의 의견을 들어 이신 몽염을 장군으로 삼아 초나라를 공격하게 한다.이에 왕전은 칭병(稱病)하며 귀향을 하며 지낸다.

 

이신이 초나라와의 전쟁에서 작은 승리에 취해 전술이 부족한 상태로 초나라와 접전을 벌이다 대파당하자,진시황은 왕전을 다시 불러들인다. 뛰어난 명장이며 지략가인 왕전은 선대 장군들의 말로를 익히 보아왔던 터라 진시황의 경계와 의심을 누그러트릴 심산으로 봉지를 내려줄 것을 청원한다. 함곡을 나와 초나라에 이르기 전까지 지속적으로 땅을 하사해줄 것을 요청하자, 진시황은 왕전의 행동에서  의심하지  않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왕전의 처세술로 왕전 본인뿐만 아니라 그의 후대까지 녹봉과 지위가 보장되게 된다.

 

이후 그의 아들 왕분이 초나라를 공격해 초패왕 항우의 조부 항연을 죽이고 초왕 부추를 사로잡아 초나라는 멸망하고 BC221년 왕분은 제나라를 공격해 점령하고 전국(戰國)의 통일을 이루어낸다. 참으로 길고 긴 전쟁의 역사가 끝나게 되는 것이다.

 

사마천이 왕전에 대한 평가는 박하다 기본적으로 병가(즉 병법을 익힌 전국시대 장수)들에 대한 평가는 박하다. 인륜적 관점에서 사람을 죽인다는 것 특히나 전쟁에서 대규모로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옳지 않다는 의견을 보이고 있다. 많은 법가 상앙, 이사, 한비자의 죽음, 그리고 백기, 염파, 한신 등 전국(戰國)의 시대 상황에서 국가를 위해 그들의 군주를 위해 혼신을 다해 싸웠으나 그들의 말로는 토사구팽이었던 것이다.

 

10 秦始皇既滅三晉(진시황기멸삼진),走燕王(주연왕),而數破荊師(이수파형사)。秦將李信者(진장리신자),年少壯勇(년소장용),嘗以兵數千逐燕太子丹至於衍水中(상이병수천축연태자단지어연수중),卒破得丹(졸파득단),始皇以為賢勇(시황이위현용)。於是始皇問李信(어시시황문리신):「吾欲攻取荊(오욕공취형),於將軍度用幾何人而足(어장군도용기하인이족)?」李信曰(리신왈):「不過用二十萬人(부과용이십만인)。」始皇問王翦(시황문왕전),王翦曰(왕전왈):「非六十萬人不可(비륙십만인부가)。」始皇曰(시황왈):「王將軍老矣(왕장군로의),何怯也(하겁야)!李將軍果勢壯勇(리장군과세장용),其言是也(기언시야)。」遂使李信及蒙恬將二十萬南伐荊(수사리신급몽념장이십만남벌형)。

王翦言不用(왕전언부용),因謝病(인사병),歸老於頻陽(귀로어빈양)。李信攻平與(리신공평여),蒙恬攻寢(몽념공침),大破荊軍(대파형군)。信又攻鄢郢(신우공언영),破之(파지),於是引兵而西(어시인병이서),與蒙恬會城父(여몽념회성부)。荊人因隨之(형인인수지),三日三夜不頓舍(삼일삼야부돈사),大破李信軍(대파리신군),入兩壁(입량벽),殺七都尉(살칠도위),秦軍走(진군주)

 

진시황이 이미 삼진을 멸망시키고, 연왕을 쫓아내며, 여러 번 초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진나라 장수 이신은 젊고 용맹하여, 병사 수천 명을 이끌고 연나라 태자 단을 연수까지 추격하여 마침내 단을 잡았다. 진시황은 그를 현명하고 용감하다고 여겼다. 이에 진시황이 이신에게 물었다: '내가 초나라를 공격하고자 하는데, 장군의 생각으로는 몇 명의 병사가 필요하겠는가?' 이신이 대답했다: '20만 명이면 충분합니다.' 진시황이 왕전에게 물었더니, 왕전이 말했다: '60만 명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진시황이 말했다: '왕 장군은 나이가 많아졌구려, 어찌 그리 겁이 많은가! 이 장군은 정말로 용맹하니 그의 말이 맞다.' 그래서 이신과 몽염에게 20만 명을 이끌고 남쪽으로 초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왕전의 말을 듣지 않자, 왕전은 병을 핑계로 물러나 빈양에서 노년을 보냈다. 이신은 평여를 공격하고, 몽염은 침을 공격하여 초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했다. 이신은 다시 언영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서쪽으로 군대를 이끌고 몽염과 성부에서 합류했다. 초나라 사람들은 이를 따라 3 3야를 쉬지 않고 진군하여 이신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고, 두 진지를 점령하여 7명의 도위를 죽이고 진나라 군대를 패주 시켰다

 

11  始皇聞之,大怒,自馳如頻陽,見謝王翦曰:「寡人以不用將軍計,李信果辱秦軍。今11 聞荊兵日進而西(금문형병일진이서),將軍雖病(장군수병),獨忍棄寡人乎(독인기과인호)!」王翦謝曰(왕전사왈):「老臣罷病悖亂(로신파병패란),唯大王更擇賢將(유대왕경택현장)。」始皇謝曰(시황사왈):「已矣(이의),將軍勿復言(장군물복언)!」王翦曰(왕전왈):「大王必不得已用臣(대왕필부득이용신),非六十萬人不可(비륙십만인부가)。」始皇曰(시황왈):「為聽將軍計耳(위청장군계이)。」

於是王翦將兵六十萬人(어시왕전장병륙십만인),始皇自送至灞上(시황자송지파상)。王翦行(왕전행),請美田宅園池甚眾(청미전댁원지심중)。始皇曰(시황왈):「將軍行矣(장군행의),何憂貧乎(하우빈호)?」王翦曰(왕전왈):「為大王將(위대왕장),有功終不得封侯(유공종부득봉후),故及大王之向臣(고급대왕지향신),臣亦及時以請園池為子孫業耳(신역급시이청원지위자손업이)。」始皇大笑(시황대소)。王翦既至關(왕전기지관),使使還請善田者五輩(사사환청선전자오배)。或曰(혹왈):「將軍之乞貸(장군지걸대),亦已甚矣(역이심의)。」王翦曰(왕전왈):「不然(부연)。夫秦王怚而不信人(부진왕저이부신인)。今空秦國甲士而專委於我(금공진국갑사이전위어아),我不多請田宅為子孫業以自堅(아부다청전댁위자손업이자견),顧令秦王坐而疑我邪(고령진왕좌이의아사)?」

 

진시황이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직접 빈양으로 달려가 왕전을 만나 말했다: '내가 장군의 계책을 쓰지 않아, 이신이 진나라 군대를 모욕하게 되었다. 지금 초나라 군대가 날마다 서쪽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장군이 비록 병이 들었지만, 어찌 나를 버릴 수 있겠는가!' 왕전이 사양하며 말했다: '늙은 신하가 병들어 혼란스럽습니다. 오직 대왕께서 더 현명한 장수를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진시황이 사과하며 말했다: '그만두시오, 장군은 더 이상 말하지 마시오!' 왕전이 말했다: '대왕께서 부득이하게 저를 쓰셔야 한다면, 60만 명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진시황이 말했다: '장군의 계책을 따르겠소.'

그래서 왕전은 60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진시황은 직접 그를 파상까지 배웅했다. 왕전이 출발하면서 많은 좋은 전답과 정원을 요청했다. 진시황이 말했다: '장군이 출발하는데, 어찌 가난을 걱정하시오?' 왕전이 말했다: '대왕을 위해 장군이 되어, 공을 세워도 끝내 후작에 봉해지지 못할까 두려워, 대왕께서 저를 향해 주시는 기회를 이용해 자손을 위한 전답과 정원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진시황이 크게 웃었다. 왕전이 관문에 도착하자, 사자를 보내어 좋은 전답을 다섯 번 더 요청했다. 어떤 이가 말했다: '장군의 요청이 너무 지나친 것 아닙니까?' 왕전이 말했다: '그렇지 않소. 진왕은 의심이 많고 사람을 믿지 않소. 지금 진나라의 갑옷과 병사를 모두 비우고 나에게 맡겼는데, 내가 자손을 위한 전답과 정원을 많이 요청하지 않으면, 진왕이 앉아서 나를 의심하지 않겠소?

 

12 王翦果代李信擊荊(왕전과대리신격형)。荊聞王翦益軍而來(형문왕전익군이래),乃悉國中兵以拒秦(내실국중병이거진)。王翦至(왕전지),堅壁而守之(견벽이수지),不肯戰(부긍전)。荊兵數出挑戰(형병수출도전),終不出(종부출)。王翦日休士洗沐(왕전일휴사세목),而善飲食撫循之(이선음식무순지),親與士卒同食(친여사졸동식)。

久之(구지),王翦使人問軍中戲乎(왕전사인문군중희호)?對曰(대왈):「方投石超距(방투석초거)。」於是王翦曰(어시왕전왈):「士卒可用矣(사졸가용의)。」荊數挑戰而秦不出(형수도전이진부출),乃引而東(내인이동)。翦因舉兵追之(전인거병추지),令壯士擊(령장사격),大破荊軍(대파형군)。至蘄南(지기남),殺其將軍項燕(살기장군항연),荊兵遂敗走(형병수패주)。秦因乘勝略定荊地城邑(진인승승략정형지성읍)。歲餘(세여),虜荊王負芻(로형왕부추),竟平荊地為郡縣(경평형지위군현)。因南征百越之君(인남정백월지군)。而王翦子王賁(이왕전자왕분),與李信破定燕(여리신파정연)、齊地(제지)。

 

왕전이 과연 이신을 대신하여 초나라를 공격했다. 초나라가 왕전이 군대를 증강하여 오는 것을 듣고, 나라의 모든 병력을 모아 진나라를 막았다. 왕전이 도착하여, 성벽을 굳게 지키며 싸우지 않았다. 초나라 군대가 여러 번 도전했으나, 끝내 나오지 않았다. 왕전은 날마다 병사들을 쉬게 하고 목욕을 시키며, 좋은 음식으로 위로하고, 직접 병사들과 함께 식사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왕전이 사람을 보내 군중에서 놀이를 하는지 물었다. 대답하기를 '돌을 던져 거리를 재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왕전이 말했다: '병사들을 사용할 수 있겠구나.' 초나라 군대가 여러 번 도전했으나 진나라가 나오지 않자, 동쪽으로 물러났다. 왕전은 군대를 이끌고 추격하여, 장사들을 시켜 공격하게 하여 초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했다. 기남에 이르러, 그 장군 항연을 죽이고, 초나라 군대는 패주 했다.진나라는 승세를 타고 초나라의 성읍을 점령했다. 1년 남짓 지나, 초나라 왕 부추를 사로잡아, 마침내 초나라 땅을 평정하여 군현으로 삼았다. 이어서 남쪽으로 백월의 군주를 정벌했다. 왕전의 아들 왕분과 이신은 연나라와 제 나라 땅을 평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