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사대(四大)명장 기전파목(起翦頗牧)
전쟁은 인류 역사가 쓰여진 이래 전쟁은 어느 시대에나 있어 왔다. 미국의 역사학자 윌 듀란트는 인류 역사가 쓰여진 3500여년 동안 전쟁이 없던 시기는 270년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즉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인류 최초의 전쟁은 BC 1275년 이집트와 히타이트간의 카데시 전투이며 최초 전차사용의 기록이 벽화를 통해 나와있다. 이 전차 바퀴의 전파가 인도의 차크라로, 중국에서는 최초황제 헌원(軒轅)에 잘 드러나 있다.
전쟁사에서 동서양 최초의 전쟁은 동서양 문명의 충돌 전쟁인 그리스와 페르시아 간의 전쟁이다. 고대 그리스 도시 연합국과 페르시아 제국 간의 전쟁(BC 499 ~ 449 )으로 주요 전투로는 마라톤 평원에서 일어난 마라톤 전투, 영화 300으로 유명한 테르모필레 전투, 그리고 페르시아의 쇠락의 길로 이끈 살라미스 해전이다. 이후 그리스의 승리는 그리스 민주주의 문명의 꽃을 피우며 서양 고대문명의 출발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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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백과
이후 서양의 전국시대를 알리는 전쟁이 바로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 ~ 404)이다. 아테네 주도의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주요 전투는 아르키다모스 전투 시켈리아(현재 데켈레이아 전투등이다. 결과는 아테네가 패권을 잃게 된다. 이는 그리스 황금시대의 종식을 말하지만 그리스가 창조한 예술 철학 과학 정치의 눈부신 발전상은 서구 유럽으로 전파되어 로마제국의 기틀이 된다.
이 전쟁의 시대 문명의 충돌의 시대는 동서양의 철학이 동시에 꽃을 피우는 시대였기도 하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그리스 철학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공자 노자 묵자 장자 순자로 이어지는 제자백가의 시대도 바로 이때이다. BC 500여 년부터 300여년까지의 철학이 동시에 꽃피는 시기이자 바로 전쟁의 시대였던 것이다.
중국의 전국시대( BC403 ~ 221) 180여 년 동안 수많은 전쟁이 발발하였다. 마찬가지로 페르시아 전쟁부터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이르는 기간 동안 수많은 전투가 있어 왔다. 전쟁의 규모와 의미 그리고 인명의 살상에 있어서 서양의 전쟁은 동양의 전쟁에 비길 수 없다. 역사학자가 기록한 페르시아 전쟁에서 두 제국 간의 통일이 일어나지도 않았고 죽어간 인명의 숫자도 미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국시대 가장 유명한 장평전투 하나만으로도 40만 명이생매장당한 기록이 있는데 페르시아 전투는 1만여 명의 전사자 기록이 남아있다. 중국의 역사가 다소간 과장의 기록은 있을 수 있다 하여도 전쟁의 규모는 중국 전국시대 훨씬 더 큰 것으로 기록에 남아있다.
대한민국의 4대 보컬이 김나박이가 있듯이 전국시대 4대 명장(기전파목:起翦頗牧)이 있다. 진나라를 통일로 이끈 백기와 왕전, 그리고 조나라의 염파 이목이다. 이들 중 백기(白起)는 진(秦)나라를 전국 통일의 길로 이끈 가장 유명한 장평 전투를 승리로 이끈 공신이고, 다음은 전국통일의 마무리를 이끌어낸 왕전(王翦)이다. 그리고 소국 조나라에서 시대와 군주를 잘못 만난 염파, 수성(守城)의 달인 이목(李牧)이다.
1. 노익장의 대명사_ 염파(簾頗)
전국시대 들어오며 조(趙)나라 조 무령왕(武靈王: BC 340 ~ 295)은 호복기사(胡服騎士)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군제 혁신의 결과로 영토와 국력이 확장되며 잠시나마 중원의 패권국으로 올라서게 된다. 조 무령왕에서 그의 아들 혜문왕이 당시 어느 나라도 조나라와 싸워 이긴 나라가 없다. 두 왕을 도와 나라를 이끈 유명한 인물로는 평원군 조승 , 명재상 인상여, 명장 조사와 염파가 등이 있다. 조 혜문왕 (BC283) 당시 재상 인상여가 내치와 외교를 명장 염파가 국방을 담당하여 어느 누구도 심지어 강국 진(秦) 나라조차 조나라를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대장군 염파의 기록은 열전보다 세가에 보다 더 자세히 나와 있다. 젊은 시절부터 조 혜문왕 16년(BC 283년) 염파가 조나라 장수가 되어 강대국 진(秦) 나라를 공격해 석양(昔陽)을 빼앗고, 혜문왕 20년(BC 279) 제나라를 공격했으며, 23년(BC 276) 위나라 기(幾)를 공격해 점령하고, 혜문왕 24년(BC 275) 염파는 군대를 이끌고 위나라 방자(房子)를 빼앗은 다음 성을 쌓고 다시 안양(安陽)을 공격해 점령하였다. 이렇듯 명장 염파는 조나라에서 커다란 전공을 세우며 조나라의 위세를 주변국에게 떨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익히 아는 역사의 흐름 속에 성장을 거듭한 반면 조나라의 전성기는 서서히 내리막을 타고 있었다. 북쪽의 흉노는 호시탐탐 조나라 국경을 침략하였고, 주위 위 제 초과 강대국 진나라와는 끊임없이 크고 작은 전쟁에 국력은 날로 쇠락한다. 게다가 조나라의 전성기를 이끌던 명재상 인상여, 조사와 같은 인재가 세상을 떠나고 조 효성왕시 이론에만 밝고 실전에 약했던 조괄의 중용, 도양왕의 간신 곽개의 국정혼란으로 조나라는 자멸의 길로 걸어간 것이다.
역사적 사례를 비추어 보면 성군(聖君) 아래의 신하들은 현신이 발탁되거나 평범한 신하들도 기대이상의 성과를 낸다. 용군(庸君:보통의 군주)과 현신(賢臣)과 명장(名將)이 만나면 충분히 나라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있다. 혼군(昏君:어리석은 군주)과 현신 명장(名將)의 만남은 그 사이에 간신(奸臣)이 끼어들어 이간질시키며 정적인 현신과 명장을 밀어내게 하거나 심지어 죽음으로 내몰게 한다.
조(趙) 도양왕이 바로 그러한 케이스이다. 효성왕 21년(BC 243년) 염파가 장군이 되어 위나라의 번양(繁陽)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이 당시효성왕이 죽고 도양왕이 즉위하여 악승(樂乘)을 보내 염파를 대신하게 하자 염파는 불복하고 악승을 공격했다. 악승은 싸움에서 지고 도망쳤으며, 염파는 위나라로 망명했다망명했다. 염파와
이후 진(秦) 나라의 침공에 속수무책으로 깨어지며 병사를 잃고 영토를 빼앗기며 결국은 멸망의 길로 들어가는 것이다. 조나라 사십만 대군이 장평에서 생매장당한 역사의 기록에서 혼군(昏君)의 실정과 실전을 모르는 필부 조괄의 만용을 그리고 가장 치명적인 간신 곽개의 행태를 살펴볼 수 있다.
장평전투
장평전투는 진나라가 중국 통일을 수행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싸움이었다. 조 효성왕은 70대 노장(老將) 염파로 하여금 진나라의 파상공세를 막게 한다. 진나라의 군세와 지형 판세를 읽은 염파는 진의 대군을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수비를 굳히고 진나라의 보급로를 유린하며 수성을 성공적으로 이끈다.
염파가 수성하고 있는 장평을 전투로 점령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임을 깨닫고 진(秦) 나라는 조나라 조정에 뇌물을 쓰고 이간계를 펼치며 말하길 “ 진나라가 오직 두려워하는 것은 마복군 조사의 아들 조괄이 대장군이 되어 진나라와 맞서는 것입니다”라는 유언비어를 퍼트려서 결국 염파를 물러나게 하고 조괄을 대장군으로 임명해진(秦)의 대군과 맞서 성을 나아가 싸우게 한다.
허세에 쩔은 조괄이 자신의 병법 이론에 밝은 것만 믿고 진(秦)의 명장 백기의 유인책에 휘말려45만 중 생매장의 참패를 당한다. 조괄 본인도 죽임을 당하고 조나라는 이 전쟁을 계기로 국력이 날로 약화되며 패망의 길로 들어선다.
사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後四年(후사년),趙惠文王卒(조혜문왕졸),子孝成王立(자효성왕립)。七年(칠년),秦與趙兵相距長平(진여조병상거장평),時趙奢已死(시조사이사),而藺相如病甐(이린상여병린),趙使廉頗將攻秦(조사렴파장공진),秦數敗趙軍(진수패조군),趙軍固壁不戰(조군고벽부전)。秦數挑戰(진수도전),廉頗不肯(렴파부긍)。趙王信秦之閒(조왕신진지한)。秦之閒言曰(진지한언왈):「秦之所惡(진지소악),獨畏馬服君趙奢之子趙括為將耳(독외마복군조사지자조괄위장이)。」趙王因以括為將(조왕인이괄위장),代廉頗(대렴파)。藺相如曰(린상여왈):「王以名使括(왕이명사괄),若膠柱而鼓瑟耳(약교주이고슬이)。括徒能讀其父書傳(괄도능독기부서전),不知合變也(부지합변야)。」趙王不聽(조왕부청),遂將之(수장지)。
4년 후, 조혜문왕이 죽고 그의 아들 효성왕이 즉위하였다. 7년 후, 진나라와 조나라 군대가 장평에서 대치하였다. 이때 조사는 이미 죽었고, 인상여는 병으로 누워 있었다. 조나라는 염파를 보내어 진나라를 공격하게 하였으나, 진나라는 여러 번 조나라 군대를 패배시켰고, 조나라 군대는 성벽을 굳게 지키며 싸우지 않았다. 진나라는 여러 번 도전하였으나, 염파는 응하지 않았다. 조왕은 진나라의 간계를 믿었다. 진나라의 간자가 말하길, "진나라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마복군 조섭의 아들 조괄이 장군이 되는 것뿐이다." 조왕은 이에 조괄을 장군으로 임명하여 염파를 대신하게 하였다. 인상여는 말하길, "왕께서 이름만 보고 조괄을 임명하셨으니, 이는 마치 기둥에 거문고를 붙여 연주하는 것과 같습니다. 조괄은 그저 아버지의 책을 읽을 줄만 알지, 실제 상황에 맞게 변통할 줄 모릅니다." 조왕은 이를 듣지 않고, 결국 조괄을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趙括自少時學兵法(조괄자소시학병법),言兵事(언병사),以天下莫能當(이천하막능당)。嘗與其父奢言兵事(상여기부사언병사),奢不能難(사부능난),然不謂善(연부위선)。括母問奢其故(괄모문사기고),奢曰(사왈):「兵(병),死地也(사지야),而括易言之(이괄역언지)。使趙不將括即已(사조부장괄즉이),若必將之(약필장지),破趙軍者必括也(파조군자필괄야)。」及括將行(급괄장행),其母上書言於王曰(기모상서언어왕왈):「括不可使將(괄부가사장)。」王曰(왕왈):「何以(하이)?」對曰(대왈):「始妾事其父(시첩사기부),時為將(시위장),身所奉飯飲而進食者以十數(신소봉반음이진식자이십수),所友者以百數(소우자이백수),大王及宗室所賞賜者盡以予軍吏士大夫(대왕급종실소상사자진이여군리사대부),受命之日(수명지일),不問家事(부문가사)。今括一旦為將(금괄일단위장),東向而朝(동향이조),軍吏無敢仰視之者(군리무감앙시지자),王所賜金帛(왕소사김백),歸藏於家(귀장어가),而日視便利田宅可買者買之(이일시편리전댁가매자매지)。王以為何如其父(왕이위하여기부)?父子異心(부자이심),願王勿遣(원왕물견)。」王曰(왕왈):「母置之(모치지),吾已決矣(오이결의)。」括母因曰(괄모인왈):「王終遣之(왕종견지),即有如不稱(즉유여부칭),妾得無隨坐乎(첩득무수좌호)?」王許諾(왕허낙)。
조괄은 어릴 때부터 병법을 배워 병사에 대해 말하기를 천하에 당할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한 번은 그의 아버지 조섭과 병사에 대해 이야기하였는데, 조섭은 반박할 수 없었으나 이를 좋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조괄의 어머니가 그 이유를 묻자, 조섭은 말하길, "병사는 죽음의 땅인데, 조괄은 이를 쉽게 말합니다. 조나라가 조괄을 장군으로 삼지 않으면 다행이지만, 만약 반드시 장군으로 삼는다면 조나라 군대를 패배시킬 자는 반드시 조괄일 것입니다." 조괄이 출정할 때, 그의 어머니는 왕에게 글을 올려 말하길, "조괄을 장군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왕이 물었습니다. "왜 그러는가?" 대답하길, "처음 제가 그의 아버지를 섬길 때, 그가 장군이 되어 몸소 밥과 음식을 챙겨주는 자가 열 명이 넘었고, 친구가 백 명이 넘었습니다. 대왕과 종실이 상을 내리면 모두 군관과 사대부에게 주었고, 명령을 받은 날에는 집안일을 묻지 않았습니다. 이제 조괄이 장군이 되자, 동쪽을 향해 조회하며 군관들이 감히 그를 쳐다보지 못하고, 왕이 내린 금과 비단을 집에 가져다 두며, 날마다 편리한 전택을 사들였습니다. 왕께서는 그가 그의 아버지와 같다고 생각하십니까? 부자지간의 마음이 다르니, 왕께서는 그를 보내지 마십시오." 왕이 말하길, "어머니는 그만두시오, 나는 이미 결정하였소." 조괄의 어머니가 말하길, "왕께서 끝내 그를 보내신다면, 만약 저의 아들 조괄이 그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연좌하지 말아 주십시오"왕은 이를 허락하였습니다.
趙括既代廉頗(조괄기대렴파),悉更約束(실경약속),易置軍吏(역치군리)。秦將白起聞之(진장백기문지),縱奇兵(종기병),詳敗走(상패주),而絕其糧道(이절기량도),分斷其軍為二(분단기군위이),士卒離心(사졸리심)。四十餘日(사십여일),軍餓(군아),趙括出銳卒自博戰(조괄출예졸자박전),秦軍射殺趙括(진군사살조괄)。括軍敗(괄군패),數十萬之眾遂降秦(수십만지중수강진),秦悉阬之(진실갱지)。趙前後所亡凡四十五萬(조전후소망범사십오만)。明年(명년),秦兵遂圍邯鄲(진병수위감단),歲餘(세여),幾不得脫(기부득탈)。賴楚(뢰초)、魏諸侯來救(위제후래구),乃得解邯鄲之圍(내득해감단지위)。趙王亦以括母先言(조왕역이괄모선언),竟不誅也(경부주야)。
조괄이 염파를 대신하여 장군이 되자, 모든 약속을 변경하고 군관을 교체하였다. 진나라 장군 백기가 이를 듣고 기병을 풀어 패배하는 척하며 도망가고, 그들의 식량 도로를 끊고 군대를 둘로 나누어 병사들의 마음을 분열시켰다. 40여 일 동안 군대가 굶주리자, 조괄은 정예 병사를 이끌고 나가 싸웠으나, 진나라 군대가 조괄을 쏘아 죽였다. 조괄의 군대는 패배하였고, 수십만 명이 진나라에 항복하였으나, 진나라는 모두를 구덩이에 묻었다. 조나라가 전후로 잃은 병력은 총 45만 명이었다. 다음 해, 진나라 군대가 한단을 포위하였고, 1년이 넘도록 거의 탈출하지 못하였다. 초나라와 위나라 제후들이 와서 구해주어 한단의 포위를 풀 수 있었다. 조왕은 조괄의 어머니의 말을 들어 결국 처벌하지 않았다.
수성(守城)의 달인_이목
이목( ? ~ BC228)의 본명은 이촬(李繓)이고 자가 목(牧)이며 진나라 백기 왕전이 공격과 공성(攻城)의 달인이라면 이목은 방어 수성(守城)의 달인이다. 중국사를 통틀어 가장 저평가된 장수이기도 하다. 이 당시 조나라는 북쪽의 흉노의 끊임없는 침략으로 시달렸고 서쪽은 대국 진(秦)나라의 침탈에 시달리며 위나라 연나라 제나라에 둘러싸여 크고 작은 분쟁에 휘말리는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목은 조나라 북부 변경 대(代) 안문(雁門) 일대에 주둔하며 흉노의 침입에 대비하며 흉노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목이 부임하며 변방의 군제를 재편하고 지역에서 거둔 세금으로 군사들의 경비로 충당하고, 날마다 소를 잡아 군사들을 먹이고 말타기, 활쏘기 훈련을 시켰다. 그리고 수시로 정찰병을 보내 흉노의 동태를 살피게 하였다.
이목이 부임하며 강조한 규율이 두 가지인데,그 하나가 방어와 수성을 강조한 명령을 다음과 같이 하달했다. “ 흉노가 쳐들어오면 성을 지키기만 하라.흉노를 잡겠다고 나서는 자는 참수하겠다.” 그 두 번째가 흉노가 쳐들어 올 때는 모든 백성과 군사는 즉시 성안으로 대피하라는 명령이었다.
이를 통해 흉노로 인한 침략이 있어도 수년 동안 변경의 백성들의 피해는 전무하였고 부수적으로 흉노는 이목을 가볍게 여기는 우를 범하게 만들었다. 비단 흉노뿐만 아니라 부하들 사이에서도 겁쟁이라는 평가가 돌고 이러한 소문이 조나라 수도 한단의 조정에까지 알려지게 된다. 조왕이 사람을 보내 이목을 질책했지만 이목은 생각을 바꾸지 않고 방어와 수성에만 전념하였다. 그러자 조왕은 이목을 파직시키고 다른 장수를 부임시켰다. 이목의 후임으로 들어온 장수가 성은 나아가 흉노와 싸울 때마다 패배를 당하고 사상자가 늘자, 결국 조왕은 이목의 진가를 알게 되고 다시 장군으로 임명한다.
이때 이목은 병을 핑계되며 출사를 하지 않자, 왕이 강경한 태도로 이목에게 군대를 이끌 것을 명한다. 그러자 이목은 전권을 자신에게 위임하라는 조건을 걸고 북방으로 복귀한다. 이목이 복귀하자 조나라의 북쪽 국경은 다시 회복하고 군사력을 수년 동안 길러낸다. 자연스레 군수품과 병사들이 풍족해지자 이목은 드디어 칼을 뽑아 흉노를 치러 간다. 전차 삼백 대 군마 만 삼천,용사 오만, 궁사 십만을 뽑아 훈련에 돌입하고 전쟁의 준비를 갖춘다. 이때 이목을 겁쟁이라 여긴 흉노가 국경을 넘어 공격해 오자 거짓으로 맞서 싸우다가 지는 척하며 물러난다. 이 소식을 들은 흉노의 수장 선우(單于)가 대군을 이끌고 들어오자 이목음 기이한 전법으로 좌우에서 협공하여 흉노의 기병 십여 만 명을 죽이고, 담람을 멸망시키고 동호족격파하며 임호를 굴복시키게 된다.전력의 대부분을 잃은 흉노는 그 후10여 년 동안 조나라 국경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된다.
이목의 최후
조 도양양왕 원년(BC 244) 대장군 염파가 위나라로 망명을 하자 진(秦)의 동진은 다시 시작되며 조나라와의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이어나간다. 진나라 군대가 무수지역에서 조나라 10만 대군을 참살하자 조 도양왕은 이목을 대장군으로 제수하고 진나라를 막게 한다.이에 이목은 의안(宜安)에서 진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진 나라 장군 환의를 몰아낸다. 3년 뒤 진나라 군대가 번오(番吾)를 공격하자 이목이 다시 또 진나라 군대를 대파하며 조국 조나라를 지켜낸다.
세월이 흘러 조나라는 왕이 천(遷)으로 바뀌고 7년(BC 229), 진(秦) 나라는 명장 왕전을 보내 조나라를 공격한다. 이에 이목과 사마상은 왕전의 공격으로부터 조나라를 지켜낸다. 이에 진나라는 이간계를 펼치게 되는데 돈을 밝히는 조나라의 중신이자 간신 곽개에게 뇌물을 주어 충신 이목과 사마상이 반역을 꾀한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리게하여 그들을그들을 파직시키려하나 이목이 듣지않자 자객을 보내 이목을 죽이고 사마상을 파직시킨다.이간계를 성공시킨 왕전은 조나라를 맹렬하게 공격하여 BC222년 조나라를 멸망시킨다. 결국 혼군(昏君) 천(遷)의 어리석음과 간신 곽개의 헛된 사리사욕으로 인해 조나라는 멸망이라는 길을 간 것이다.
李牧至(리목지),如故約(여고약)。匈奴數歲無所得(흉노수세무소득)。終以為怯(종이위겁)。邊士日得賞賜而不用(변사일득상사이부용),皆願一戰(개원일전)。於是乃具選車得千三百乘(어시내구선차득천삼백승),選騎得萬三千匹(선기득만삼천필),百金之士五萬人(백김지사오만인),彀者十萬人(구자십만인),悉勒習戰(실륵습전)。大縱畜牧(대종축목),人民滿野(인민만야)。匈奴小入(흉노소입),詳北不勝(상북부승),以數千人委之(이수천인위지)。單于聞之(단우문지),大率眾來入(대솔중래입)。李牧多為奇陳(리목다위기진),張左右翼擊之(장좌우익격지),大破殺匈奴十餘萬騎(대파살흉노십여만기)。滅襜襤(멸첨람),破東胡(파동호),降林胡(강림호),單于奔走(단우분주)。其後十餘歲(기후십여세),匈奴不敢近趙邊城(흉노부감근조변성)。
이목이 도착하여, 예전과 같은 방법으로 하였다. 흉노는 몇 년 동안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결국 그들을 겁쟁이로 여겼다. 변방의 병사들은 매일 상을 받았으나 사용하지 않고, 모두 한 번 싸우기를 원했다. 이에 이목은 1,300대의 전차와 13,000마리의 말을 선택하고, 백금의 병사 5만 명과 활을 쏘는 자 10만 명을 모아 전투 훈련을 시켰다. 대규모로 목축을 하여, 사람들이 들판에 가득 찼다. 흉노가 소규모로 침입하자, 북쪽에서 이기지 못하는 척하며 몇 천 명을 버렸다. 선우가 이를 듣고, 대규모로 군대를 이끌고 들어왔다. 이목은 여러 기묘한 진을 만들어 좌우 날개를 펼쳐 공격하여, 흉노의 기병 10만 명 이상을 대파하고 죽였다. 첨람을 멸망시키고, 동호를 격파하며, 임호를 항복시켰다. 선우는 도망쳤다. 그 후 10여 년 동안 흉노는 감히 조나라의 변방에 가까이 오지 못했다.
26 趙王遷七年(조왕천칠년),秦使王翦攻趙(진사왕전공조),趙使李牧(조사리목)、司馬尚御之(사마상어지)。秦多與趙王寵臣郭開金(진다여조왕총신곽개김),為反閒(위반한),言李牧(언리목)、司馬尚欲反(사마상욕반)。趙王乃使趙蔥及齊將顏聚代李牧(조왕내사조총급제장안취대리목)。李牧不受命(리목부수명),趙使人微捕得李牧(조사인미포득리목),斬之(참지)。廢司馬尚(폐사마상)。後三月(후삼월),王翦因急擊趙(왕전인급격조),大破殺趙蔥(대파살조총),虜趙王遷及其將顏聚(로조왕천급기장안취),遂滅趙(수멸조)。
조왕 천 7년에 진나라가 왕전을 보내 조나라를 공격하였다. 조나라는 이목과 사마상을 보내 이를 막았다. 진나라는 조왕의 총신 곽개에게 많은 금을 주어 반간계를 꾸미게 하였고, 이목과 사마상이 반역을 꾀한다고 말하게 하였다. 조왕은 이에 조총과 제나라 장수 안취를 보내 이목을 대신하게 하였다. 이목이 명령을 받지 않자, 조나라가 사람을 보내 이목을 몰래 잡아 처형하였다. 사마상도 폐위되었다. 세 달 후, 왕전이 조나라를 급습하여 조총을 크게 격파하고 죽였으며, 조왕 천과 그의 장수 안취를 사로잡아 조나라를 멸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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