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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사기

장의열전 _천하를 움직인 세치 혀

 

 

장의(張儀, ? ~ BC309)는 전국 시대 위나라 출신으로 진(秦)나라의 정치가이며 외교가이다. 소진과 함께 귀곡선생 문하에서 유세의 기술을 수련하였다. 같은 종횡가 소진은 6국의 재상이 되어 합종을 펼치고 장의는 진(秦)나라에 등용되어 연횡책을 펼치게 된다. 사마천이 사기에는 소진과 장의 열전이 실려 있으며 여타 열전들보다 몇 배에 이르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만큼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또한 사마천의 작가적 상상력이 들어 있는 장이기도 하다. 후대 역사가들은 사마천의 사기를 역사서로 인정하지 못하는 요소를 담고 있는 장이기도 하다.

 

중국 전국시대에는 대국 진(秦)나라와 열국( , , , , , ) 6개나라가 생존을 위한 전쟁을 200여 년간 지속하였다. 천하 통일의 뜻은 각기 있었을 것이나 그중 진()만이 중국 통일의 염원이 강력하였다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백가의 많은 변설가들이 있었을 것이라 미루어 짐작된다. 춘추의 전통을 이어받아 유가학파는 각국에 존재하였을 것이고 법가, 병가, 묵가, 도가, 그리고 종횡가들이 각국을 돌아다니며 유세하였다.

 

이들 중 빼어난 병가와 법가 종횡가들이 혼란한 전국시대에 각국 제후들의 부름을 받고 임용되었다. 특히 종횡가들은 자신의 영달을 위해, 때로는 천하 쟁패를 위해서 각종 전략을 왕들에게 유세한 것이다. 어찌보면 종횡가는 전국시대 뛰어난 외교관의 역할과 같은 것이다. 유향(劉向)의 전국책이 전국 7웅의 역사책이지만 종횡가들의 실무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수 많은 전쟁의 역사에서 병법가들은 전쟁터에서 종횡가들은 모략(謀略) 전술에서 군주를 설득하고 전략을 세우며 전국(戰國)의 상황에 합종연횡을 하였다.

 

6국의 왕들에게 유세를 할 때 천하 패권을 차지하려는 왕에게 군도(君道)와 왕도(王道)의 예를 들어 유세를 하면 채택되지 아니하고 중용받지 못한다. 진나라 초나라 제나라에서의 유세는 각기 그 나라의 처해진 상황과 제후의 역량에 알맞게 유세를 이어가야만 채용이 되는 것이다. 소진은 열국 6개 나라에 맞는 합종연합으로 유세를 하여 중용되었으며 장의는 대국 진(秦)나라에 맞는 유세를 하여 중용된 것이다. 

 

소진과 장의의 스승 귀곡자(鬼谷子)는 종횡(縱橫之術)을 집대성하고 후학을 육성한다. 이에 걸출한 후학이 바로 소진과 장의인 것이다. 종횡의 실질적인 뜻은 각자 처한 상황을 분별하고 이해관계로 얽혀있는 주체들의 심리를 파악하여 우호적인 말을 하여 서로 간의 뜻을 소통시키는 것이다. 뜻을 소통시키려면 유세 대상자에게 음과 양의 조화를 잘 이루는 말과 열고 닫으며 시작하고 마치는 패합()의 술법을 활용해 전략 전술을 쓰는 것이다. 설득의 기술이다.

 

고대 그리스에도 같은 고민을 하던 철학자가 있었다. 청중을 어떻게 하면 잘 설득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한 설득의 기술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설득의 수단으로 로고스(메시지의 논리구성의 치밀함) 에토스(유세자의 인격과 공신력) 파토스(청중의 정서와 감정의 이해와 공감) 말하고 있다. 이 세 가지는 연설을 구성하는 세가지 요소가 적절하게 이루어져야만 설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귀곡자와 별반 다르지 않지만 글의 논리에서는 보다 치밀한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아리스토 텔레스의 설득의 기술과 마찬가지로 귀곡자의 종횡지술또한 동양 최초의 인간 심리학 책인 것이다.

 

아리스토 텔레스의 설득의 기술과 귀곡자의 종횡지술의 출발점은 서로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의 대화에서 출발한 대중과 청중을 설득하는 기술이고, 귀곡자의 종횡지술은 전국칠웅이 천하를 두고 패권을 다투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 다르다. 즉 종횡가들은 설득의 예술과 권모술수를 같이 습득한 것이 다른 부분이다.

 

전국시대 변설 가들 즉 종횡가들은 유세에 목숨을 걸었다. 이치와 논리에 합당하여도 유세하려는 군주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채택되지 않았고, 그 결과가 유세에 맞지 않아도 벌을 받거나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전국시대의 유세가들의 삶을 배워 익힌 한비자군주 설득의 어려움을 난언(難言)이라는 편명에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그 명문장(名文章)을 잠시 들여다보자면

신이 말하기 어려운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말이 순조롭고 유창하며, 화려하고 매끄러우면, 사람들은 이를 화려하지만 실속이 없다고 여깁니다. 말이 정중하고 두터우며, 굳세고 신중하며 완전하면, 사람들은 이를 거칠고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말이 많고 번잡하며, 여러 가지를 비교하고 비유하면, 사람들은 이를 허황되고 쓸모없다고 여깁니다.

 

간단하고 요약된 말을 하며, 직설적이고 꾸밈이 없으면, 사람들은 이를 무뚝뚝하고 변변치 않다고 여깁니다. 급하고 친근하게 사람의 마음을 탐구하면, 사람들은 이를 참소하고 양보하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넓고 광범위하며, 깊고 측량할 수 없는 말을 하면, 사람들은 이를 과장되고 쓸모없다고 여깁니다. 가정의 작은 이야기를 하며, 구체적인 말을 하면, 사람들은 이를 천박하다고 여깁니다.

 

현재의 일을 말하며, 말이 거스르지 않으면, 사람들은 이를 목숨을 아끼고 윗사람에게 아첨한다고 여깁니다. 세속을 벗어난 말을 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기이한 행동을 하면, 사람들은 이를 허황되다고 여깁니다. 재빠르고 민첩하게 변론하며, 문채가 풍부하면, 사람들은 이를 역사적이라고 여깁니다. 문학을 버리고 진실한 말을 하면, 사람들은 이를 비루하다고 여깁니다. 때로는 시와 서를 칭송하며, 옛 법도를 말하면, 사람들은 이를 암송한다고 여깁니다.

 

이것이 신이 말하기 어려운 이유이며, 큰 걱정입니다.

 

 

오설상재(吾舌在)- 혀만 무사하다면    

징혜왕과 장의

 

장의가 공부를 마치고 제후들에게 유세하러 떠나 초나라에 이르러 초나라 재상과 술을 마시게 된다. 이때 재상의 집에서 옥 구슬을 잃어버리니 재상의 수하들이 장의를 의심하며 추궁한다.

門下意張儀(문하의장의),曰(왈):「儀貧無行(의빈무행),必此盜相君之璧(필차도상군지벽)。」共執張儀(공집장의),掠笞數百(략태수백),不服(부복),醳之(역지)。其妻曰(기처왈):「嘻(희)!子毋讀書游說(자무독서유설),安得此辱乎(안득차욕호)?」張儀謂其妻曰(장의위기처왈):「視吾舌在不(시오설상재부)?」其妻笑曰(기처소왈):「舌在也(설재야)。」儀曰(의왈):「足矣(족의)。」

 

재상의 문하 사람들이 장의를 의심하며 말하기를, "장의는 가난하고 행실이 좋지 않으니, 틀림없이 재상의 옥을 훔쳤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모두가 장의를 붙잡아 수백 번 매질하였으나, 장의는 끝내 자백하지 않았고, 결국 풀어주었다. 그의 아내가 말하기를, "! 당신이 글을 읽고 유세하지 않았더라면 어찌 이런 수모를 겪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장의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내 혀가 아직 남아 있는가?"라고 하자, 그의 아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혀는 남아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장의가 말하기를, "그것으로 충분하다."라고 하였다. 이는 훗날 장의가 진나라의 재상이 되어 초나라를 침략하는 계기가 된다.

 

장의와 소진의 관계

 

사마천이 소진과 장의의 관계를 관중과 포숙의 관계로 각색한 부분이 장의 열전에 나온다. 소진이 조나라왕의 후원을 받아 각국을 합종에 끌어들이려 할 당시 소진은 진나라가 다른 나라를 공격하여 자신이 계획이 망쳐질까 두려워했다. 이에 소진은 장의를 진(秦)나라로 들여보내 고자 모략을 꾸며 은밀히 장의를 자극하여 자신에게 청을 하도록 사람을 보낸다. 찾아온 장의를 박대(薄待)하며 음식을 대접할 때 당(堂)아래에 머슴들과 같이 밥을 먹도록 모욕을 준다. 이에 장의는 진나라로 들어가 소진이 재상으로 있는 장의를 곤경에 처하게 하고자 한다.

 

소진은 장의가 떠나자 그의 사인(舍人)으로 하여금 그의 후원자가 되게 한다. ”장의는 유능한 인재이고 진(秦)나라에서 권력을 잡을 수 있는 자이다. 하지만 가난하여 진혜왕을 알현할 기회가 없었다.나는 그가 작은 이익에 안주하지 않고 큰 뜻을 이루도록 일부러 모욕을 준 것이다. 그대는 나를 대신해서 그를 몰래 후원하도록 하라”라고 말하며 조왕을 알현하고 돈과 말을 내고 사람을 시켜 장의를 따라가게 한 다음 몰래 후원하게 하였다.

 

마침내 진혜문군(훗날 혜왕)을 만나 유세하자 혜문군은 그를 객경으로 삼고 그와 함께 제후를 공격하는 논의에 들어간다. 소진이 부여한 임무를 마친 사인이 떠나며 장의를 후원한 사람이 소진인 것을 알려 주게 된다. 이에 소진의 참뜻을 알게 된 장의는 진(秦)나라로 하여금 조(趙)나라를 칠 계획을 접게 된다.그러며 말하길 소진 그대가 살아있는 한 나 장의가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 또한 내 어찌 그대에게 맞서겠는가?라고 말하며 소진이 조나라 상국으로 있는 기간 동안에 침략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 장의는 조나라 대신 예전 유세객 시절 자신을 매질하였던 초나라 재상에게 편지를 다음과 같이 써 보내었다. “ 지난날 그대와 술을 마실 때 나는 옥구슬을 훔치지 않았소 그러나 그대는 나를 믿지 않고 모질게 고문하였으니, 그대 나라를 잘 지키시오 나는 성을 빼앗을 테니.”

 

5  蘇秦之舍人乃辭去(소진지사인내사거)。張儀曰(장의왈):「賴子得顯(뢰자득현),方且報德(방차보덕),何故去也(하고거야)?」舍人曰(사인왈):「臣非知君(신비지군),知君乃蘇君(지군내소군)。蘇君憂秦伐趙敗從約(소군우진벌조패종약),以為非君莫能得秦柄(이위비군막능득진병),故感怒君(고감노군),使臣陰奉給君資(사신음봉급군자),盡蘇君之計謀(진소군지계모)。今君已用(금군이용),請歸報(청귀보)。」張儀曰(장의왈):「嗟乎(차호),此在吾術中而不悟(차재오술중이부오),吾不及蘇君明矣(오부급소군명의)!吾又新用(오우신용),安能謀趙乎(안능모조호)?為吾謝蘇君(위오사소군),蘇君之時(소군지시),儀何敢言(의하감언)。且蘇君在(차소군재),儀寧渠能乎(의녕거능호)!」張儀既相秦(장의기상진),為文檄告楚相曰(위문격고초상왈):「始吾從若飲(시오종약음),我不盜而璧(아부도이벽),若笞我(약태아)。若善守汝國(약선수여국),我顧且盜而城(아고차도이성)!」

 

소진의 식객이 떠나려 하였다. 장의가 말하기를, "그대 덕분에 내가 드러나게 되었으니, 이제 은혜를 갚으려 하는데, 왜 떠나려 하는가?"라고 하였다. 식객이 말하기를, "저는 당신을 아는 것이 아니라, 소진을 아는 것입니다. 소진은 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하여 동맹이 깨질까 걱정하여, 당신이 아니면 진나라의 권력을 얻을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은혜를 베풀어 저를 보내어 당신을 도와주게 하였고, 소진의 계책을 다 따르게 하였습니다. 이제 당신이 이미 등용되었으니, 돌아가서 보고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장의가 말하기를, "! 이것이 내 계책 안에 있었으나 깨닫지 못했으니, 내가 소진만 못하는구나!나는 이제 막 등용되었으니, 어찌 조나라를 도모할 수 있겠는가? 소진에게 사과해 주게. 소진이 있을 때, 내가 어찌 감히 말할 수 있었겠는가? 또한 소진이 있는데, 내가 어찌 능히 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하였다. 장의가 진나라의 재상이 된 후, 글을 써서 초나라 재상에게 고하기를, "처음에 내가 그대와 함께 술을 마셨을 때, 나는 옥을 훔치지 않았으나, 그대는 나를 매질하였다. 그대가 나라를 잘 지키면, 나는 돌아서서 성을 훔칠 것이다!"라고 하였다.

 

 

 

 

연횡의 시작_위왕에게 유세하다

 

전국시대 형세도를 보면 열국 위나라는 강국 제나라와 진나라 그리고 초나라에 낀 새우과 같은 나라였다. 오죽하였으면 위 양혜왕 당시 제나라와 두 번이나 큰 전투를 치르며 국력이 약화되었던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진(秦)나라와 잦은 분쟁으로 영토를 지속적으로 할양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당시 양혜왕의 아들이 전장에서 죽기도 하였다. 오죽 하였으면 양혜왕이 맹자에게 노구에 천리를 멀다 하지 않으시고 와주셨으니 장차 우리나라에 어떠한 이익을 가져다주시겠습니까?라는 첫마디를 던지고 맹자는 고담준론(高談峻論)의 인의(仁義)만 있다고 말한 것이다. 이 말이 바로 전국시대 유가(儒家)의 주장이 국가경영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이다.

 

양혜왕이 죽고 양왕이 뒤를 이은 위나라의 괴로움은 오히려 더해 간다. 제나라 진나라로부터 더 잦은 침략으로 국력은 쇠약해져 가는 과정에서 진나라에서 재상으로 있던 장의가 진나라 재상자리를 버리고 위나라로 와 유세하며 재상이 된다. 그러나 장의는 위나라의 재상이긴 하나 위나라의 외교 정책 방향을 진(秦)나라를 위해 군주를 설득하는 것이다. 이는 위나라를 위하는 척하며 진나라에 더 이익이 되는 정책을 펴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으로 미루어 보자면 미국이 잘되는 것을 위해 한국 기업의 자산을 미국에 투자하게 만들고 국내의 상시 고용 양질의 일자리는 없애는 것과 같은 매국행위인 것이다. 또한 소국이며 대국 제나라에 대항하게 만들어 제나라와의 싸움을 부추기게 하는 정책을 펴는 것은 한반도 주변의 대국 중국과 러시아의 심기를 건드리고 그들의 이익과 안보를 침해하는 정책을 펴고 있는 것도 바로 강대국 미국의 눈치를 보며 정책을 펴는 것과 같은 모습인 것이다. 장의는 위나라의 토착외구인 것이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장의는 위나라가 진을 섬기도록 만들어서 다른 제후들도 따르도록 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위나라로 갔지만 위의 혜왕은 쉽게 그에게 넘어가지 않았다. 이러한 장의의 움직임 이후 소진은 6국에 흉노까지 합종시켜 천하연합군으로 진을 공격했지만 진은 이 많은 무리를 격파한다. 초는 위나 한만큼 합종에 적극적이지 않았고, 제는 끝까지 자리를 지켰으나 삼진(한, 위, 조)의 군대는 다 달아났기 때문이다. 서로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6국 연합은 진에 의해 깨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산동 국가들의 모래알 같은 결집력이 드러난 후 장의는 진을 위해 연횡으로 유세했다. 이전의 혜왕은 넘어가지 않았지만 즉위하자마자 합종의 허약함을 느낀 양왕은 상대하기가 수월했다. 장의는 위 양왕에게 위나라의 땅이 방어에 불리하기 때문에 연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부모자식 간에도 이익이 있으면 다투는데 동상이몽의 산동 나라들과 속임수를 쓰는 소진의 계략을 믿을 수 없다고 하며 특유의 직설적인 화법을 사용한다. 이어서 그는 진을 섬기지 않으면 위가 가장 먼저 멸망할 것이라는 협박에 가까운 대안을 제시했다. 합종의 허약함을 알고 있던 위 양왕은 장의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하외(河外)의 땅을 바치기로 했다.

 

 

10 秦惠王十年(진혜왕십년),使公子華與張儀圍蒲陽(사공자화여장의위포양),降之(강지)。儀因言秦復與魏(의인언진복여위),而使公子繇質於魏(이사공자요질어위)。儀因說魏王曰(의인설위왕왈):「秦王之遇魏甚厚(진왕지우위심후),魏不可以無禮(위부가이무례)。」魏因入上郡(위인입상군)、少梁(소량),謝秦惠王(사진혜왕)。惠王乃以張儀為相(혜왕내이장의위상),更名少梁曰夏陽(경명소량왈하양)。

 

진 혜왕 10년에, 공자 화와 장의를 보내 포양을 포위하여 항복시켰다. 장의는 진나라가 다시 위나라와 화친하도록 말하고, 공자 요를 위나라에 볼모로 보냈다. 장의는 위왕에게 말하기를, "진왕이 위나라를 매우 후하게 대하니, 위나라가 예의를 갖추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위나라는 상군과 소량을 진나라에 바치고, 진 혜왕에게 사죄하였다. 혜왕은 장의를 재상으로 삼고, 소량의 이름을 하양으로 바꾸었다.

 

 

12 其後二年(기후이년),使與齊(사여제)、楚之相會齧桑(초지상회설상)。東還而免相(동환이면상),相魏以為秦(상위이위진),欲令魏先事秦而諸侯效之(욕령위선사진이제후효지)。魏王不肯聽儀(위왕부긍청의)。秦王怒(진왕노),伐取魏之曲沃(벌취위지곡옥)、平周(평주),復陰厚張儀益甚(복음후장의익심)。張儀慚(장의참),無以歸報(무이귀보)。留魏四歲而魏襄王卒(류위사세이위양왕졸),哀王立(애왕립)。張儀復說哀王(장의복설애왕),哀王不聽(애왕부청)。於是張儀陰令秦伐魏(어시장의음령진벌위)。魏與秦戰(위여진전),敗(패)

 

그 후 2년이 지나, 제나라와 초나라가 협력하여 연회를 열었다. 동쪽으로 돌아와 재상에서 물러나고, 진나라를 위해 위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위나라가 진나라를 먼저 섬기게 하여 제후들이 이를 따르게 하려 하였다. 위나라 왕이 이를 듣지 않자, 진나라 왕이 화를 내며 위나라의 곡옥과 평주를 공격하여 빼앗았다. 다시 장의를 두텁게 대우하였다. 장의는 부끄러워하며 돌아갈 방법이 없었다. 위나라에 4년을 머물렀고, 위나라 양왕이 죽고 내왕이 즉위하였다. 장의가 다시 애왕을 설득하였으나, 애왕은 듣지 않았다. 이에 장의는 몰래 진나라에게 위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위나라와 진나라가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明年(명년),齊又來敗魏於觀津(제우래패위어관진)。秦復欲攻魏(진복욕공위),先敗韓申差軍(선패한신차군),斬首八萬(참수팔만),諸侯震恐(제후진공)。而張儀復說魏王曰(이장의복설위왕왈):「魏地方不至千里(위지방부지천리),卒不過三十萬(졸부과삼십만)。地四平(지사평),諸侯四通輻湊(제후사통복주),無名山大川之限(무명산대천지한)。從鄭至梁二百餘里(종정지량이백여리),車馳人走(차치인주),不待力而至(부대력이지)。梁南與楚境(량남여초경),西與韓境(서여한경),北與趙境(북여조경),東與齊境(동여제경),卒戍四方(졸수사방),守亭鄣者不下十萬(수정장자부하십만)。梁之地勢(량지지세),固戰場也(고전장야)。梁南與楚而不與齊(량남여초이부여제),則齊攻其東(칙제공기동);東與齊而不與趙(동여제이부여조),則趙攻其北(칙조공기북);不合於韓(부합어한),則韓攻其西(칙한공기서);不親於楚(부친어초),則楚攻其南(칙초공기남):此所謂四分五裂之道也(차소위사분오렬지도야)。

 

다음 해에 제나라가 다시 와서 위나라를 관진에서 패배시켰다. 진나라는 다시 위나라를 공격하려 했고, 먼저 한나라의 신차 군대를 패배시키고, 8만 명의 목을 베었다. 제후들이 두려워 떨었다. 장의가 다시 위나라 왕에게 말하길, '위나라의 땅은 천 리에 이르지 않고, 군사는 30만을 넘지 않습니다. 땅은 평평하고, 제후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유명한 산과 큰 강의 경계가 없습니다. 정나라에서 양나라까지 200여 리로, 수레가 달리고 사람이 걸어도 힘들이지 않고 도착할 수 있습니다. 양나라 남쪽은 초나라와 경계를 맞대고, 서쪽은 한나라와, 북쪽은 조나라와, 동쪽은 제나라와 경계를 맞댑니다. 군사들이 사방을 지키고, 정자와 방어시설을 지키는 자가 10만 명이 넘습니다. 양나라의 지세는 본래 전쟁터입니다. 양나라 남쪽이 초나라와 친하고 제나라와 친하지 않으면, 제나라가 동쪽을 공격할 것입니다. 동쪽이 제나라와 친하고 조나라와 친하지 않으면, 조나라가 북쪽을 공격할 것입니다. 한나라와 합하지 않으면, 한나라가 서쪽을 공격할 것입니다. 초나라와 친하지 않으면, 초나라가 남쪽을 공격할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사분오열의 도입니다.

 

강국 초나라를 적대시하라는 장의의 유세

 

17 차부진지소욕약자막여초(且夫秦之所欲弱者莫如楚),이능약초자막여량(而能弱楚者莫如梁)。초수유부대지명이실공허(楚雖有富大之名而實空虛);기졸수다(其卒雖多),연이경주역북(然而輕走易北),부능견전(不能堅戰)。실량지병남면이벌초(悉梁之兵南面而伐楚),승지필의(勝之必矣)。할초이익량(割楚而益梁),휴초이적진(虧楚而適秦),가화안국(嫁禍安國),차선사야(此善事也)。대왕부청신(大王不聽臣),진하갑사이동벌(秦下甲士而東伐),수욕사진(雖欲事秦),부가득의(不可得矣)。

 

또한 진나라가 약하게 만들고자 하는 나라는 초나라만큼 없으며, 초나라를 약하게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양나라만큼 없습니다. 초나라는 비록 부유하고 크다는 명성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공허합니다. 군사들이 많지만, 쉽게 도망가고 북쪽으로 달아나기 쉬우며, 견고하게 싸울 수 없습니다. 양나라의 군사들을 남쪽으로 보내 초나라를 공격하면,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초나라를 분할하여 양나라를 이롭게 하고, 초나라를 약화시켜 진나라에 유리하게 만드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대왕께서 제 말을 듣지 않으면, 진나라가 병사를 내려 동쪽을 공격할 것이며, 비록 진나라를 섬기고자 해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유세로 합종을 깨트리다.

 

19  신문지(臣聞之),적우침주(積羽沈舟),군경절축(群輕折軸),중구삭김(眾口鑠金),적훼소골(積毀銷骨),고원대왕심정계의(故願大王審定計議),차사해골피위(且賜骸骨辟魏)。

 

애왕어시내배종약이인의청성어진(哀王於是乃倍從約而因儀請成於秦)。장의귀(張儀歸),복상진(復相秦)。삼세이위복배진위종(三歲而魏復背秦為從)。진공위(秦攻魏),취곡옥(取曲沃)。명년(明年),위복사진(魏復事秦)。

 

신이 듣기로는, 깃털이 쌓이면 배를 가라앉히고, 가벼운 것들이 모이면 수레의 축을 부러뜨리며, 많은 입이 금을 녹이고, 쌓인 비방이 뼈를 녹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대왕께서 신중하게 계획을 세우시고, 저는 휴가를 얻어 위나라를 떠나고자 합니다.

 

위 애왕은 이에 동맹을 배반하고 장의를 통해 진나라와 화친을 청하였다. 장의는 돌아와 다시 진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3년 후 위나라는 다시 진나라를 배반하고 동맹을 맺었다. 진나라는 위나라를 공격하여 곡옥을 빼앗았다. 다음 해에 위나라는 다시 진나라를 섬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