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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사기

2 이사(李斯)_ 법치 국가 시스템의 완성자

 

이사(李斯, BC 284 ~ BC 208) 중국 초나라 상채에서 말단 관리를 지냈고, 뒷간과 창고의 쥐들의 행동패턴을 보며 깨달은 바가 있어 순자의 문하에 들어가 제왕학을 배우게 된다. 사마천에 기록된 이사의 초기 모습은 매우 영민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통찰이 뛰어난 것을 있다. 순자가 처음 언급한 청출어람청어람(靑出於藍靑於藍: 파란색은 남색에서 나오지만 남색보다 푸르다) 고사성어는 순자와 이사의 관계를 두고 한말이 아닐까 본다. 이사는 순자의 사상을 배우고 체화(體化)하여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 내며현실 정치에 접목해 꿈을 실현하여 통일 진 제국의 재상 된다.

 

이사의 기록은 순자의 의병(議兵)편에 나온다. 전국시대 중기를 지나면서 중국은 정복(征服) 전쟁으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였다.진나라와 관련 있는 유명한 전투는 장수 감무가 한나라 수도 의양을 점령한 의양전투, 위나라 40만 병사가 생매장당한 장평대전(진과 위나라), 초나라 수도 언땅을 정복한 언영전투,릉군이 병부를 훔쳐 조나라를 도와준 한단전투, 춘신군 황헐이 진나라를 함곡관까지 밀어부친 3 함곡관 전투 등이 있다. 공자에서부터 시작된 인의(仁義) 유가 사상은 순자에 이르러 예법(禮法)으로 발전하며 한비자는 법가 철학을 완성하고  이사는 이를 바탕으로 법치국가를  완성해 간다.

 

순자 의병편에 나온 순자와 이사의 대화중 인의로 정치를 해야한다는 순자와 事理(사리) 따라 일을 편리하게 해야 한다는이사의 주장이다. 공자의 인의에서 발전하여 예와 법을 기반으로 한 통치는 철이 지나고  낡은 이념이라 생각한 이사는  순자가 주장한 예법중 法(법) 부분을 가져다 자신의 국가경영의 기본을 삼은 것이다. 진(秦) 나라가 강성했던 이유는 상앙이 실시한 변법 세상이 변하면 새로운 국가 운영시스템 법을 이용한 통치술에 있었다는 것을 간파한 글이다.  

 

李斯問孫卿子曰(리사문손경자왈):秦四世有勝(진사세유승),兵海內(병강해내),威行諸侯(위행제후),非以仁義之也(비이인의위지야),以便從事而已(이편종사이이)

 

이사(李斯) 순경자(孫卿子)에게 물었다: “()나라는 세대( 효공, 효문왕, 혜왕, 소왕) 걸쳐 승리하였고, 병력이 강하여 천하를 제압하고, 위세가 제후들에게 미쳤습니다. 이는 인의(仁義) 것이 아니라, 일의 이치에 따라 편리하게 처리했기 때문입니다.”

 

孫卿子曰(손경자왈):非汝所知也(비여소지야)!汝所謂便者(여소위편자),不便之便也(부편지편야);吾所謂仁義者(오소위인의자),大便之便也(대편지편야)。彼仁義者(피인의자),所以脩政者也(소이수정자야);政脩則民親其上(정수칙민친기상),樂其君(악기군),而輕之死(이경위지사)。故曰(고왈):凡在於軍(범재어군),將率末事也(장솔말사야)。秦四世有勝(진사세유승),諰諰然常恐天下之一合而軋己也(시시연상공천하지일합이알기야),此所謂末世之兵(차소위말세지병),未有本統也(미유본통야)。故湯之放桀也(고탕지방걸야),非其逐之鳴條之時也(비기축지명조지시야);武王之誅紂也(무왕지주주야),非以甲子之朝而後勝之也(비이갑자지조이후승지야),皆前行素脩(개전행소수야),所謂仁義之兵也(소위인의지병야)。今女不求之於本(금녀부구지어본),而索之於末(이색지어말),此世之所以亂也(차세지소이란야)

 

손경자가 말하였다: “그것은 네가 있는 바가 아니다! 네가 말하는 편리함은 진정한 편리함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인의(仁義) 가장 편리함이다. 인의란 정치를 수양하는 것이다. 정치를 수양하면 백성들이 윗사람을 친근하게 여기고, 군주를 즐거워하며,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 그래서 말하기를, '군대에 있어 장수는 말단의 일이다.'라고 한다. 진나라가 세대에 걸쳐 승리했지만, 항상 천하가 하나로 합쳐져 자신을 압박할까 두려워했다. 이는 말단의 병사로, 본질적인 통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탕왕이 걸왕을 쫓아낸 것은 명조에서의 전투 때문이 아니었고, 무왕이 주왕을 처단한 것도 갑자년의 아침 이후에 승리한 것이 아니었다. 모두 이전부터 정치를 수양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인의의 병사이다. 지금 너는 본질에서 구하지 않고 말단에서 찾으니, 이것이 세상이 혼란스러운 이유이다.

 

이사의 성정이 드러난 편이 전해진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상의 영민함, 현상의 이면들 들여다보는 통찰력이다. 그리고 이사는 출세욕과 권력욕이 강한 성정을 지니었다. 전국(戰國) 혼탁한 시대는 비천한 신분에서 벗어나고 평민이 출세할 있는 기회라 여기고 그의 스승 순자에게 ()나라로 떠날 것이라 말한다.

 

李斯者(리사자),楚上蔡人也(초상채인야)。年少時(년소시)郡小吏(위군소리),見吏舍廁中鼠食不絜(견리사측중서식부혈),近人犬(근인견),數驚恐之(수경공지)。斯入倉(사입창),觀倉中鼠(관창중서),食積粟(식적속),居大廡之下(거대무지하),不見人犬之憂(부견인견지우)。於是李斯乃嘆曰(어시리사내탄왈):「人之賢不肖譬如鼠矣(인지현부초비여서의),在所自處耳(재소자처이)!」

 

이사(李斯) 초나라 상채(上蔡) 사람이다. 젊었을 군의 작은 관리로 일하면서, 관리 숙소 화장실에서 먹이를 찾는 쥐가 더럽고 사람과 개가 가까이 가면 자주 놀라고 두려워하는 것을 보았다. 이사는 창고에 들어가 창고 쥐를 보니, 쌓인 곡식을 먹고 창고 아래에서 지내며 사람과 개의 걱정을 전혀 하지 않았다. 이에 이사는 탄식하며 말했다. 사람의 현명함과 어리석음은 쥐와 같아서, 자신이 처한 환경에 달려 있다!”

 

乃從荀卿學帝王之術。學已成,度楚王不足事,而六國皆弱,無可建功者,欲西入秦。辭於荀卿曰:「斯聞得時無怠(사문득시무태),今萬乘方爭時(금만승방쟁시),游者主事(유자주사)。今秦王欲天下(금진왕욕탄천하),稱帝而治(칭제이치),此布衣馳騖之時而游說者之秋也(차포의치무지시이유설자지추야)。處卑賤之位而計不者(처비천지위이계부위자),此禽鹿視肉(차금록시육),人面而能閒行者耳(인면이능한행자이)。故詬莫大於卑賤(고구막대어비천),而悲莫甚於窮困(이비막심어궁곤)。久處卑賤之位(구처비천지위),困苦之地(곤고지지),非世而惡利(비세이악리),自託於無為(자탁어무위),此非士之情也(차비사지정야)。故斯將西說秦王矣(고사장서설진왕의)。」

 

 저는 '때를 얻으면 태만하지 말라 말을 들었습니다. 지금은 제후국들이 다투는 시기이며, 유세객들이 나라의 일을 주관하고 있습니다. 현재 진왕은 천하를 삼켜 제왕을 칭하며 다스리려 하고 있으니, 이는 평민이 내달릴 때이며 유세객들이 활약할 시기입니다. 비천한 지위에 있으면서 계책을 세우지 않는 것은 짐승이 고기를 바라보는 것과 같고, 사람의 얼굴을 하고 억지로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비천함보다 치욕은 없고, 곤궁함보다 심한 슬픔은 없습니다. 오랫동안 비천한 처지에 있고 곤궁한 처지에 있으면서 세상을 비방하고 이익을 미워해 스스로 무위에 맡기는 것은 선비의 본성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서쪽으로 가서 진왕에게 유세하려 합니다.”

 

진나라로 이사는 여불위의 사인(舍人) 된다. 여불위의 천거로 진나라 조정에 출사하여 시황제를 섬겼다. 진시황을 만난 이사는 각국의 왕족과 장군들 사이의 이간책을 실시하여 공적을 세우고, 시황으로부터 신임을 얻고 객경이 된다. 이후 한나라 간첩 정국이 진나라 국력을 소모시킬 요량으로 수로 건설을 하다 발각이 되고, 노애(嫪毐)라고 하는 타국 출신자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나라 내부에서 객경에 대한 부정적이미지가 형성된다. 이에 진나라 종실 대신들은 객경을 추방할 것을 주청하고 이를 받아들이려 하자 이사가 유명한 간축객령(諫逐客令) 상소를 올린다.

 

간축객령에는 춘추의 목공과 전국시대 효공에서 진시황에 이르기까지 많은 공을 세운 대신들은 대부분 외부의 인재에서 비롯되었음을 주장하게 된다. 주장에서 이사가 가진 역사와 지리 경제 문화적 지식의 풍부함과 시대를 바라보는 통찰을 제대로 느낄 있다. 주장의 합당함에 종실과 대신들은 말을 잊어버리고 반대를 하지 못한다. 진시황마저 그의 논리 정연한 말에 결국 넘어가며 축객령을 철회하기에 이른다.  (글의 참맛을 느끼기 위해 전문을 공유합니다.)

 

 

太山不讓土壤 河海不擇細流

태산은 한 덩이 흙도 사양하지 않고 강과 바다는 한줄기 물도 가리지 아니한다

 

https://youtu.be/ZmnORkdQvi8?si=I6sQizB6QOsrICZl

 

 

臣聞吏議逐客(신문리의축객),竊以過矣(절이위과의)。昔繆公求士(석무공구사),西取由余於戎(서취유여어융),東得百里奚於宛(동득백리해어완),迎蹇叔於宋(영건숙어송),來丕豹(래비표)、公孫支於晉(공손지어진)。此五子者(차오자자),不於秦(부산어진),而繆公用之(이무공용지),國二十(병국이십),遂霸西戎(수패서융)。孝公用商鞅之法(효공용상앙지법),移風易俗(이풍역속),民以殷盛(민이은성),國以富彊(국이부강),百姓樂用(백성악용),諸侯親服(제후친복),獲楚(획초)、魏之師(위지사),地千里(거지천리),至今治彊(지금치강)。惠王用張儀之計(혜왕용장의지계),拔三川之地(발삼천지지),西巴(서병파)、蜀(촉),北收上郡(북수상군),南取漢中(남취한중),包九夷(포구이),制鄢(제언)、郢(영),東據成皋之險(동거성고지험),割膏腴之壤(할고유지양),遂散六國之從(수산륙국지종),使之西面事秦(사지서면사진),功施到今(공시도금)。昭王得范睢(소왕득범수),廢穰侯(폐양후),逐華陽(축화양),彊公室(강공실),杜私門(두사문),蠶食諸侯(잠식제후),使秦成帝業(사진성제업)。此四君者(차사군자),皆以客之功(개이객지공)。由此觀之(유차관지),客何負於秦哉(객하부어진재)!向使四君卻客而不內(향사사군각객이부내),疏士而不用(소사이부용),是使國無富利之實而秦無彊大之名也(시사국무부리지실이진무강대지명야)

 

신은 관리들이 객경을 추방하자는 논의를 들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옛날에 목공이 인재를 구할 , 서쪽으로는 융족에서 유여를 데려오고, 동쪽으로는 완에서 백리해를 얻었으며, 송나라에서 건숙을 맞이하고, 진나라에서 비표와 공손지를 데려왔습니다. 다섯 사람은 모두 진나라 출신이 아니었지만, 목공은 그들을 등용하여 20 나라를 병합하고 서융을 제패했습니다. 효공은 상앙의 법을 사용하여 풍속을 바꾸고, 백성들은 부유해졌으며, 나라는 강성해졌습니다. 백성들은 기꺼이 법을 따랐고, 제후들은 진나라에 복종하여 초나라와 위나라의 군대를 물리치고 리의 땅을 얻어 지금까지도 강성하게 다스리고 있습니다. 혜왕은 장의의 계책을 사용하여 삼천의 땅을 빼앗고, 서쪽으로는 파와 촉을 병합하고, 북쪽으로는 상군을 수복하며, 남쪽으로는 한중을 차지하고, 구이족을 포괄하며, 언과 영을 제압하고, 동쪽으로는 성고의 험준한 지형을 차지하고, 기름진 땅을 나누어 여섯 나라의 동맹을 해체시켜 그들이 서쪽으로 진나라를 섬기게 하였습니다. 공적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소왕은 범수를 얻어 양후를 폐하고 화양을 추방하며, 공실을 강하게 하고 사문을 막아 제후들을 잠식하여 진나라가 제업을 이루게 하였습니다. 군주는 모두 객경의 공로로 이루었습니다. 이를 통해 보면, 객경이 진나라에 무슨 해를 끼쳤겠습니까? 만약 군주가 객경을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않으며, 인재를 멀리하고 등용하지 않았다면, 나라는 부유하고 이로운 실질을 얻지 못하고 진나라는 강대하다는 명성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今陛下致昆山之玉(금폐하치곤산지옥),有隨(유수)、和之寶(화지보),垂明月之珠(수명월지주),服太阿之劍(복태아지검),乘纖離之馬(승섬리지마),建翠鳳之旗(건취봉지기),樹靈鼉之鼓(수령타지고)。此數寶者(차수보자),秦不生一焉(진부생일언),而陛下說之(이폐하설지),何也(하야)?必秦國之所生然後可(필진국지소생연후가),則是夜光之璧不飾朝廷(칙시야광지벽부식조정),犀象之器不玩好(서상지기부위완호),鄭(정)、衛之女不充後宮(위지녀부충후궁),而駿良駃騠不實外廄(이준량결제부실외구),江南金錫不用(강남김석부위용),西蜀丹采(서촉단청부위채)。所以飾後宮充下陳娛心意說耳目者(소이식후궁충하진오심의설이목자),必出於秦然後可(필출어진연후가),則是宛珠之簪(칙시완주지잠),傅璣之珥(부기지이),阿縞之衣(아호지의),錦繡之飾不進於前(금수지식부진어전),而隨俗雅化佳冶窈窕趙女不立於側也(이수속아화가야요조조녀부립어측야)。夫擊甕叩缶彈箏搏髀(부격옹고부탄쟁박비),而歌呼嗚嗚快耳(이가호오오쾌이)(目(목))者(자),秦之聲也(진진지성야);鄭(정)、()、桑閒(상한)、昭()、虞()、武()、象者(상자),異國之樂也(이국지악야)。今棄擊甕叩缶而就鄭衛(금기격옹고부이취정위),退彈箏而取昭虞(퇴탄쟁이취소우),若是者何也(약시자하야)?快意當前(쾌의당전),適觀而已矣(적관이이의)。今取人則不然(금취인칙부연)。不問可否(부문가부),不論曲直(부론곡직),非秦者去(비진자거)客者逐(위객자축)。然則是所重者在乎色樂珠玉(연칙시소중자재호색악주옥),而所輕者在乎人民也(이소경자재호인민야)。此非所以跨海內制諸侯之術也(차비소이과해내제제후지술야)

 

지금 폐하께서는 곤산의 옥을 가지고 계시며, 수와 화의 보물을 소유하고, 명월의 구슬을 드리우며, 태아의 검을 차고, 섬리의 말을 타고, 취봉의 깃발을 세우고, 영타의 북을 세우고 있습니다. 여러 보물들은 진나라에서 생산된 것이 하나도 없지만, 폐하께서 좋아하십니다. 그렇습니까? 반드시 진나라에서 생산된 것만 가능하다면, 야광의 벽옥은 조정을 장식하지 못하고, 코끼리와 코뿔소의 기물은 장식품이 되지 못하며, 정나라와 위나라의 여인은 후궁을 채우지 못하고, 준마와 준마는 외양간을 채우지 못하며, 강남의 금과 주석은 사용되지 못하고, 서촉의 단청은 채색되지 못할 것입니다. 후궁을 장식하고 아래 진열을 채우며 마음을 즐겁게 하고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것은 반드시 진나라에서 나온 것이어야 한다면, 이는 완주의 비녀, 부기의 귀걸이, 아고의 , 금수의 장식이 앞에 나아가지 못하고, 풍속을 따라 아름답게 꾸민 조나라의 미녀가 곁에 서지 못할 것입니다. 항아리를 두드리고 북을 치며, 쟁을 타고 다리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는 것이 진정한 진나라의 소리입니다. 정나라와 위나라, 상간, , , , 상의 음악은 다른 나라의 음악입니다. 지금 항아리를 두드리고 북을 치는 것을 버리고 정나라와 위나라의 음악을 취하며, 쟁을 타는 것을 물리치고 소와 우의 음악을 취하는 것은 그렇습니까? 눈앞의 즐거움을 위해서일 뿐입니다. 지금 사람을 취하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옳고 그름을 묻지 않고, 진나라 사람이 아니면 물리치고, 객경을 추방합니다. 그렇다면 중시하는 것은 색과 음악, 구슬과 옥이며, 경시하는 것은 백성들입니다. 이것은 천하를 제패하고 제후들을 제압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臣聞地廣者粟多(신문지광자속다),國大者人眾(국대자인중),兵彊則士勇(병강칙사용)。是以太山不讓土壤(시이태산부양토양),故能成其大(고능성기대);河海不擇細流(하해부택세류),故能就其深(고능취기심);王者不卻眾庶(왕자부각중서),故能明其德(고능명기덕)。是以地無四方(시이지무사방),民無異國(민무이국),四時充美(사시충미),鬼神降福(귀신강복),此五帝(차오제)、三王之所以無敵也(삼왕지소이무적야)。今乃棄黔首以資敵國(금내기검수이자적국),卻賓客以業諸侯(각빈객이업제후),使天下之士退而不敢西向(사천하지사퇴이부감서향),裹足不入秦(과족부입진),此所謂(차소위)「藉寇兵而齎盜糧(자구병이재도량)」者也(자야)

 

신은 듣건대, 땅이 넓으면 곡식이 많고, 나라가 크면 인구가 많으며, 군대가 강하면 병사들이 용감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태산은 흙을 가리지 않기에 크기를 이룰 있었고, 강과 바다는 작은 물줄기를 가리지 않기에 깊이를 이룰 있었습니다. 왕은 백성을 물리치지 않기에 덕을 밝힐 있었습니다. 그래서 땅에는 사방이 없고, 백성에게는 다른 나라가 없으며, 사계절이 풍성하고, 귀신이 복을 내리는 것이, 이것이 오제와 삼왕이 무적이었던 이유입니다. 지금은 백성을 버려 적국을 돕고, 손님을 물리쳐 제후를 돕게 하여 천하의 선비들이 물러나 서쪽으로 진나라를 향하지 못하게 하고, 발을 싸매고 진나라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니, 이는 이른바 '적에게 병기를 빌려주고 도둑에게 양식을 주는 입니다.

 

夫物不於秦(부물부산어진),可寶者多(가보자다);士不於秦(사부산어진),而願忠者眾(이원충자중)。今逐客以資敵國(금축객이자적국),損民以益讎(손민이익수),內自虛而外樹怨於諸侯(내자허이외수원어제후),求國無危(구국무위),不可得也(부가득야)。

 

물건은 진나라에서 생산되지 않았지만, 진나라에서 귀하게 여길 만한 것이 많습니다. 인재는 진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진나라에 충성하고자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지금 손님을 쫓아내어 적국을 돕고, 백성을 해쳐서 원수에게 이익을 주며, 안으로는 스스로를 비우고 밖으로는 제후들에게 원한을 사면서 나라가 위태롭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명문장으로 진시황은 축객령을 철회를 한다. 진시황에게 신임을 받아 객경이 되며 상앙이 만든 변법을 보다 정미하게 다듬고 진시황을 도와 6국을 멸하고 천하를 통일한다. 천하를 통일한 후에는 도량형의 통일과 통진 진제국에 도움이 되지않는 제자백가의 서적을 불태우는 분서령(焚書令) 실시하고 통일 제국의 政令(정령) 따르지않고 반발하는 유가를 생매장하는 갱유(坑儒) 집행한다. () 법치기반을 확립하는 크게 이바지했고, 군현제를 실시하여 진(秦)의 중앙집권제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BC 210 7 시황제 순행도중 사망을 한다. 이사는 환관 조고(趙高) 함께 시황제의 유언장을 조작하여 황제의 막내아들 호해를 이세황제(二世皇帝) 즉위시키고, 태자 부소를 자결하게 했다. 역사가들이 이사를 비판하는 결정적 사건이 환관 조고(趙高) 결탁하여 시황제의 유언장 조작하여 태자 부소를 자결로 이끌고 능력이 부족한 막내아들 호해를 이세황제(二世皇帝) 등극시킨 일이었다. 사건으로 이사가 역사에 쌓아올린 공적을 한꺼번에 무너트리는 평가를 받는 것이었다.

 

이세황제 즉위 후 간신 조고는 낭중령이 되며 황제의 최 측근에서 어리석은 이세의 눈과 귀를 가리게 된다.이때 나온 고사성어가 지록위마(指鹿爲馬: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다)이다. 환관이자 낭중령 조고의 위세는 모든 조정 대신을 뛰어넘고 심지어 황제의 권위까지 넘보는 지경에 이른다. 조고는 자신의 정적이 될만한 진(秦)나라의 공자들과 대장군 몽염의 아들 몽의를 누명을 씌워 죽여 버리며 사실상 일인자의 위치에 올라선다. 그리고 이세황제를 설득하여 모든 보고는 낭중령인 자신을 통하도록 하여 조정 대신들과 접촉을 차단시킨다. 이를 위기로 느낀 이사는 조고가 없는 틈을 타 이세황제에게 조고의 잘못된 전횡을 말하나 어리석은 이세는 듣지 않고 그 이사가 비난한 내용을 그대로 환관 조고에게 전한다. 이에 조고는 이사를 하여 참소하여 잡아들이고 그의 아들과 함께 반역죄를 덮어씌운다. 이사와 허리가 잘리는 요참형을 당하고 그의 일가는 몰살당한다. 법가의 비참한 말로라기보다 권력욕에 눈이 멀어버린 정치가의 오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는 진 혜문왕 당시 거열형을 당한 상앙도 이세황제의 이사도 자신이 만든 법에 의해 재단되어 파멸의 길을 걸어간 것이라 사마천은 판단하는 듯하다.  

 

진시황본기의 기록에 보면

八月己亥(팔월기해), 趙高欲爲亂(조고욕위난), 恐群臣不聽(공군신불청), 乃先設驗(내선설험), 持鹿獻於二世(지녹헌어이세), ():「馬也(마야).」二世笑曰(이세소왈):「丞相誤邪(승상오사) 謂鹿爲馬(위녹위마).」問左右(문좌우), 左右或(좌우혹묵), 或言馬以阿順趙高(혹언마이아순조고). 或言鹿(혹언녹)(者(자)), 高因陰中諸言鹿者以法(고인음중제언녹자이법). 後群臣皆畏高(후군신개외고).

 

8월 기해일, 조고는 난을 일으키고자 했으나 신하들이 듣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먼저 시험을 해보려고 사슴 한 마리를 황제(호해)에게 바치면서()입니다라고 했다. 황제가 웃으며승상이 잘못 본 것 아니오? 사슴을 말이라니라고 했다. 좌우에 물으니 입을 다문 자도 있고, 말이라며 조고에게 아부하는 자도 있었으며, 사슴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었다. 조고는 사슴이라고 말한 사람들에게 몰래 죄를 씌워 모함했다. 이후로 신하들이 모두 조고를 두려워했다.

 

역사에 나타난 법가를 모아보면 상앙이 최초로 법치라는 시스템을 도입하였고 한비자가 법가의 이론을 완성하였으며 이사는 법치 국가의 완성 하였다. 진시황 본기에 나타난 진시황과 이사의 업적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법치국가의 완성, 완벽한 군현제, 도량형 통일, 문자 통일, 화폐의 통일등 2000 중국 유구한 국가운영체계를 확립한 이가 바로 이사이다. 그러나 그의 과오 또한 분명하게 남아 있다. 사실관계를 확인해야 하지만 한비자를 모살한 , 시황제의 유서를 위조하여 부소를 죽인 , 법치국가 확립에 문제를 일으키는 유생을 탄압하고 국정 운영철학과 맞지 않는 이론 철학서들을 불태운 분서갱유(焚書坑儒) 관여한 등으로 후세의 평가는 박하였다

 

통일 진제국의 수많은 난제중 하나가 기존 봉건시스템의 사회를 중앙집권 시스템의 사회로의 전환이었다. 이를 이사는 심각하게 고민하였을 것이다. 그 해답은 바로 봉건질서의 혁파이고 그것을 가로막는 유생들과 제자백가의 학설이었던 것이다. 이를 이사는 통찰하고 업애버린 것이다. 이사열전을 통해 사마천도 이사의 치적보다는 그의 과오에 많은 비중을 할애하며 글을 완성해 갔다. 그러나 사마천의 마지막 평가에도 '이사가 길을 잘못 들지 않았다면 공적은 주공, 소공에 비견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