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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사기

戰國四公子_ 신릉군, 춘신군

3. 신릉군 위무기

 

위무기(BC ? ~ 244)는 위소왕의 아들이자 안리왕의 이복동생이다.전국시대 위나라 정치가이며 이름난 명장이기도 하다. 소왕이 죽고 안리왕이 즉위하자 무기는 신릉군에 봉해졌다. 그는 어질고 선비를 존중했으며 교만하게 구는 일이 없어 식객이 3천 명이나 되었다. 전국 4 공자 중 가장 어질고 능력이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신릉군의 가장 큰 업적은 조나라를 도와 진나라를 물리친 일이다. 이 또한 그를 신뢰하는 빈객들의 도움으로 가능한 것이었다.그의 뛰어난 빈객으로 후영(候嬴), 주해(朱亥), 모공(毛公), 설공(薛公)등이 있다.

 

신릉군 식객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바로 후영인데 그는 나이 많은 성문지기였다. 후영이 현인이람 말을 들은 무기는 많은 재물을 보내었지만 그는 거절하였다. 몸소 후영을 초빙하기위해 그를 직접 찾아가자 후영이 신릉군의 인물됨을 시험하려 그의 친구인 주해와 무례하게 굴었다. 그러나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빈객으로 맞아들이자 비로소 후영이 신릉군의 덕됨을 칭찬하며 말을 하였다. 자신이 무례하게 주해와 떠들고 신릉군을 무시한 이유는 신릉군의 어진 성정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한 일임을 말한 것이다. 결국 빈객들은 신릉군의 겸손과 덕성에 탄복하여 그에 대한 신뢰가 더 공고해지고 식객이 3천 명이 넘었다.

 

신릉군 위무기와 조 평원군은 처남매부간이다.평원군의 누이가 바로 신릉군의 처이다. 기원전 260년 장평전투에서 대패한 후 조나라의 형세가 기울어지는 과정에 조나라와 진나라는 다시 한번 결전을 치른다. 진나라군의 기세에 조나라 수도 한단(邯鄲)이 포위되자 평원군 조승은 위나라 안희왕과 그의 손아래 처남인 위나라 승상 위무기 즉 신릉군에게 구원을 청한다. 위 안희왕은 장군 진비(晉鄙)에게 십만의 군사를 주어 조나라를 구원하게 하였으나 진나라 소왕은  은 사신을 파견하여 조나라를 도울 경우 도우는 위나라도 공격하겠다고 겁박한다. 아에 안리왕은 조나라를 도와주려는 명을 거두고 진을 치고 관망하게 한다.

 

평원군의 여러 번 사절을 보내 구원을 청하지만 안희왕은 진나라의 겁박에 주저하자, 신의로 명성이 자자한 신릉군은 진퇴양난의 늪에 빠지게 된다. 형의 안희왕의 명을 어길수도, 그렇다고 자신의 처남인 평원군의 청을 거절할 수도 없는 지경에 놓이게 된다. 신릉군은 이런 상황에서 자기가 그동안 예우했던 빈객들 과자신의 사병 포함 전차 백여 대를 동원하여 개인적으로 조나라와 구원하러 가고자 했다. 이때 신릉군 위무기의 문객으로 있던 후영()이라는 사람이 그건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하는 행위라고 하면서 안희왕이 사랑하는 왕비인 여희(如姬)를 이용하여 안리왕 침실에 있는 진비의 병부(兵符:군사지휘권)를 훔쳐서 지휘권을 받아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를 지원하게 한다. 또한 위나라 장군 진비가 병부를 보고도 병권을 내놓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주해로 하여금 진비를 격살(擊殺)하라는 전략을 내놓는다. 결국 병부를 손에 넣고 장군 진비를 죽이고 나서 10 만 대군을 이끌고 조나라를 구원하게 된다.

 

신릉군 위무기가 조나라 지원에 나섰다는 소문을 들은 초나라에서는 춘신군(春申君) 황헐()에게 군사를 주어 신릉군 위무기와 함께 조나라를 구원하게 했다. 신릉군 위무기는 초나라, 위나라, 조나라 군사들을 연합하여 일거에 진나라 군사들을 격파하고 조나라의 도읍지 한단의 포위를 풀었다. 이게 바로 사상 유명한 절부구조(竊符救趙), 즉 병부를 훔쳐 조나라를 구한 이야기이다.

후생(侯生)의 혜안(慧眼)

 

行過夷門(행과이문),見侯生(견후생),具告所以欲死秦軍狀(구고소이욕사진군상)。辭決而行(사결이행),侯生曰(후생왈):「公子勉之矣(공자면지의),老臣不能從(로신부능종)。」公子行數里(공자행수리),心不快(심부쾌),曰():「吾所以待侯生者備矣(오소이대후생자비의),天下莫不聞(천하막부문),今吾且死而侯生曾無一言半辭送我(금오차사이후생증무일언반사송아),我豈有所失哉(아기유소실재)?」復引車還(복인차환),問侯生(문후생)。侯生笑曰(후생소왈):「臣固知公子之還也(신고지공자지환야)。」曰():「公子喜士(공자희사),名聞天下(명문천하)。今有難(금유난),無他端而欲赴秦軍(무타단이욕부진군),譬若以肉投餒虎(비약이육투뇌호),何功之有哉(하공지유재)安事客(상안사객)?然公子遇臣厚(연공자우신후),公子往而臣不送(공자왕이신부송),以是知公子恨之復返也(이시지공자한지복반야)。」公子再拜(공자재배),因問(인문)侯生乃人閒語(후생내병인한어),曰():「嬴聞晉鄙之兵符常在王臥內(영문진비지병부상재왕와내),而如姬最幸(이여희최행),出入王臥內(출입왕와내),力能竊之(력능절지)。嬴聞如姬父人所殺(영문여희부위인소살),如姬資之三年(여희자지삼년),自王以下欲求報其父仇(자왕이하욕구보기부구),莫能得(막능득)。如姬公子泣(여희위공자읍),公子使客斬其仇頭(공자사객참기구두),敬進如姬(경진여희)。如姬之欲公子死(여희지욕위공자사),無所辭(무소사),顧未有路耳(고미유로이)。公子誠一開口請如姬(공자성일개구청여희),如姬必許諾(여희필허낙),則得虎符奪晉鄙軍(칙득호부탈진비군),北救趙而西卻秦(북구조이서각진),此五霸之伐也(차오패지벌야)。」公子從其計(공자종기계),請如姬(청여희)。如姬果盜晉鄙兵符與公子(여희과도진비병부여공자)

 

가면서 이문(夷門)을 지나다가 후생을 만나, 진나라 군사와 죽기로 싸우기로 한 이유를 알려주었다. 인사하고 떠나려고 하자 후생이 비꼬듯이 말했다. “공자께서는 힘껏 해보시지요, 노신은 따라갈 수 없습니다.” 공자가 몇 리를 가다가 마음이 언짢아서 말했다. “내가 후생을 후하게 대접한 이유는 천하에 듣지 않은 이가 없는데 이제 내가 죽으려고 할 때 후생이 오히려 일언반구(一言半句)의 말도 없이 나를 보내니, 나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 것인가?” 다시 수레를 이끌고 돌아와서 후생에게 물었다. 후생이 웃으며 말했다. “신은 본래 공자께서 돌아오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했다. “공자께서 선비를 아끼시어 그 명성이 천하에 알려졌습니다. 지금 어려움을 당해 어떤 계책도 없이 진나라 군대에 달려들고자 하시니, 비유하자면 굶주린 호랑이에게 고기를 던져주는 것과 같은데 어찌 공을 세우겠습니까?

 

 

公子行(공자행),侯生曰(후생왈):「將在外(장재외),主令有所不受(주령유소부수),以便國家(이편국가)。公子即合符(공자즉합부),而晉鄙不授公子兵而復請之(이진비부수공자병이복청지),事必危矣(사필위의)。臣客屠者朱亥可與俱(신객도자주해가여구),此人力士(차인력사)。晉鄙聽(진비청),大善(대선);不聽(부청),可使擊之(가사격지)。」於是公子泣(어시공자읍)。侯生曰(후생왈):「公子畏死邪(공자외사사)?何泣也(하읍야)?」公子曰(공자왈):「晉鄙嚄唶宿將(진비획차숙장),往恐不聽(왕공부청),必當殺之(필당살지),是以泣耳(시이읍이),豈畏死哉(기외사재)?」於是公子請朱亥(어시공자청주해)。朱亥笑曰(주해소왈):「臣乃市井鼓刀屠者(신내시정고도도자),而公子親數存之(이공자친수존지),所以不報謝者(소이부보사자),以為小禮無所用(이위소례무소용)。今公子有急(금공자유급),此乃臣效命之秋也(차내신효명지추야)。」遂與公子俱(수여공자구)。公子過謝侯生(공자과사후생)。侯生曰(후생왈):「臣宜從(신의종),老不能(로부능)。請數公子行日(청수공자행일),以至晉鄙軍之日(이지진비군지일),北鄉自剄(북향자경),以送公子(이송공자)。」公子遂行(공자수행)。

 

위공자가 떠나려 하자 후생이 말했다. “장수가 외부(전장)에 있을 때는 군주의 명령도 듣지 않을 수 있으니, 이는 곧 나라를 이롭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공자께서 병부를 맞추셨음에도 진비가 공자에게 군사를 넘겨주지 않고 다시 왕에게 청하면 일은 틀림없이 위태롭게 됩니다. 신은 백정 주해(朱亥)와 함께하는 식객인데 그는 힘이 장사입니다. 진비가 말을 들으면 매우 좋으나, 듣지 않으면 주해로 하여금 그를 때려죽이게 하십시오.” 이에 위공자가 울었다. 후생이 말했다. “공자께서는 죽음이 두려우십니까? 어째서 우십니까?” 위공자가 말했다. “진비는 용맹스러운 노장(老將)인데, 내가 가서 명령해도 듣지 않으면 반드시 그를 죽여야 하기에 우는 것이지, 어찌 죽음 따위가 두렵겠소?” 이에 위공자가 주해에게 함께 가기를 청했다. 주해가 웃으며 말했다. “신은 시장에서 칼로 소리 내며 살생을 하는 백정으로 공자께서 친히 몇 번이고 찾아와 주셨는데, 사양하며 답례하지 않은 이유는 작은 예절은 쓸모가 없다고 여겨서입니다.지금 공자께서 위급해지셨으니 이때가 신이 목숨을 바쳐 일할 때입니다.” 마침내 위공자와 함께 가기로 했다. 위공자가 후생에게 들려서 작별인사를 했다. 후생이 말했다. “신도 마땅히 따라가야 하지만, 늙어서 갈 수가 없습니다.

청하기를, 공자의 일정을 헤아려서 진비의 군영에 도착하는 날에 북쪽을 바라보며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함으로써 공자를 전송하겠습니다.” 위공자가 마침내 떠났다.

 

4. 춘신군 황헐

 

춘신군 황헐(BC ? ~ 238)은 전국시대 초나라 정치가이다. 누구의 아들인지는 자세하지 않으나 초나라 왕족은 아니고 귀족가문 출신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이 황()씨인 것으로 보아 귀족가문 출신인 것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문장과 변설에 능하고 신망이 있어 식객 삼천을 모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식객의 도움의 기록보다는 춘신군 황헐이 진 소양왕에게 유세한 기록에서 그의 역사적 문학적 식견이 돋보인다. 춘신군 황헐의 기록은 BC 278년 초 경양왕때 진 소양왕이 백기장군으로 하여 한() ()와 연합군을 결성하여 초나라를 치려 할 당시에 진나라 사신으로 간 기록에 자세히 나온다.  

 

사신으로 간 황헐은 천하의 초와 진 강대국이 싸우면 약한 개들(, )만 이득을 볼 것이라 설득하여 진 소양왕은 이를 인정하게 된다. 화친의 대가로 훗날 초나라 고열왕이 되는 태자 완()과 함께 인질로 진나라에 남는다. BC 264년 초 경양왕이 죽자 황헐은 태자 완을 귀국시켜줄 것을 진나라 재상 범수를 설득한다. 그러나 소양왕은 허락하지 않고 황헐만 먼저 귀국할 것을 명한다. 그러나 황헐은 태자를 몰래 초나라로 보내고 자신은 남기로 결정한다. 이에 대노한 소양왕은 황헐을 죽이고자 하나 재상 범수의 주선으로 죽음은 면하고 초나라로 귀국한다. 이후 태자완이 왕에 즉위하여 고열왕이 된다.

 

황헐은 이때의 공적으로 고열왕으로부터 회북의 12현을 하사 받고 춘신군이라 불리게 된다. BC 258년 조나라 수도 한단이 진나라에 포위되었을 당시 신릉군과 함께 구원병력을 보내 진나라를 물리쳤으며, BC248년 회북을 직할 군으로 삼을 것을 권유하고 강동(江東)땅을 내려받아 자신의 봉읍으로 삼고 식객 삼천을 모으게 된다. 이 당시 식객 중에는 제나라 직하 학궁의 좨주(祭主)엿던 성악설의 주창자 순자(荀子)도 있었다. 후에 난릉 현령으로 삼았다.

 

춘신군의 말로는 비참하였다. 그의 식객 중 하나인 이원의 여동생이 아름다워 취하였는데, 이원은 그녀를 고열왕에게 바쳐 출세하고자 모략을 꾸몄다. 춘신군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던 여동생을 임신상태로 고열왕에게 상납을 청하자 춘신군은 그의 자식이 대를 이을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허락한다. 그후 이원도 높은 지위에 오르자, 춘신군을 정적으로 삼고 그의 제거를 결심한다. 고열왕이 죽고 장례식중에 이원은 자객을 시켜 춘신군을 살해하고 그 목이 성밖에 버려지며 그의 일족은 멸문의 화를 당하게 되며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전국시대 유세가들이 유세하는 상소문 중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는 글이 한 비자가 진 시황이 한나라 공격의 부당함을 알리는 글이 초견진(初見秦)이다. 그 다음으로 꼽을 수 있는 글이 바로 춘신군이 진 소양왕을 설득하는 글이다. 둘다 국제 정세에 대한 넓은 식견과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이해와 통찰, 유가 경전의 글을 인용 비유하여 전쟁을 일으키려는 부당함 또는 자신의 주장의 합당을 주장하는 대목에 있다. 名文(명문)이며 한자를 유추해 감상해 보면 글 읽는 맛이 더할 것이다.

 

天下莫彊於秦(천하막강어진)、楚(초)。今聞大王欲伐楚(금문대왕욕벌초),此猶兩虎相與鬬(차유량호상여투)。兩虎相與鬬而駑犬受其獘(량호상여투이노견수기폐),不如善楚(부여선초)。臣請言其說(신청언기설):臣聞物至則反(신문물지칙반),冬夏是也(동하시야);致至則危(치지칙위),累棋是也(루기시야)。今大國之地(금대국지지),遍天下有其二垂(편천하유기이수),此從生民已來(차종생민이래),萬乘之地未嘗有也(만승지지미상유야)。先帝文王(선제문왕)、莊王之身(장왕지신),三世不妄接地於齊(삼세부망접지어제),以絕從親之要(이절종친지요)。今王使盛橋守事於韓(금왕사성교수사어한),盛橋以其地入秦(성교이기지입진),是王不用甲(시왕부용갑),不信威(부신위),而得百里之地(이득백리지지)。王可謂能矣(왕가위능의)。王又舉甲而攻魏(왕우거갑이공위),杜大梁之門(두대량지문),舉河內(거하내),拔燕(발연)、酸棗(산조)、虛(허)、桃(도),入邢(입형),魏之兵雲翔而不敢捄(위지병운상이부감구)。王之功亦多矣(왕지공역다의)。王休甲息眾(왕휴갑식중),二年而後復之(이년이후복지);又并蒲(우병포)、衍(연)、首(수)、垣(원),以臨仁(이림인)、平丘(평구),黃(황)、濟陽嬰城而魏氏服(제양영성이위씨복);王又割濮磿之北(왕우할복력지북),注齊秦之要(주제진지요),絕楚趙之脊(절초조지척),天下五合六聚而不敢救(천하오합륙취이부감구)。王之威亦單矣(왕지위역단의)。

 

“천하에 진나라와 초나라보다 강한 나라는 없습니다. 지금 대왕께서 초나라를 친다고 하시는데, 이는 두 호랑이가 서로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두 호랑이가 서로 싸우면 노둔한 개가 그들이 지친 틈에 이익을 얻으니, 초나라와 친하게 지내니만 못합니다. 신이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이 듣기에 사물은 극에 달하면 곧 되돌아오고, 겨울과 여름이 바로 그것입니다. 지극하면 이르면 위태로운 것이 바둑돌을 쌓아 올리는 것도 그와 같습니다. 지금 대국 진나라의 땅은 천하에 두루 퍼져 있어 두 변방(, 북쪽)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람이 있은 이래 만승(萬乘)의 땅을 차지한 나라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진나라는 선제이신 혜문왕(惠文王), 莊王(장왕) 삼대에 걸쳐서 영토를 제나라와 땅과 접하며 제후들이 합종의 친교를 끊어내지 않았습니다. 지금 왕께서 성교(盛橋)를 한나라에 주둔하게 하여, 성교가 한나라 북쪽 땅을 진나라에 바치게 했으니, 이는 왕께서 군대를 운용하지도,위세를 떨치지 않고 백 리의 땅을 얻은 것입니다. 왕께서는 실로 능하신 분입니다. 왕은 또 군사를 일으켜 위나라를 공격하여 대량(大梁)의 성문을 막고 하내(河內)를 점거했으며, (), 산조(酸棗), (), ()를 점령하고, () 땅으로 들어가자 위나라 병사들은 구름처럼 흩어져 감히 구할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왕의 공적은 또한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왕께서는 군사를 쉬게 하시고, 2년이 지나자 다시 군사를 일으켜 또 포(), (), (), ()을 병합하고, (), 평구(平丘)를 공격하다가 황(), 제양(濟陽)을 포위하여 위나라를 굴복시켰습니다. 왕이 또 복수(濮水)와 역산()의 북쪽을 나누어 가져서 제나라와 진나라의 요충지에 주둔하고 초나라와 조나라의 등뼈를 끊으니, 천하의 제후들이 다섯 번이나 연합하고 여섯 나라가 모였음에도 감히 구하지 못했습니다. 왕의 위세는 역시 홀로 크게 되었습니다.

 

王若能持功守威(왕약능지공수위),絀攻取之心而肥仁義之地(출공취지심이비인의지지),使無後患(사무후환),三王不足四(삼왕부족사),五伯不足六也(오백부족륙야)。王若負人徒之眾(왕약부인도지중),仗兵革之彊(장병혁지강),乘毀魏之威(승훼위지위),而欲以力臣天下之主(이욕이력신천하지주),臣恐其有後患也(신공기유후환야)。《詩(시)》曰(왈)「靡不有初(미부유초),鮮克有終(선극유종)」。《易(역)》曰(왈)「狐涉水(호섭수),濡其尾(유기미)」。此言始之易(차언시지역),終之難也(종지난야)。何以知其然也(하이지기연야)?昔智氏見伐趙之利而不知榆次之禍(석지씨견벌조지리이부지유차지화),吳見伐齊之便而不知干隧之敗(오견벌제지편이부지간수지패)。此二國者(차이국자),非無大功也(비무대공야),沒利於前而易患於後也(몰리어전이역환어후야)。吳之信越也(오지신월야),從而伐齊(종이벌제),既勝齊人於艾陵(기승제인어애릉),還為越王禽三渚之浦(환위월왕금삼저지포)。智氏之信韓(지씨지신한)、魏也(위야),從而伐趙(종이벌조),攻晉陽城(공진양성),勝有日矣(승유일의),韓(한)、魏叛之(위반지),殺智伯瑤於鑿臺之下(살지백요어착대지하)。今王妒楚之不毀也(금왕투초지부훼야),而忘毀楚之彊韓(이망훼초지강한)、魏也(위야),臣為王慮而不取也(신위왕려이부취야)。

 

왕이 만약 능히 그 공을 유지하고 위엄을 지키면서, 공격해 빼앗으려는 마음을 버리고 인의의 도리를 넓혀, 후환을 방지하면 삼왕(三王)으로는 부족하여 사왕(四王)이 될 것이고, 오백(五覇)로는 부족하여 육패(六覇)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왕이 많은 백성과 병력의 강한 것만 믿고 위나라를 무찌르던 위세를 믿고 힘으로 천하의 제후들을 신하로 삼으려고 한다면, 신은 그 후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시경(詩經)>에서 이르기를시작이 좋지 않은 사람은 없으나 끝을 잘 맺는 사람은 드물다.”라고 했습니다.

<역경(易經)>에서 이르기를여우가 물을 건너다가 꼬리를 적신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시작은 쉬우나 끝은 어렵다는 뜻입니다. 어찌 그런 일들을 알겠습니까? 옛날 지씨(智氏)는 조씨(趙氏)를 치는 이익만을 보다가 유차(榆次) 땅에서 화를 입을 것을 알지 못했고, 오나라는 제나라를 쳐 이익이 되는 것만 알고 간수(干隧)에서 패할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 두 나라는 큰 공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눈 앞의 이익에만 빠졌다가 뒤에 올 재앙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오나라는 월나라를 믿고 병사를 이끌고 제나라를 정벌하여 애릉(艾陵) 땅에서 제나라 군대를 이겼으나, 돌아오다 삼저(三渚)의 포구에서 월왕에게 사로잡혔습니다.

 

지씨는 한씨(韓氏)와 위씨(魏氏)를 믿고 병사를 이끌고 조씨를 정벌하여 진양(晉陽)의 성을 공격해 승리의 날이 다가왔을 때, 한나라와 위나라가 배반하여 지백(智伯) ()는 착대(鑿臺) 아래에서 살해당했습니다. 지금 왕께서는 초나라가 망하지 않는 것만 시기하실 뿐 초나라가 망하면 한나라와 위나라가 강해진다는 것을 잊고 계시니, 신은 왕을 위해 이를 찬성할 수 없습니다.

 

《詩(시)》曰(왈)「大武遠宅而不涉(대무원댁이부섭)」。從此觀之(종차관지),楚國(초국),援也(원야);鄰國(린국),敵也(적야)。《詩(시)》云(운)「趯趯毚免(적적참면),還犬獲之(환견획지)。他人有心(타인유심),余忖度之(여촌도지)」。今王中道而信韓(금왕중도이신한)、魏之善王也(위지선왕야),此正吳之信越也(차정오지신월야)。臣聞之(신문지),敵不可假(적부가가),時不可失(시부가실)。臣恐韓(신공한)、魏卑辭除患而實欲欺大國也(위비사제환이실욕기대국야)。何則(하칙)?王無重世之德於韓(왕무중세지덕어한)、魏(위),而有累世之怨焉(이유루세지원언)。夫韓(부한)、魏父子兄弟接踵而死於秦者將十世矣(위부자형제접종이사어진자장십세의)。本國殘(본국잔),社稷壞(사직괴),宗廟毀(종묘훼)。刳腹絕腸(고복절장),折頸摺頤(절경접이),首身分離(수신분리),暴骸骨於草澤(폭해골어초택),頭顱僵仆(두로강부),相望於境(상망어경),父子老弱系脰束手為群虜者相及於路(부자로약계두속수위군로자상급어로)。鬼神孤傷(귀신고상),無所血食(무소혈식)。人民不聊生(인민부료생),族類離散(족류리산),流亡為仆妾者(류망위부첩자),盈滿海內矣(영만해내의)。故韓(고한)、魏之不亡(위지부망),秦社稷之憂也(진사직지우야),今王資之與攻楚(금왕자지여공초),不亦過乎(부역과호)!

 

<시경>에서 이르기를, “대군(大軍)은 멀리 나가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으로 살펴보건대 초나라는 진나라 편이고, 이웃한 한나라, 위나라는 적국입니다.

<시경>에서 이르기를이리저리 날뛰는 교활한 토끼도 사냥개를 만나면 잡힌다.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내 마음에 비추어 알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왕이 중도에 한, 위나라가 왕과 친하다고 믿는 것은 오나라가 월나라를 믿는 것과 같습니다. 신은 적은 용서해서는 안 되고, 때는 놓치면 안 된다고 들었습니다. 신은 한, 위나라가 비천한 말로 근심을 덜어줄 것처럼 행동하면서 실제로는 대국 진나라를 속이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어째서일까요? 왕은 대대로 한나라, 위나라에 덕을 베푼 적이 없으며, 원한만 쌓였기 때문입니다. 무릇 한나라, 위나라는 부자 형제가 잇달아 진나라와 싸우다 죽은 것이 10대에 걸쳐 이어졌습니다. 그들의 나라는 황폐해지고 사직은 무너지고 종묘는 허물어졌습니다. 배가 갈라지고 창자가 끊어지고 목이 잘리고 턱이 부서졌으며, 머리와 몸이 분리되고 해골은 초원이나 연못에 드러나 뒹굴며, 두개골이 엎어져서 국경에서 서로 마주 보고 있으니, 아버지와 자식, 노인과 어린이가 목과 손이 묶인 채 진나라의 포로가 되어 길을 메워 끌려가고 있습니다. 귀신은 홀로 슬퍼하며 제삿밥을 먹여줄 곳이 없습니다. 백성은 삶을 즐길 수 없고, 친척은 뿔뿔이 흩어졌으며, 정처 없이 떠돌다가 남녀 종이 된 자가 땅에 가득 차있습니다. 그러므로 한나라, 위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진나라 사직의 우환인데, 지금 왕께서 그들에 기대어 함께 초나라를 공격하시니, 역시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且王攻楚將惡出兵(차왕공초장악출병)?王將借路於仇讎之韓(왕장차로어구수지한)、魏乎(위호)?兵出之日而王憂其不返也(병출지일이왕우기부반야),是王以兵資於仇讎之韓(시왕이병자어구수지한)、魏也(위야)。王若不借路於仇讎之韓(왕약부차로어구수지한)、魏(위),必攻隨水右壤(필공수수우양)。隨水右壤(수수우양),此皆廣川大水(차개광천대수),山林谿谷(산림계곡),不食之地也(부식지지야),王雖有之(왕수유지),不為得地(부위득지)。是王有毀楚之名而無得地之實也(시왕유훼초지명이무득지지실야)。

 

또 왕께서는 초나라를 공격한다면 어찌 출병하시겠습니까? 왕께서 원수인 한나라와 위나라에 길을 빌리려고 하십니까? 출병하는 날이 되면 왕께서는 군대가 되돌아오지 못할까 걱정하실 것이고, 이는 왕의 군사들로 하여금 원수인 한나라와 위나라를 돕는 일이 됩니다. 왕이 만약 원수인 한나라와 위나라에 길을 빌리지 않는다면 반드시 수수(隨水)의 우측 땅을 공격해야 합니다. 수수(隨水)의 오른쪽 땅은 모두 넓고 큰 강물과 산림과 계곡으로 이루어져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이니, 왕이 비록 그곳을 얻는다고 해도 땅을 얻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는 왕께서는 초나라를 쳤다는 오명을 들을 뿐 땅을 얻는 실속은 없을 것입니다.

 

且王攻楚之日(차왕공초지일),四國必悉起兵以應王(사국필실기병이응왕)。秦(진)、楚之兵構而不離(초지병구이부리),魏氏將出而攻留(위씨장출이공류)、方與(방여)、铚(질)、湖陵(호릉)、碭(탕)、蕭(소)、相(상),故宋必盡(고송필진)。齊人南面攻楚(제인남면공초),泗上必舉(사상필거)。此皆平原四達(차개평원사달),膏腴之地(고유지지),而使獨攻(이사독공)。王破楚以肥韓(왕파초이비한)、魏於中國而勁齊(위어중국이경제)。韓(한)、魏之彊(위지강),足以校於秦(족이교어진)。齊南以泗水為境(제남이사수위경),東負海(동부해),北倚河(북의하),而無後患(이무후환),天下之國莫彊於齊(천하지국막강어제)、魏(위),齊(제)、魏得地葆利而詳事下吏(위득지보리이상사하리),一年之後(일년지후),為帝未能(위제미능),其於禁王之為帝有餘矣(기어금왕지위제유여의)。

 

또한 왕이 초나라를 공격하는 날에는 네 나라가 반드시 모든 병사를 일으켜 왕에게 응전할 것입니다. 진나라와 초나라의 병사가 쉬지 않고 오랫동안 싸우게 되면 위나라는 출병해 유(), 방여(方與), (), 호릉(湖陵), 탕(), (), ()을 공격해 옛 송나라의 땅을 모두 차지할 것입니다. 제나라는 남쪽으로 초나라를 공격하고 사수(泗水) 유역을 틀림없이 점거할 것입니다. 이는 모두 평원이며 사방이 탁 트인 비옥한 땅이므로 홀로 공격해 차지할 것입니다. 왕이 초나라를 치면 중원의 한나라와 위나라를 살찌게 하는 것이며, 제나라를 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한나라와 위나라가 강해지면 진나라에 맞설 수 있게 됩니다. 제나라는 남쪽으로 사수(泗水)를 경계로 삼고 동쪽으로 바다를 등지고 북쪽으로 황하(黃河)에 의지하며 후환이 없어질 것이니, 천하의 나라 중에 제나라와 위나라보다 강한 나라는 없게 될 것이며, 제나라와 위나라가 땅을 얻고 이익을 누리면서 거짓으로 진나라를 섬긴다면, 1년 후에는 황제가 되지 못할지라도 왕이 황제가 되는 것을 막는 힘을  갖추고도 남을 것입니다.

 

夫以王壤土之博(부이왕양토지박),人徒之眾(인도지중),兵革之彊(병혁지강),壹舉事而樹怨於楚(일거사이수원어초),遲令韓(지령한)、魏歸帝重於齊(위귀제중어제),是王失計也(시왕실계야)。臣為王慮(신위왕려),莫若善楚(막약선초)。秦(진)、楚合而為一以臨韓(초합이위일이림한),韓必斂手(한필렴수)。王施以東山之險(왕시이동산지험),帶以曲河之利(대이곡하지리),韓必為關內之侯(한필위관내지후)。若是而王以十萬戍鄭(약시이왕이십만수정),梁氏寒心(량씨한심),許(허)、鄢陵嬰城(언릉영성),而上蔡(이상채)、召陵不往來也(소릉부왕래야),如此而魏亦關內侯矣(여차이위역관내후의)。王壹善楚(왕일선초),而關內兩萬乘之主注地於齊(이관내량만승지주주지어제),齊右壤可拱手而取也(제우양가공수이취야)。王之地一經兩海(왕지지일경량해),要約天下(요약천하),是燕(시연)、趙無齊(조무제)、楚(초),齊(제)、楚無燕(초무연)、趙也(조야)。然後危動燕(연후위동연)、趙(조),直搖齊(직요제)、楚(초),此四國者不待痛而服矣(차사국자부대통이복의)。

 

무릇 왕이 넓은 국토와 많은 백성과 강한 무기로 일거에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에 원한을 심고, 한나라와 위나라가 제나라에 황제의 칭호를 바치게 하는 것은 왕의 잘못된 계책입니다. 신이 왕을 위해 염려하건대 초나라와 잘 지내니만 못합니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연합하여 한(韓)나라를 친다면 한(韓)나라는 틀림없이 손을 떼고 복종할 것입니다. 왕이 산동(山東)의 험난함에 이용하고 하곡(河曲)의 이로움을 활용한다면 한나라는 반드시 관내의 제후가 될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하신 후 왕께서 10만의 병사로 한(漢)나라의 정() 땅을 지키면 위나라는 겁을 먹고, ()와 언릉(鄢陵)을 둘러싼 채 나오지 못할 것이며, 상채(上蔡)와 소릉(召陵)은 왕래할 수 없게 될 것이니, 위나라 역시 관내의 제후가 될 것입니다. 왕께서 한번 초나라와 친하게 지내면 두 만승지국(萬乘之國)의 군주가 관내 후가 될 것이고, 제나라와 국경을 맞대게 되어 제나라 오른쪽의 땅은 팔짱을 끼고도 빼앗을 수 있습니다. 왕의 영토는 두 바다를(동해와 서해) 가로지르게 되며 천하의 허리를 얻으니, 연나라와 조나라는 제나라와 초나라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제나라와 초나라는 연나라와 조나라의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그 후에 연나라와 조나라를 위협하고, 제나라와 초나라를 흔들면 이 네 나라는 서둘러 공격하지 않아도 복종시킬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