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 말부터 제후의 권력 약화 원인은 기본적으로 어리석거나 난폭한 군주가 국정을 어지럽히는 것이었다. 그 다음은 그 군주의 권력을 호시탐탐 노리는 대신(경대부:卿大夫)의 권력을 향한 욕망인 것이다. 이 두 조건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전통적인 제후국 공(公)의 권력은 날로 약화되고 대신(大臣)의 권력은 날로 커져서, 진(晉)나라가 세 나라로 쪼개어지고, 노나라가 삼환 세력에 의해 쇠락해 갔으며,강(姜)씨의 제나라가 전(田)씨의 제나라로 군주가 바뀐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이것이 전국시대로 이어지며 약육강식의 국가 간 전쟁과 더불어 제후국 내부의 권력 투쟁이 만연하게 되었다.
전국시대 중기를 지나 후기 제후 간의 전쟁은 정벌(征伐)이 아닌 정복(征服) 전쟁이었다.즉 전쟁을 일으켜 복속시키고 정복당한 국가의 사직을 멸절하는 방식이었다. 기원전 3세기초 중원의 패권은 원교근공으로 유명한 진 소양왕과 동쪽의 맹주인 제 민왕이 양분하고 남쪽의 대국 초나라가 그 틈을 노리고 있었다. 여기에 조나라 무령왕도 군사 개혁을 통해 잠시나마 중원의 패자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중원의 남쪽에는 강국 초나라가 호시탐탐 그들의 빈자리를 노리고 있는 형국이었다. 이 당시 활동하던 4명의 공자가 전국 사공자이다.
제후(諸侯)가 아닌 경대부(卿大夫)의 권력이 강화되어 가는 과정에 전국시대 후기에(4세기말세기 중기) 유명한4 공자가 있다. 이들은 권력의 중심부에 있고 정권을 뒤집을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국가안위를 걱정한 공자(公子)들이다. 전국시대 4 공자는 제의 맹상군(孟嘗君), 조의 평원군(平原君), 위의 신릉군(信陵君), 초의 춘신군(春申君)이다. 이들은 왕족의 왕자 또는 서자로서 자신의 봉토를 가지며 세객들을 거느리고 자신의 세력을 공고히 하고 국난 타계의 선봉 역할을 하였다.
공교롭게도 전국의 패자 진(秦)나라에는 이러한 이름난 공자들이 없었다. 전국 초기 진 효공 당시부터 귀족 대부의 의 힘을 약화시키고 공족의 권력을 강화하는 중앙집권제를 채용하였기 때문에 권력이 분산되는 상황을 막은 것이다. 모든 행정명령과 권력은 조정에서 나오는 것을 강화해 여타 제후국처럼 권력의 누수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효율적 국가 경영체제 확립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맹상군(전문)은 제위왕의 후손으로3천 명의 식객을 거느리며 秦 나라 신하의 모함에 의해 위험에 빠졌을 때 식객의 도움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 일화 계명구도(鷄鳴狗盜)의 주인공이다. 조나라는 평원군(조등) 조혜문왕의 동생으로 毛遂自薦(모수자천: 어려운 일을 당하여 스스로 그 일을 맡고 나섬)과 囊中之錐(주머니 속의 송곳)이라는 고사를 남겼다. 위 신릉군(무기) 위 소왕의 아들로 조나라 한단이 진나라에 포위 당시 조나라를 구하기 위해 부절을 훔친 일로 절부구조(竊符救趙)의 고사를 남겼다. 춘신군(황헐)은 초나라 경양왕을 섬기며 뛰어난 외교술로 초나라를 합종의 맹주로 이끌며25년 동안 재상직에 있었으나 초 고열왕이 죽자 이원의 암수에 걸려 멸족의 화를 입었다.
1. 맹상군 전문
맹상군(孟嘗君, BC ? ~ 279년)은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제나라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외교가로서 성은 전(田), 휘(諱)는 문(文)이며, 맹상군은 그의 시호(諡號)이다. 그의 아버지 전영의 치적의 토대 위에 맹상군은 전국시대4 공자의 대표 인물이 된 것이다. 아버지 전영은 제 위(威) 왕의 막내아들이고 제선왕의 이복동생이다. 제위왕 당시부터 관직을 얻어 권력을 잡고 제선왕 때 재상의 자리에 오르며 성후(成候), 추기(鄒忌), 전기(田忌), 손빈(孫臏)등을 이끌며 당시 한나라와 위나라를 굴복시키고 전국시대 패권국의 자리에 올려놓는다.이런 치적을 기반으로 전영은 제민왕 3년 설 땅에
맹상군 전문(田文)이 태어날 당시 전영의 자식은 40여 명이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천민이어서 전영은 맹상군의 생모에게 버릴 것을 명하였으나 몰래 키웠다. 그 후 맹상군의 영특함으로 전영의 눈에 들게 되며 집안일과 빈객 응대의 일을 맡게 된다.그의 아버지 전영의 제나라의 재상으로 날로 빈객이 늘어나며 맹상군의 명성은 제후들에게까지 알려지게 된다. 많은 제후들이 전영에게 맹상군 전문을 후계로 삼을 것을 종용하니 전영은 이를 따르고, 전영이 죽고 나자 맹상군 전문은 설(薛) 땅의 영주가 된다.
맹상군의 인물됨은 사기에서도 그리 좋게 드러난 것은 없다. 단지 빈객과 선비를 좋아했고, 명성과 이익만 좇았을 뿐이다. 그의 영특함이 그의 아버지로 하여금 후계를 잇게 하였고, 아버지 전영의 후광에 힘입어 설(薛) 땅의 영주가 되어 제나라의 국정을 운영한 것이다. 맹상군이 영주가 되고 제후들의 빈객은 물론 심지에 죄를 짓고 도망치던 죄인에게 까지 후대하니 식객은 수천으로 늘어났다. 이 당시 최강국은 진(秦) 나라였고,군주는 소양왕이었는데, 맹상군이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진나라로 불러들이는 모략을 꾸몄으나 소진(蘇秦)의 동생 소대(素代)의 만류에 가지 않았다.
제민왕 2년(BC299) 결국 진(秦) 소양왕의 강압에 이기지 못하고 진나라로 가게 된다. 결국 맹상군을 가두고 죽이려던 차에 맹상군의 빈객으로 개 흉내를 내던 좀도둑과 닭의 울음소리를 잘 내는 자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탈출한다.
식객 풍환의 기지(奇智)로 설 땅의 백성을 감동시킨 명성을 드높인 일화도 있다. 맹상군은 식객을 3천여 명이나 되었으나 숙식의 비용을 설(薛) 땅 백성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그 이자로 3천 객(客)들의 접대 비용을 감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자가 잘 걷히지 않고 비용을 감당하기 힘들어 풍한으로 하여금 그 이자를 받아오게 하였다.선생께서 설 땅에서 돈을 받아 오셨으면 합니다.” 이에 풍환은 설 땅으로 가서 빚을 진 사람들을 모아 이자로10 만전을 받았다. 그 돈으로 술을 사고 소를 잡아 빚을 갚은 사람과 갚지 않은 사람 모두를 대접하였다. 그리고 이자를 갚을 사람들에게는 기일을 정하여 갚게 하고, 갚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 증서를 불태워 감면해 주었다.이 일로 맹상군은 그를 꾸짖었으나 설 땅의 백성들에게 맹상군의 위상과 명성을 드높였다. 이는 오늘날 부채탕감과 같은 것으로 실질적인 빈민 구제책이었던 것이다.
맹상군의 덕망은 그리 높지 않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그가 권력을 차지하고 있을 때 빈객이 삼천여명이나 되었지만 제민왕으로부터 견제를 받으며 실권하였을 때 모두 떠나고 풍환만이 그의 곁을 지켰다. 풍환은 그의 복권을 위해진 소왕 제민왕을 설득하는 모략을 꾸며 복권에 일조를 한다. 사기에 나타난 맹상군의 잘한 일은 빈객을 잘 대우하여 그 빈객들이 위기에 처한 맹상군을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계명구도(鷄鳴狗盜)
齊湣王二十五年(제민왕이십오년),復卒使孟嘗君入秦(복졸사맹상군입진),昭王即以孟嘗君為秦相(소왕즉이맹상군위진상)。人或說秦昭王曰(인혹설진소왕왈):「孟嘗君賢(맹상군현),而又齊族也(이우제족야),今相秦(금상진),必先齊而後秦(필선제이후진),秦其危矣(진기위의)。」於是秦昭王乃止(어시진소왕내지)。囚孟嘗君(수맹상군),謀欲殺之(모욕살지)。孟嘗君使人抵昭王幸姬求解(맹상군사인저소왕행희구해)。幸姬曰(행희왈):「妾願得君狐白裘(첩원득군호백구)。」此時孟嘗君有一狐白裘(차시맹상군유일호백구),直千金(직천김),天下無雙(천하무쌍),入秦獻之昭王(입진헌지소왕),更無他裘(경무타구)。孟嘗君患之(맹상군환지),遍問客(편문객),莫能對(막능대)。最下坐有能為狗盜者(최하좌유능위구도자),曰(왈):「臣能得狐白裘(신능득호백구)。」乃夜為狗(내야위구),以入秦宮臧中(이입진궁장중),取所獻狐白裘至(취소헌호백구지),以獻秦王幸姬(이헌진왕행희)。幸姬為言昭王(행희위언소왕),昭王釋孟嘗君(소왕석맹상군)。孟嘗君得出(맹상군득출),即馳去(즉치거),更封傳(경봉전),變名姓以出關(변명성이출관)。夜半至函谷關(야반지함곡관)。秦昭王後悔出孟嘗君(진소왕후회출맹상군),求之已去(구지이거),即使人馳傳逐之(즉사인치전축지)。孟嘗君至關(맹상군지관),關法雞鳴而出客(관법계명이출객),孟嘗君恐追至(맹상군공추지),客之居下坐者有能為雞鳴(객지거하좌자유능위계명),而雞齊鳴(이계제명),遂發傳出(수발전출)。出如食頃(출여식경),秦追果至關(진추과지관),已後孟嘗君出(이후맹상군출),乃還(내환)。始孟嘗君列此二人於賓客(시맹상군렬차이인어빈객),賓客盡羞之(빈객진수지),及孟嘗君有秦難(급맹상군유진난),卒此二人拔之(졸차이인발지)。自是之後(자시지후),客皆服(객개복)。
제 민왕 2년(기원전 299년), 마침내 다시 맹상군을 진나라로 보내니 진 소양왕이 곧 맹상군을 진나라 재상으로 삼았다. 신하 한 사람이 진 소양왕에게 유세했다. “맹상군은 현명한 인물이나 또 제나라의 일족으로 지금 진나라 재상이 되었으니 반드시 제나라를 먼저 생각하고 진나라를 후에 생각할 것이니, 진나라가 위태롭게 됩니다.” 이에 진 소양왕이 맹상군을 재상으로 삼았던 것을 취소하였다.
그리고 맹상군을 가두고 그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맹상군은 사람을 보내 진 소양왕의 애첩을 만나 구해줄 것을 청하게 했다. 애첩이 말했다. “첩은 맹상군이 가진 호백구(狐白裘)를 갖고 싶습니다.” 이 당시 맹상군은 호백구를 한 벌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값은 천금이고 천하에 둘도 없는 것이었으나, 진나라에 들어오면서 소양왕에게 바쳤기에 다른 갖옷은 없었다. 맹상군이 이를 근심하여 빈객들에게 물었으나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가장 아랫자리에 앉아 있던 개 흉내를 잘 내는 좀도둑이 말했다.
“신이 호백구(狐白裘)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밤이 되자 개 흉내를 내서 진나라의 궁궐 창고에 들어가 바쳤던 호백구를 훔쳐 진 소양왕의 애첩에게 바쳤다. 애첩이 소양왕에게 간언 하니 소양왕이 맹상군을 풀어주었다. 맹상군이 풀려나자마자 곧바로 말을 몰고 달아나서, 통행증을 위조하여 성명을 바꾸고 관문을 통과했다. 밤중에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렀다. 진 소양왕이 맹상군을 풀어준 것을 후회하고 그를 찾았으나 이미 달아난 뒤였기에 곧 사람을 시켜 마차를 급히 몰아 뒤쫓게 했다. 맹상군이 함곡관에 이르렀으나 관문법상 닭이 울어야 손님이 나갈 수 있었다.
맹상군이 추격대가 이를까 두려워하자, 빈객 중 아랫자리에 있던 닭울음소리를 낼 줄 아는 자가 닭울음을 내니 닭들이 일제히 울어서 마침내 통행증을 보이고 나갔다. 그들이 나가고 얼마 안 되어 진나라의 추격이 함곡관에 이르렀으나, 이미 맹상군이 나간 뒤였기에 되돌아갔다. 처음에 맹상군이 이 두 사람을 빈객으로 삼았을 때 다른 빈객들이 모두 부끄러워하였는데, 맹상군이 진나라에서 어려움에 부닥치자 마침내 이 두 사람이 그를 구출하게 되었다. 그 후로 빈객들은 모두 맹상군에게 감탄하였다.
맹상군은 식객을 3천여 명이나 되었으나 숙식의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였다. 그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빌려준 빚을 상환하게 하려 식객인 풍환을 불러 말하였다. “선생께서 설 땅에서 돈을 받아오셨으면 합니다.” 이에 풍환은 설 땅으로 가서 빚을 진 사람들을 모아 이자로10 만전을 받았다. 그 이자로 술을 사고 소를 잡아 빚을 갚은 사람과 갚지 않은 사람들을 대접하였다. 그리고 이자를 갚을 사람들에게는 기일을 정하고 갚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 증서를 불태워 감면해 주었다.이 말을 들은 맹상군은 노하며 풍환을 불러들여 꾸짖었다.
2 평원군 조승
평원군(BC ? ~ 251)은 전국시대 조나라의 공자이며 정치가다. 성은 趙(조)이고 휘(諱)는 승(勝)이다. 조 무령왕(武靈王)의 아들로 혜문왕의 동생이기도 하다. 휘하의 식객을 모아 무령왕과 혜문왕을 보좌하였다.
평원군도 맹상군과 마찬가지로 그의 아버지 조 무령왕(武靈王)의 치적 위에 전국시대 4 공자로서 명성을 펼쳤다. 조무령왕을 대표하는 사자성어로 호복기사(胡服騎士)라는 말이 있다. 오랑캐 복장을 한 병사라는 말이다. 북방 융족의 복식과 기마술을 도입하여 전차 중심의(戰車戰) 전술에서 기병(騎兵) 중심의 편제로 바꾼 것이다. 이 개혁은 재상과 대신 심지어 그의 아들 태자의 반대에 부딪힌다. 당시 전국 7웅(제, 진, 초, 한, 조, 위, 연)는 중원의 나라로 그 변방을 오랑캐라 칭하고 문화적으로 멸시하였다. 그런 문화적 정치적 분위기에서 그의 왕족과 대신을 설득하고 태자의 폐위를 통해 그의 의지를 관철한다.
무령왕의 군사개혁은 곧바로 조나라의 국력 강화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무령왕의 재위초기에는 진나라가 수차례 조나라를 침탈하여 손해를 보았으나, 재위 후반에 이르러 동쪽으로는 중산국을 수차례 정벌하여 영역을 확장했고, 서쪽으로는 이민족들을 무력으로 복속시켜 그 병력을 징발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무령왕 후반기의 꾸준한 중산국 정벌전 덕분에 그가 주보(主父: 왕의 아버지)로 물러난 후 중산국은 완전히 멸망하여 조나라에 흡수된다.
그러나 조 무령왕은 후계자 선정에서 잘못된 선택을 하고 내란이 일어나 죽고 만다. 첩의 소생이지만 태자가 된 혜문왕을 중심으로 한 세력과 정실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공자 장의 세력 간 타툼에서 조승은 혜문왕을 지지하여 승리한다. 이에 혜문왕은 평원(平原)군에 봉하게 되고 봉지를 잘 다스려 3천여 명의 식객을 모으게 된다.
평원군이 식객을 모은 비결이 사기에 나온다. 바로 신뢰(信賴)를 심어 준 것이다. 하루는 평원군의 식객 한 사람이 다리를 저는 것을 보고 그의 첩이 비웃은 사건이 있었다. 식객은 이를 부끄럽게 여기고 평원군에게 “저것을 죽여 목을 내어주십시오”라고 청했는데 평원군은 건성으로 허락하고 들어주지 않자, 그의 말의 가벼움을 문제 삼은 식객들이 점점 줄어 반이 되었다. 평원군은 그 이유를 묻고 결국은 첩을 죽여 식객에게 사과하여 다시 식객을 모이게 한 것이다.
모수가 스스로를 천거하여 평원군은 그를 뽑아 초나라 사절단으로 간다. 평원군이 초나라 왕과 합종책에 관하여 논쟁을 하나 종일이 지나도록 결론이 나지 않자 모수가 그 회의장에 뛰어들어 그의 뛰어난 언설로 초왕을 설득하고 합종의 맹약을 하고 조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낸다.
모수자천(毛遂自薦)과 낭중지추(囊中之錐)
BC 260년 진의 백기(白起)가 이끄는 진 군대와 장평에서 전투를 벌이며 조나라 병사 40만 명이 죽어 조(趙) 나라의 국력은 급속도로 약화된다. BC 259 진군은 조의 수도 한단(邯鄲)을 포위하자 조나라는 평원군을 초나라에 사신으로 보내게 된다. 사절단 20명을 뽑아야 하는데 19명을 뽑고 나머지 한 명을 물색 중 모수라는 인물이 스스로 자신을 천거한다(毛遂自贊). 평원군은 그가 미덥지 않아 몇 마디 대화를 나누어 그를 시험하게 된다. “선생은 저의 집에 머문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모수가 대답했다. “3년이 되었습니다.” 평원군이 말하길 “현명한 사람이 세상에 나아가는 것은 마치 송곳이 주머니에 있는 것과 같아서 그 끝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선생은 저 의 집에 머문 지년이 되도록 특별함을 보이지 않으시니 이곳에 남으세요”라고 하였다. 모수가 말하길 “ 저를 그 주머니 속에 넣어주면 끝뿐만 아니라 자루까지도 보였을 것입니다.”라고 하며 가길 청하니 그를 받아주었다. 이것이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고사성어의 유래이다.
秦之圍邯鄲(진지위감단),趙使平原君求救(조사평원군구구),合從於楚(합종어초),約與食客門下有勇力文武備具者二十人偕(약여식객문하유용력문무비구자이십인해)。平原君曰(평원군왈):「使文能取勝(사문능취승),則善矣(칙선의)。文不能取勝(문부능취승),則歃血於華屋之下(칙삽혈어화옥지하),必得定從而還(필득정종이환)。士不外索(사부외색),取於食客門下足矣(취어식객문하족의)。」得十九人(득십구인),餘無可取者(여무가취자),無以滿二十人(무이만이십인)。門下有毛遂者(문하유모수자),前(전),自贊於平原君曰(자찬어평원군왈):「遂聞君將合從於楚(수문군장합종어초),約與食客門下二十人偕(약여식객문하이십인해),不外索(부외색)。今少一人(금소일인),願君即以遂備員而行矣(원군즉이수비원이행의)。」平原君曰(평원군왈):「先生處勝之門下幾年於此矣(선생처승지문하기년어차의)?」毛遂曰(모수왈):「三年於此矣(삼년어차의)。」平原君曰(평원군왈):「夫賢士之處世也(부현사지처세야),譬若錐之處囊中(비약추지처낭중),其末立見(기말립견)。今先生處勝之門下三年於此矣(금선생처승지문하삼년어차의),左右未有所稱誦(좌우미유소칭송),勝未有所聞(승미유소문),是先生無所有也(시선생무소유야)。先生不能(선생부능),先生留(선생류)。」毛遂曰(모수왈):「臣乃今日請處囊中耳(신내금일청처낭중이)。使遂蚤得處囊中(사수조득처낭중),乃穎脫而出(내영탈이출),非特其末見而已(비특기말견이이)。」平原君竟與毛遂偕(평원군경여모수해)。十九人相與目笑之而未廢也(십구인상여목소지이미폐야)。
진나라가 한단(邯鄲)을 포위하자 조나라는 평원군을 보내 도움을 청하며 초나라와 합종을 맺도록 하였는데, 빈객과 문하에서 용맹하면서 문무(文武)를 갖춘 자 20명을 뽑아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
평원군이 말했다. “만약 담판하여 일을 성공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오. 담판하여 성공할 수 없다면 화려한 궁궐 아래에서 피를 묻혀서라도 반드시 합종을 맺어서 돌아오겠소. 선비들은 바깥에서 찾지 말고, 식객과 문하에서 뽑아도 충분할 것이오.” 열아홉 명을 정했으나 남은 한 명은 뽑을 자가 없어서 스무 명을 채우지 못했다. 문하에 모수(毛遂)라는 자가 있었는데 앞으로 나오며 평원군에게 자신을 추천하며 말했다. “제(遂)가 들으니 군께서는 장차 초나라와 합종하기 위해 식객과 문하에서 스무 명을 뽑아 함께 가기로 약속해 놓고 외부에서 찾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한 명이 모자라니 군께서 저를 그 인원을 채워 함께 가시기 바랍니다.”
평원군이 말했다. “선생은 내 문하에 있은 지 몇 년이나 되셨소?” 모수가 말했다. “지금 3년째입니다.” 평원군이 말했다. “무릇 현명한 선비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비유하자면 주머니 속의 송곳과도 같아서 그 끝이 금방 드러나는 법이오. 지금 선생은 내 문하에 있은 지 3년이 되었지만 주변에서 선생을 칭송한 적이 없고, 나도 들어본 적이 없으니, 이는 선생이 재능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생은 갈 수 없으니 남으시오.” 모수가 말했다. “신은 오늘에야 주머니에 들어가기를 청합니다. 제가 일찍부터 주머니에 들어가 있었다면 그 끝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몸통 전체가 밖으로 나왔을 것입니다.” 평원군은 마침내 모수와 함께 가기로 했다. 열아홉 명은 서로 눈짓을 하며 모수를 비웃었으나 겉으로는 내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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