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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32. 外儲說左上

《外儲說左上》_ 經 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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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삼)、挾夫相為則責望(협부상위칙책망),自為則事行(자위칙사행)。故父子或怨譟(고부자혹원조),取庸作者進美羹(취용작자진미갱)。說在文公之先宣言(설재문공지선선언),與句踐之稱如皇也(여구천지칭여황야)。故桓公藏蔡怒而攻楚(고환공장채노이공초),吳起懷瘳實而吮傷(오기회추실이전상)。且先王之賦頌(차선왕지부송),鍾鼎之銘(종정지명),皆播吾之跡(개파오지적),華山之博也(화산지박야)。然先王所期者利也(연선왕소기자리야),所用者力也(소용자력야)。築社之諺(축사지언),目辭說也(목사설야)。請許學者而行宛曼於先王(청허학자이행완만어선왕),或者不宜今乎(혹자부의금호)?如是不能更也(여시부능경야)。鄭縣人得車厄也(정현인득차액야),衛人佐弋也(위인좌익야),卜子妻寫弊褲也(복자처사폐고야),而其少者也(이기소자야)。先王之言(선왕지언),有其所為小而世意之大者(유기소위소이세의지대자),有其所為大而世意之小者(유기소위대이세의지소자),未可必知也(미가필지야)。說在宋人之解書(설재송인지해서),與梁人之讀記也(여량인지독기야)。故先王有郢書而後世多燕說(고선왕유영서이후세다연설)。夫不適國事而謀先王(부부적국사이모선왕),皆歸取度者也(개귀취도자야。

 

서로 의지하여 일을 하면 상대편을 책망하거나 원망하게 되지만, 스스로 하면 일이 잘 진행된다. 혹은 부자간에도 원망을 표출하고, 머슴을 고용할 경우에는 (일을 잘해달라는 뜻에서) 잘 먹이는 경우가 많다. 그런 예는 진나라 문공이 (송나라를 정벌하기에 앞서 무도함을) 선언한 것이라든지, 월왕 구천이 (오나라가) 여황대를 구축한 것을 트집 잡아 공격한 예가 그것이다. 그러므로 제나라 환공은 채에 대한 분노를 숨기고 먼저 초나라를 공격했고, 오기는 한 병사가 나을 것이라는 마음을 품고 그 종기를 빤 것이다.

 

, 선왕이 지은 부()나 송(), ()이나 솥() 따위에 조각한 문자는 모두 (조무령왕이) 반오산에 남겨놓은 흔적과, (진나라 소왕이 ) 화산에 남겨둔 윷짝과 같은 것이다. 선왕들이 목표로 한 것은 이득이었으며, 사용한 것은 힘이었다. 진나라 문공이 사직을 건립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학자의 걷잡을 수 없는 의논을 선왕의 이름을 빌어 행하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는 일이다. 그와 같은 일이 없어지지 않는 것은 정나라 사람이 수레와 멍에를 얻어 그것에 매달려 있는 꼴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며, 위나라 사람이 새를 잡는 역할을 하고, 복장의 아내는 걸레처럼 바지를 만들고, 을자의 아내가 자라에게 물을 먹이고, 어린아이가 억지로 어른 흉내를 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선왕의 말 중에 선왕 자신은 가볍게 생각하고 있던 것을 현대 사람 중에 잘못 중시하고 있는 자가 있고, 또 선왕 자신이 중시하고 있던 것을 현대 사람으로서 가볍게 생각하는 자가 있다. 진실이 제대로 파악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예증으로는 송나라 사람이 글을 해득한 일이나, 양나라 사람이 기()를 읽은 이야기에서 볼 수 있다. 선왕의 글 가운데 영나라 사람의 편지와 같이 틀린 곳이 있으면, 후세에 와서는 그것이 영나라 사람이 한 것으로 해석되는 일이 일어난다. 국사에 적합한 처치를 취하지 않고, 선왕의 말에 의해서 계획을 세우는 일은 시장에서 신발을 살 때에 그 자리에서 자기 발에 맞추려고 하지 않고, 집에 돌아가서 신발의 크기를 재보는 따위의 일과 같은 것이다.

 

說三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

 

人為嬰兒也(인위영아야),父母養之簡(부모양지간),子長而怨(자장이원)。子盛壯成人(자성장성인),其供養薄(기공양박),父母怒而誚之(부모노이초지)。子(자)、父(부),至親也(지친야),而或譙(이혹초)、或怨者(혹원자),皆挾相而不周於己也(개협상위이부주어위기야)。夫賣庸而播耕者(부매용이파경자),主人費家而美食(주인비가이미식)、調布而求易錢者(조포이구역전자),非愛庸客也(비애용객야),曰(왈):如是(여시),耕者且深耨者熟耘也(경자차심누자숙운야)。庸客致力而疾耘耕者(용객치력이질운경자),盡巧而正畦陌畦畤者(진교이정휴맥휴치자),非愛主人也(비애주인야),曰(왈):如是(여시),羹且美錢布且易云也(갱차미전포차역운야)。此其養功力(차기양공력),有父子之澤矣(유부자지택의),而心調於用者(이심조어용자),皆挾自心也(개협자위심야)。故人行事施予(고인행사시여),以利之為心(이리지위심),則越人易和(칙월인역화);以害之為心(이해지위심),則父子離且怨(칙부자리차원)。

 

사람이 어렸을 때, 부모의 양육이 소홀하면, 그 자식은 성장하여 부모를 원망하게 된다. 또 그 자식이 장년이 되었을 때, 부모에 대한 효도를 망각하면 그 부모는 자식을 책망하게 될 것이다. 부자 사이는 지극히 친밀한 사이인데도 불구하고, 책망하거나 원망한다는 것은 서로가 상대를 믿고서 일을 했고, 자기를 위해서 일을 한다는 마음의 준비가 없었기 때문인 것이다. 머슴을 고용하여 씨앗을 뿌리거나 경작을 시킬 때, 고용주가 집안 살림에서 과용을 하며 좋은 음식을 먹이며 좋은 옷을 입히고, 임금을 지불하는 준비를 하는 것은 그 머슴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게 후대를 해야만 깊이 땅을 팔 것이며, 잡초를 샅샅이 뽑으리라 생각을 하기 때문인 것이다. 머슴이 힘을 내어 재빨리 잡초를 뽑고 밭갈이를 하며, 전력을 기울여 들일을 하는 것은 그 고용주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다. 말하자면 이처럼 부지런히 일을 해야만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옷이나 음식을 벌 수 있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인 것이다. 이처럼 서로의 노력을 기르는 데는 부모와 자식의 은혜가 있지만, 마음이 쓰임에 맞추어 조절하는 것은 모두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을 하여 남에게 시혜를 베풀 때에, 자기에게 이익이 되도록 하게 되면, 적대적인 나라 사람과도 잘 되어질 것이며, 자기 이익을 떠나게 되면 부자간도 서로가 원망하게 될 것이다.

 

명분을 만들어 이익을 챙긴다

文公伐宋(문공벌송),乃先宣言曰(내선선언왈):「吾聞宋君無道(오문송군무도),蔑侮長老(멸모장로),分財不中(분재부중),令不信(교령부신),余來民誅之(여래위민주지)。」

 

진나라 문공은 송나라를 정벌하기에 앞서 이렇게 선언했다. “들은 바에 의하면 송나라 군주는 무도하고, 노인들을 천대하며, 재산의 분배도 공평하지 못할뿐더러 지시와 명령도 믿을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송나라 백성을 위해서 그를 징벌하려고 한다.”

 

越伐吳(월벌오),乃先宣言曰(내선선언왈):「我聞吳王築如皇之臺(아문오왕축여황지대),掘深池(굴심지),罷苦百姓(파고백성),煎靡財貨(전미재화),以盡民力(이진민력),余來為民誅之(여래위민주지)。」

 

월나라 군주가 오왕을 정벌하기에 앞서 이렇게 선언했다. “내가 듣기로 오왕은 여황대를 구축하고 깊은 못을 파는 등 백성을 지치게 했으며, 나라의 재정을 낭비하고 백성의 고통스럽고 피폐하게 만들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오나라 백성을 위해서 그를 주살하려는 것이다.”

 

명분 없는 싸움은 하지 마라

 

 

蔡女為桓公妻(채녀위환공처),桓公與之乘舟(환공여지승주),夫人蕩舟(부인탕주),桓公大懼(환공대구),禁之不止(금지부지),怒而出之(노이출지),乃且復召之(내차복소지),因復更嫁之(인복경가지),桓公大怒(환공대노),將伐蔡(장벌채),仲父諫曰(중부간왈):「夫以寢席之戲(부이침석지희),不足以伐人之國(부족이벌인지국),功業不可冀也(공업부가기야),請無以此為稽也(청무이차위계야)。」桓公不聽(환공부청),仲父曰(중부왈):「必不得已(필부득이),楚之菁茅不貢於天子三年矣(초지청모부공어천자삼년의),君不如舉兵為天子伐楚(군부여거병위천자벌초),楚服(초복),因還襲蔡曰(인환습채왈):余為天子伐楚而蔡不以兵聽從(여위천자벌초이채부이병청종),因遂滅之(인수멸지)。此義於名而利於實(차의어명이리어실),故必有為天子誅之名(고필유위천자주지명),而有報讎之實(이유보수지실)。」

 

채나라 여인이 제나라 환공의 부인이 되었다. 환공이 그 부인과 함께 뱃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부인이 배를 흔들었다. 환공은 무서워하며 금지했으나 멈추지 않았다. 분노하여 친정으로 내쫓았고  이내 다시 불러들이려 하니, 그러나 채나라에서는 그 공주를 다른 곳으로 시집을 보내버렸다. 환공은 크게 노하여 채나라를 치려고 했으나 관중이 그것을 말렸다. “부부지간의 불화를 이유로 타국을 정벌하시겠다는 공업을 바랄 수 없습니다. 이일을 기회로 정벌을 도모하는 것을 하지 말기를 청하옵니다.” 그러나 환공은 듣지 않았다. 그러자 관중이 다시 말했다. “부득이하게 정벌하시겠다면, 이런 계략은 어떻습니까. 그러니까 초나라가 천자께 청모를 헌상하지 않은지가 3년째나 됩니다. 그러니 왕께서는 그것을 이유로 초나라를 토벌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초나라가 항복해 오면 다시 돌아오는 길에 채나라를 토벌하시되 : “'나는 천자를 위해 초나라를 공격했으나 채나라가 군사를 보내지 않았으므로 멸망시킨다.”라고 말하고 치십시오. 이렇게 하면 명분에 맞고 실리에도 이롭습니다. 반드시 천자를 위해 벌하는 명분이 있고, 복수하는 실리가 있을 것입니다.”

 

고마운 마음에 목숨을 건다

오기가 병사의 종기를 빨아내다

 

吳起為魏將而攻中山(오기위위장이공중산),軍人有病疽者(군인유병저자),吳起跪而自吮其膿(오기궤이자전기농),傷者之母立泣(상자지모립읍),人問曰(인문왈):「將軍於若子如是(장군어약자여시),尚何為而泣(상하위이읍)?」對曰(대왈):「吳起吮其父之創而父死(오기전기부지창이부사),今是子又將死也(금시자우장사야),今吾是以泣(금오시이읍)。」

 

오기는 위나라의 장수로 중산을 공격할 때, 군인 중에 종기가 난 사람이 있었다. 오기는 무릎을 꿇고 그의 고름을 빨아주었다. 그 병사의 어머니가 서서 울고 있었다. 사람들이 물었다. '장군께서 당신의 아들을 이렇게 돌보시는데, 왜 우십니까?' 어머니가 대답했다. '오기 장군이 그의 아버지의 상처를 빨아주었는데 (감복하여 오기 장군을 위해) 그의 아버지는 죽었습니다. 이제 이 아들도 죽을 것 같아 나는 울고 있습니다.”

 

가식을 없애라

 

趙主父令工施鉤梯而緣播吾(조주부령공시구제이연파오),刻疏人跡其上(각소인적기상),廣三尺(광삼척),長五尺(장오척),而勒之曰(이륵지왈):「主父常遊於此(주부상유어차)。」

 

조나라 주보(무령왕)가 장인에게 갈고리와 사다리를 만들어 반오산 봉우리에 오르도록 하였고, 그 위에 사람의 발자국을 새기게 하였다. 너비는 3, 길이는 5척이며, '주보가 항상 이곳을 노닐었다'라고 새겨 넣었다.

 

秦昭王令工施鉤梯而上華山(진소왕령공시구제이상화산),以松柏之心為博(이송백지심위박),箭長八尺(전장팔척),棋長八寸(기장팔촌),而勒之曰(이륵지왈)「昭王嘗與天神博於此(소왕상여천신박어차)」矣(의)。

 

진 소왕이 장인에게 갈고리를 설치하고 사다리를 만들어 화산에 오르게 하였고, 소나무와 잣나무의 심재로 도박판을 만들었다. 주사위의 크기가 길이가 8, 바둑판은 길이가 8촌이며, '소왕이 이곳에서 천신과 바둑을 두었다'라고 새겨 넣었다.

 

文公反國(문공반국),至河(지하),令籩豆捐之(령변두연지),席蓐捐之(석욕연지),手足胼胝(수족변지),面目黧黑者後之(면목려흑자후지),咎犯聞之而夜哭(구범문지이야곡),公曰(공왈):「寡人出亡二十年(과인출망이십년),乃今得反國(내금득반국),咎犯聞之不喜而哭(구범문지부희이곡),意不欲寡人反國邪(의부욕과인반국사)?」犯對曰(범대왈):「籩豆所以食也(변두소이식야),席蓐所以臥也(석욕소이와야),而君捐之(이군연지);手足胼胝(수족변지)、面目黧黑(면목려흑),勞有功者也(로유공자야),而君後之(이군후지)。今臣有與在後(금신유여재후),中不勝其哀(중부승기애),故哭(고곡)。且臣為君行詐偽以反國者眾矣(차신위군행사위이반국자중의),臣尚自惡也(신상자악야),而況於君(이황어군)?」再拜而辭(재배이사),文公止之曰(문공지지왈):「諺曰(언왈):築社者(축사자),攐撅而置之(건궤이치지),端冕而祀之(단면이사지)。今子與我取之(금자여아취지),而不與我治之(이부여아치지);與我置之(여아치지),而不與我祀之(이부여아사지);焉可(언가)?」解左驂而盟于河(해좌참이맹우하)。

 

문공이 진(晉)나라로 돌아가, 황하에 이르러, 제기와 그릇을 버리고, 자리와 이불을 버리며, 손발이 굳은살로 덮이고 얼굴이 검게 그을린 자들을 뒤로하였다.구범이 이를 듣고 밤에 울었다. 문공이 말하기를, '과인이 20년 동안 망명 생활을 하다가 이제야 나라로 돌아왔는데, 구범이 이를 듣고 기뻐하지 않고 우는 것은 과인이 나라로 돌아오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인가?' 구범이 대답하기를, '제기와 그릇은 음식을 먹기 위한 것이고, 자리와 이불은 잠을 자기 위한 것인데, 군주께서 그것을 버리셨습니다. 손발이 굳은살로 덮이고 얼굴이 검게 그을린 자들은 수고하여 공이 있는 자들인데, 군주께서 그들을 뒤로하셨습니다.이제 신이 그들과 함께 뒤에 있으니, 마음속으로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울었습니다. 또한 신이 군주를 위해 거짓과 속임수를 써서 나라로 돌아오게 한 자들이 많으니, 신이 스스로도 미워하는데, 하물며 군주는 어떻겠습니까?’ 두 번 절하고 사직하려 하자, 문공이 그를 말리며 말하기를, '속담에 이르기를, 사당을 세우는 자는 그것을 뽑아 세우고, 단정하게 예를 갖추어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그대가 (나와 갖은 고생을 다해) 함께 그것(나라)을 되찾았으면서 나와 함께 다스리지 않고, 나와 함께 그것(사직)을 세웠으면서, 나와 함께 제사를 지내지 않으니, 어찌 되겠습니까?' 수레의 왼쪽 말을 끌러 재물로 바치며 황하에서 맹세하였다.

 

융통성이 없는 것은 병이다

 

정현인복자(鄭縣人卜子),사기처위고(使其妻為褲),기처문왈(其妻問曰):「금고하여(今褲何如)?」부왈(夫曰):「상오고고(象吾故褲)。」처자인훼신령여고고(妻子因毀新令如故褲)。

 

추현 사람 복자가 그의 아내에게 바지를 만들게 했다. 아내가 묻기를, '이번 바지는 어떻게 만들까요? ' 남편이 말하기를, '옛날의 것과 같이 만들어주시오.' 아내는 새로 만든 바지를 찢어 헌 바지처럼 만들었다.

 

정현인유득차액자(鄭縣人有得車軛者),이부지기명(而不知其名),문인왈(問人曰):「차하종야(此何種也)?」대왈(對曰):「차차액야(此車軛也)。」아우복득일(俄又復得一),문인왈(問人曰):「차시하종야(此是何種也)?」대왈(對曰):「차차액야(此車軛也)。」문자대노왈(問者大怒曰):「낭자왈차액(曩者曰車軛),금우왈차액(今又曰車軛),시하중야(是何眾也)?차녀기아야(此女欺我也)。」수여지두(遂與之鬥)。

 

정현 사람 중에 수레의 멍에를 얻은 자가 있었는데, 그 이름을 알지 못하여 사람에게 물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대답하기를, '이것은 수레의 멍에입니다.' 얼마 후 또 하나를 얻어 사람에게 물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대답하기를, '이것은 수레의 멍에입니다.' 묻는 자가 크게 화를 내며 말하기를, '이전에는 수레의 멍에라 하더니, 지금도 수레의 멍에라 하니, 이것이 어찌 여러 가지인가? 네가 나를 속이는구나.' 그리고는 그와 싸웠다.

 

처지가 다르다

 

위인유좌익자(衛人有佐弋者),조지(鳥至),인선이기권휘지(因先以其裷麾之),조경이부사야(鳥驚而不射也)

위나라에 사냥을 돕는 자가 있었는데, 새가 오자 먼저 그의 옷을 휘둘렀다. 새가 놀라서 쏘지 못했다

 

鄭縣人卜子妻之市(정현인복자처지시),買鱉以歸(매별이귀),過潁水(과영수),以為渴也(이위갈야),因縱而飲之(인종이음지),遂亡其鱉(수망기별)。

정현 사람 복자의 아내가 시장에 가서 자라를 사서 돌아오다가, 영수를 지나면서 자라가 목이 마를 것이라고 생각하여 물에 풀어주어 마시게 했더니, 결국 자라를 잃어버렸다.

 

夫少者侍長者(부소자시장자음),長者亦自(장자음역자음야)

어린아이가 어른을 모시고 술을 마실 때, 어른이 술을 마시면 어린이도 함께 마신다.

 

一曰(일왈)。魯人有自喜者(로인유자희자),見長年飲酒不能釂則唾之(견장년음주부능조칙타지),亦效唾之(역효타지)。

노나라에 자랑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나이 많은 사람이 술을 마시다가 다 마시지 못하고 뱉는 것을 보고, 그도 따라서 뱉었다."

 

옛글에 연연하지 마라

 

《書()》曰():「紳之束之(신지속지)。」宋人有治者(송인유치자),因重帶自紳束也(인중대자신속야)。人曰(인왈):「是何也(시하야)?」對曰(대왈):「書言之(서언지),固然(고연)。」

 

"《서경》에 이르기를, '끈으로 묶어라.' 송나라에 다스리는 자가 있었는데, 무거운 띠를 끈으로 묶었다. 사람들이 물었다. '이것은 무엇인가?' 대답하기를, '서경에서 말한 것이니, 당연하다.'

 

《書(서)》曰(왈):「既雕既琢(기조기탁),還歸其樸(환귀기박)。」梁人有治者(량인유치자),動作言學(동작언학),舉事於文(거사어문),曰難之(왈난지),顧失其實(고실기실),人曰(인왈):「是何也(시하야)?」對曰(대왈):「書言之固然(서언지고연)。」

 

《서경》에 이르기를, '이미 조각하고 다듬었으면, 다시 본래의 소박함으로 돌아가라.' 양나라에 다스리는 자가 있었는데, 행동과 말이 모두 학문적이고, 일을 할 때 문장을 사용하며, 어려움을 말하였으나, 실제를 잃었다. 사람들이 물었다. '이것은 무엇인가?' 대답하기를, '서경에서 말한 것이니, 당연하다.

 

표시를 믿을까 발을 믿을까

 

郢人有遺燕相國書者(영인유유연상국서자),夜書(야서),火不明(화부명),因謂持燭者曰(인위지촉자왈):「舉燭(거촉)。」云而過書舉燭(운이과서거촉),舉燭(거촉),非書意也(비서의야),燕相受書而說之(연상수서이설지),曰(왈):「舉燭者(거촉자),尚明也(상명야),尚明也者(상명야자),舉賢而任之(거현이임지)。」燕相白王(연상백왕),王大說(왕대설),國以治(국이치),治則治矣(치칙치의),非書意也(비서의야)。今世舉學者多似此類(금세거학자다사차류)。

 

영나라 사람이 연나라 재상에게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 있었는데, 밤에 글을 쓰다가 불빛이 밝지 않자, 촛불을 들고 있는 사람에게 '촛불을 들어라'라고 말했다. 그런데 실수로 '촛불을 들어라'라는 말을 글에 써버렸다. 연나라 재상이 그 편지를 받고 해석하기를, '촛불을 들라는 것은 밝음을 숭상하는 것이다. 밝음을 숭상하는 것은 현자를 들어 임명하는 것이다.' 연나라 재상이 왕에게 이를 보고하자, 왕이 크게 기뻐하며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다. 나라가 잘 다스려졌지만, 이는 편지의 본뜻이 아니었다. 오늘날 학문을 하는 사람들 중에도 이와 비슷한 경우가 많다.

 

鄭人有且置履者(정인유차치리자),先自度其足而置之其坐(선자도기족이치지기좌),至之市而忘操之(지지시이망조지),已得履(이득리),乃曰(내왈):「吾忘持度(오망지도)。」反歸取之(반귀취지),及反(급반),市罷(시파),遂不得履(수부득리),人曰(인왈):「何不試之以足(하부시지이족)?」曰(왈):「寧信度(녕신도),無自信也(무자신야)。」

 

정나라에 신발을 사려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먼저 자신의 발을 재고 그 치수를 자리에 두었다. 시장에 가서 신발을 사려했으나 치수를 가져오는 것을 잊었다. 신발을 고른 후, '내가 치수를 가져오는 것을 잊었다'라고 말하며 집으로 돌아가 치수를 가져왔다. 다시 시장에 돌아왔을 때, 시장이 이미 끝나 신발을 사지 못했다. 사람들이 물었다. '왜 발로 직접 신어보지 않았습니까?' 그는 '차라리 치수를 믿지, 자신을 믿지 않는다'라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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