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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좌전

계문자(季文子), 삼환(三桓)의 등장

계문자(季文子), 삼환(三桓)의 등장

 

 

 

노나라의 역사는 기원전 1042(백금) ~249(노경공)까지 이어진다. 주나라 문왕의 아들 주공 단()이 형인 무왕에게 받은 봉토를 그의 아들 백금(伯禽)에게 다스리게하던 주나라의 혈족 국가이다. 춘추의 기록은 노은공 즉위(BC722) 부터 노애공 27(BC 468)까지의 기록이다. 그 왕조의 다스림 중 노나라 군주의 통치 권력이 작동한 시기는 노 문공 18(BC 609 : 노은공이래 113) 기록이고 그 나머지는 삼환(三桓:계손 맹손 숙손)의 대부가 정치권력을 잡은 시기이다. 이 삼환이 정권을 잡은 기간은 노 선공원년부터 애공 27 141년이나 지속된다.

 

이에 노나라 정권이 삼환에게 넘어가게 된 결정적 계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노 문공에게 두명의 비가 있었는데 첫째 비 제나라 여인 애강(哀姜)이고 아들 악()과 시() 두명이 있었고 두 번째 비는 경영(敬嬴)이며 슬하에 아들 (훗날 선공) 낳았다. 그러나 문공이 총애한 것은 경영이였고 경영이 자기 아들을 보위에 올리려는 욕심에 대부 양중(공자 ) 사사로이 섬기며 선공 옹립을 계획한다. 결국은 선공이 즉위하고 적자였던 악과 그의 동생 시를 죽게 것이 발단이 된다. 이로서 군주의 정권이 군신(群臣)들에게 이양되며 군주는 허울만 있는 군주로 전락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노나라에서 대부가 정권을 잡은 초기 계씨(季孫) 계문자는 그나마 군주를 섬기고 실권을 장악한 대부 하나였다. 계문자는 선공과 성공 2대에 걸쳐 재상을 지내며 군주 대신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민심을 얻게 되는 계기가 되며 자연스레 2대에 걸친 정치가 군주에서 대부로 정권이 넘어가는 계기가 것이다

계문자는 결코 사사로운 재산을 축적하지 않았다. 그리고 충성스럽고 신하된 도리의 내용이 일부 문헌에 보인다. 그의 위정자로서의 일화는 춘추좌전 양공 5 유향이 지은 국어(國語) 등장한다.

 

만약 악행을 해서 정권을 탈취하였다면 역사는 그들을 가만 두지 않았을 것이고 주나라를 위시한 제후국에서도 부도(不道)하고 무례(無禮)하다 하여 정벌하였을 것이다 선공 18 성공16년에 거친 대부들의 세력은 더욱더 공고해지고 정권은 점점 대부에게로 넘어가며 대부들의 후손들에게 세습된 것이다.

 

노나라의 권력구조는 계문자 시대부터 상당히 안정되어 있었다 계손 맹손 숙손 3 가문에 의해 아주 견고한 삼각 시스템을 이루고 나라를 통치 해간 것이다. 기간 동안 실정으로 인한 민란의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노나라를 다스렸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들의 공실의 무시와 멸시를 견디지 못한 일부 제후들이 오히려 삼환을 몰아내려 획책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한 것은 민심이 군주에게 떠나 삼환 가문에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해본다. 계문자 사후 소공은 빼앗긴 정권들 되찾으려 하다 제나라로 망명 군주의 신세로 전락하고 또한 노애공 역시 계강자의 위세에 눌려 위나라로 달아나고 추나라를 거쳐 월나라로 달아 났다 결국 유산씨의 집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좌전 양공 5(기원전 568)

季文子卒,大夫入斂,公在位,宰家器葬備,無衣帛之妾,無食粟之馬,無藏金玉,無重器備,君子是以知季文子之忠於公室也,相三君矣,而無私積,可不謂忠乎

 

계문자가 죽자 대부가 대부의 소렴에는 군주가 참석한다. 계씨집안의 가신 비가 장례에 쓸 가재도구를 준비하는데 비단을 입은 첩이 없고 곡식을 먹는 말이 없고 금과 옥을 모아두지 않았고 중요한 기물을 도 없었다. 군자가 이것으로 계문자가 공실의 충직한 신하임을 알았다. 세명의 군주의 재상이며 사사로이 재산을 축적하지 않았는데 충성스럽다 아니할 수 있는가?

 

 

국어(國語) 노어(魯語) 上중에서..

 

季文子相宣、成,無衣帛之妾,無食粟之馬。仲孫諫曰:「子魯上卿,相二君矣,妾不衣帛,馬不食粟,人其以子愛,且不華國乎!」文子曰:「吾亦愿之。然吾觀國人,其父兄之食粗而衣惡者猶多矣,吾是以不敢。人之父兄食粗衣惡,而我美妾與馬,無乃非相人者乎!且吾聞以德榮國華,不聞以妾與馬。

 

계문자는 선공과 성공 두 군주이 재상이였으나 그의 첩은 비단옷을 입지 않았고, 그의 말도 좋은 여물을 먹지 않았다. 仲孫 (중손비:맹헌자 아들)가 그에게 충고했다. “그대는 노나라의 上卿(상경)으로 2대에 걸쳐 재상을 지냈는데, 첩은 비단옷을 입지 않고 말은 좋은 여물을 먹지 못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그대를 인색하다고 여기며 그대가 나라의 체면을 구긴다고 하지 않겠소? 계문자가 대답했다.“나 또한 첩이 비단옷을 입고 말이 좋은 여물을 먹었으면 하오. 그러나 백성들을 보니, 가족이 거친 곡식을 먹고 해진 옷을 입는 사람이 매우 많소. 그래서 내가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오. 백성들의 가족이 거친 곡식을 먹고 해진 옷을 입고 있는데도 내가 첩과 말을 아름답게 꾸민다면, 이는 군주를 보좌하는 사람이 할 일이 아니오. 또 나는 ‘덕이 빛나야 나라의 체면도 산다’고 들었소. 첩과 말을 꾸며 나라를 빛냈다는 말은 아직 들어본 적이 없소.

 

 

 

문자(文子) 이름이 행보(行父)이다 시호에서도 미루어 짐작해보면 문채나는 사람 글을 많이 읽어 박학 다식한 사람인 것으로 보인다. 계문자의 학식과 정치철학을 엿볼 있는 대목이 노선공 원년에 나온다. 그의 위정자로서의 면모가 군주보다 뛰어나니 자연스레 민심은 계씨 가문으로 돌아 것으로 짐작된다.

 

춘추좌전 문공 18(BC 609)

 

十八年,春,齊侯戒師期,而有疾,醫曰,不及秋,將死,公聞之,卜曰,無及期,惠伯令龜,卜楚丘占之,曰,齊侯不及期,非疾也,君亦不聞,令龜有咎,二月,丁丑,公薨--- 중략

文公二妃,敬嬴生宣公,敬嬴嬖,而私事襄仲,宣公長,而屬諸襄仲,襄仲欲立之,叔仲不可,仲見于齊侯而請之,齊侯新立,而欲親魯,許之。

冬,十月,仲殺惡及視,而立宣公,書曰,子卒,諱之也,仲以君命召惠伯,其宰公冉務人止之,曰,入必死,叔仲曰,死君命可也,公冉務人曰,若君命可死,非君命何聽,弗聽,乃入,殺而埋之馬矢之中,公冉務人奉其帑以奔蔡,而復叔仲氏

夫人姜氏歸于齊,大歸也,將行哭而過市,曰天乎,仲不道,殺適,立庶,市人皆哭,魯人謂之哀姜-- 중략

 

문공 18년 봄 제후(의공)가 출병 기일을 하달하는데 병에 걸려 의사가 말하길 가을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문공이 그 소식을 듣고 점을 치라며 이르길  출병일에 미치지 못하고 죽길 바라노라혜백에게 거북에게 점칠 내용을 말했다. 복초구가 점을 치며 말하길 제후는 그 기일에 미치지 못할 것이 병 때문이 아닙니다. 군주 도한 그 소식(부고)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명귀한(거북에게 제후의 일찍 죽음을 바라는 내용을 알린 사실) 사람도 화가 있을 것입니다. “ 2월 정축일에 노 문공이 훙(서거)하였다.---중략

 

문공에게 두명의 비가 있는데 두번째 비 경영이 선공을 낳고 경영은 총애를 받았다. 그리고 대부 양중을 사사로이 섬기고 선공이 장성하자 양중에게 선공을 맡겼다. 양중이 그를 군주로 옹립하려하자 숙중이 반대하였으나 중이가 제후를 만나 청을 하니 제후는 새로이 즉위하여 노나라와 치내지려 그것을 허락하였다.

겨울 10월 중이가 악과 시를 죽이고 선공을 옹립하였다. ‘태자께서 돌아가셨다하고 한 것은 그죽음의 기록을 꺼려서이다. 중이 군주의 명을 빌어 혜백을 불러들이니 그의 가신 공염무인이 그를 막아서며 이르길 들어가면 반드시 죽습니다숙중이 말하길 군주의 명에 따라 죽는 것은 가할 것이다공염무인이 이르길 군주의 명이라면 죽어도 괜찬지만 , 군주의 명이 아니라면 어찌 따르시렵니까? 따르지 마십시오. ” 그러나 들어가 죽어서 말 똥에 묻혔다.  공염무인은 그의 식구(처자)를 모시고 채나라로 도망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숙중을 복위시켰다.

첫째부인 강씨가 제나라로 돌아오는데 대귀(大歸: 처가로 돌아와 시가로 가지 않는 것)였다. 가려고 나서며 소리내어 울며 지나가는 저자거리 사람에게 말하길 하늘이여! 중이 부도하여 적자를 죽이고 서자를 세웁니다.” 저자 거리 사람들이 모두 소리 내어 울고 노나라 사람은 그녀를 애강이라 불렀다.

 

莒紀公子生大子僕,又生季佗,愛季佗而黜僕,且多行禮於國,僕因國人以紀公,以其寶玉來奔,納諸宣公,公命與之邑,曰,今日必授,季文子使司寇出諸竟,曰,今日必達,公問其故,季文子使大史克對曰,先大夫臧文仲,行父事君之禮,行父奉以周旋,弗敢失隊,曰,見有禮於其君者事之,如孝子之養父母也,見無禮於其君者誅之,如鷹鸇之逐鳥雀也,先君周公制周禮曰,則以觀德,德以處事,事以度功,功以食民,作誓命曰,賊,掩賊藏,竊賄盜,盜器姦,主藏之名,賴姦之用,大凶德,有常無赦,在九刑不忘,行父還觀莒僕,莫可則也,孝敬忠信吉德,盜賊藏姦凶德,夫莒僕,則其孝敬,則君父矣,則其忠信,則竊寶玉矣,其人,則盜賊也,其器,則姦兆也,保而利之,則主藏也,以訓則昏,民無則焉,不度於善,而皆在於凶德,是以去之,--중략

 

거나라 기공이 태자 복과 계타를 낳고서 계타를 총애하여 적자 복을 폐출하였다.또 나라사람에게 무례한 행위를 많이 저질렀다. 복의 폐출로인해 나라사람이 기공을 시해하고 그나라의 보물을 가지고 노나라로 도망쳐와 선공에게 바쳤다. 선공이 읍을 주라 명하면서 말하길 금일 중으로 반드시 주어라라고 하였다. 계문자가 사구에게 그를 출경시키라며 말하길 금일 중으로 반드시 국경을 통과 시키라고하였다. 공이 그 사유를 묻자, 계문자가 태사극으로 하여 대답하게 하길 선대부 장문중께서 저 행보(계문자의 이름)에게 군주을 모시는 예()에 대해 교육을 하였습니다. 행보가 이를 받들어 따르고 감히 실추하지 않았습니다. 선대부는 말했습니다. 군주에게 예를 갖추는 자를 보면 마치 효자가 부모를 봉양하는 것처럼 모시고, 군주에게 예의가 없는 자를 보거든 마치 매가 까치를 쫓듯 주살하라.” 선군 주공이 주례(周禮)를 제정할 때 말하시길 예법으로 그 덕을 살피고 덕으로서 일을 처리하며 일로서 공(실적)을 헤아리며 공적으로서 백성을 먹인다서명을 지어 말씀하셨습니다. “법을 어기면 적(:도적)이고,적을 가려주면 장(:감추어줌)이다. 남몰래 뇌물을 수수함도 도적(盜賊)이고 기물(器物)을 도적질 한 것을 간악함이라 한다. 적을 은닉한 자가 이름을 얻고 간악한자를 신뢰하여 씀을 큰 흉덕이라하며  상형(통용되는 법)이 있으면 사면은 없다. 구형에 따라 처분하고 남용을 말라라고 했습니다. 저 행보가 거나라 태자 복을 살펴보니 본받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신을 일러 길한 덕이라 하고 도,,,간을 일러 흉덕이라 합니다. ㅁ릇 거나라 복은 그 효와 경으로 본다면 즉 군주를 시해한 자이고 그 충과 신으로 본다면 즉 나라의 보옥을 훔친자 입니다. 그 사람은 도적인 것입니다. 그 기물은 간조(훔친 기무)입니다. 그를 보호하여 이익을 준다면 즉 군주께서는 장()인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친다면 백성들은 혼란에 빠지고 법이 없을 것입니다(지키지 않다) 백성이 선함을 헤아리지 못하면 모두가 흉덕에 마음을 둘 것이니 이런 까닭으로 그를 쫓아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