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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좌전

초장왕(楚莊王)_ 인내와 관용의 리더쉽으로 패자가 되다

초장왕(楚莊王)

 

 

 

 

                                              

 

춘추가 제후국간 또는 소국간의 정벌(征伐)과 시대였다면 전국시대는 전쟁(戰爭)을 통해 주변국을 멸()과 병탄(倂呑)을 하는 시대였다. 춘추시대는 주 왕실의 권위가 무너지고 패권을 가진 제후국에 의해 중국 대륙의 질서가 잡혀가는 시대였다. 이는 일본의 중세 막부시대와 비슷하다.  일본 천황의 권위가 무너지며 일본에서 1192년 미나모토 요리토모에 의해 카마쿠라 막부가 탄생하고 쇼군이라 불리어지는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천왕을 대신해 정치 외교 경제 등의 모든 권력을 쥐고 섭정을 한 것이다. 이 막부시대는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멸망한 무로마치 막부 시대를 거쳐 1867년 도구카와 막부가 망할 때까지 약 600여 년 간의 지속되었다. 천왕이 아닌 정치, , 제적 등의 모든 실권을 지닌 쇼균에 의해 통치되는 시대가 전개되었는데 이 시기가 중국의 춘추 오패의 실권 장악시대와 흡사하다. 즉 춘추오패는 周나라 천자를 대신하며 모든 제후국을 모아 회맹을 하여 잘못이 있는 국가를 정벌하고 그 나라를 멸망케 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군주(위정자)를 내 치거나 혹은 죽이고 나서 새로운 제후를 세우는 방식이었다.

 

춘추 시대는 다섯 패자가 등장한다. 그러나 나라를 기준으로 하면 춘추시대의 패권은 양자강을 중심으로 남쪽의 초()와 황허를 중심으로 진()이 양분하고 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오패를 최초로 규정했던 글은 순자(荀子)》 왕패(王覇)편 五覇의 이야기가 나온다 연대순으로 제()나라의 환공(桓公), ()나라의 문공(文公), ()나라의 장왕(莊王), ()나라의 왕 합려(闔閭), ()나라의 왕 구천(勾踐)을 가리키는데, 후대 역사가의 평가에따라 진()나라의 목공(穆公), ()나라의 양공(襄公)이나 오나라 왕 부차(夫差) 등을 꼽는 경우도 있다.                                            

 

 

 

 

故齊桓、晉文、楚莊、吳闔閭、越勾踐,是皆僻陋之國也,威動天下,彊殆中國,無故焉,略信也。是所謂信立而霸也。

 

고제환 진문 초장 오합려 월구천 시개비루지국야 위동천하 강태천하 무타고야 략신야 시소위신립이패야.        

 

 

 

 

오늘 이야기를 풀어갈 인물은 초장왕이다. 아마도 춘추오패 중 가장 많은 일화와 군주로서의 덕성과 자질을 잘 갖춘 인물이기도 하다. 춘추좌전 기록에 의하면 초장왕은 노 선공 14 (기원전 613)에 왕이 되었다.  초나라의 제22대 군주(재위: 기원전 613 ~ 기원전 591)이다. 이름은 려()이다. 초성왕의 손자이자 목왕의 아들이며, 공왕의 아버지이다. 목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나 공자 섭()이 모반을 일으켜 초장왕은 잡혀 갖히는 수모를 겪는다. 그러나 초나라 내에  공자 섭의 반대 세력에 의해 섭공자가 축출되고 장왕은 구출되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사기 초세가에는  풀려난 장왕은 수도로 돌아와 정사는 돌보지 않고 삼년동안 놀고 먹기만 했다. 불비불명(不蜚不鳴)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오게 된다. 유향의 신서(新序), 한비자의 유노(喩老),사기 楚世家  등에서 볼수 있다.

 

초 목왕이 죽고 왕위를 물려 받을때 초나라 내부의 권신대부 세력들의 힘이 강하였고 또한 외부의 세력들 제, 진을 위시한 주변국의 패권 경쟁에서도 뒤지고 있고 이양기간에 약해진 왕권을 틈타 약소국 마저 변방을 침략해오는 상황에서 현명한 군주 장왕은 삼년동안 지켜보며 누가 국가 경영에 도움되고 도움되지 않는 지를 살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난신 적자를 제거하고 인재를 등용해 나라를 안정시켜 백성들이 기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불비불명(不蜚不鳴)

 

      

 

(초장왕과 오거)

 

莊王即位三年,不出號令,日夜樂,令國中曰:「有敢諫者死無赦!」伍入諫。莊王左抱鄭姬,右抱越女,坐鐘鼓之閒。伍曰:「願有進隱。」曰:「有鳥在於阜,三年不蜚不鳴,是何鳥也?」莊王曰:「三年不蜚,蜚將沖天;三年不鳴,鳴將驚人。退矣,吾知之矣。」居數月,淫益甚。大夫蘇從乃入諫。王曰:「若不聞令乎?」對曰:「殺身以明君,臣之願也。」於是乃罷淫樂,聽政,所誅者數百人,所進者數百人,任伍、蘇從以政,國人大說。是歲滅庸。六年,伐宋,獲五百乘。

 

초왕즉위삼년 불출호령 일야위악 령국중왈 : 유감간자사무사! 오거입간. 장왕좌포정희 우포월녀 좌종고지한. 오거왈  : 원유진은. : 유조재어부 삼년불비불명 하위조야? 장왕왈 삼년불명 명장중천 ; 삼년불명 명장경인. 거퇴의 오지지의. 거수월 음익심. 대부소종내입간. 왕왈 : 약불문령호? 대왈 : 살신이명군 신지원야. 어시이파음악 청정 소주자수백인 소진자수백인 임오거 소정이정 국인대열. 시세멸용. 육년 벌송 획오백승.

 

 

초장왕 즉위 삼 년이 되도록 정령을 내리지 않으며 밤낮으로 음악을 들으며 도성 안에 명령을 내리길 " 감히 간언하는 자가 있다면 용서치 않고 죽일 것이다! " 충신 오거가 들어와 간언하였다. 장왕은 좌측에 정나라 미녀를 우측에 월나라 여인을 끼고 앉아 한가로이 음악을 듣고 있었다. 오거가 말하길 "수수께끼를 올리겠습니다. 언덕 위에 새가 있는데 삼년 동안 날지도 울지도 않는데 무슨 새인지 아십니까?" 장왕이 말하길 " 삼년을 날지 않았으니 날아오르면 장차 하늘을 가득 채울 것이고 ; 삼년을 울지 않았으나 운다면 장차 세상사람들이 놀랄 것이다. 물러가라.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수개월이 지나고 음탕함은 더욱 심해졌다. 대부 소종이 입궐하여 간언하였다. 왕이 말하길 " 내 명령을 듣지 못하였는가? " 대답하길 " 신이 죽어 군주를 밝힌다면 신이 원하는 바입니다. 그러자 장왕은 음란한 음악들 그만 두게 하고 정사를 돌보며 벌준 사람이 수 백 명 중용시킨 자들이 수 백 명이었다. 오거와 소종으로 하여 정무를 맡기니 나라사람이 크게 기뻐하였다. 이해에 용나라를 멸망시켰다.                                                        

 

 

 

 

초장왕의 정권초기 왕권이 안정 되기전 시련을 겪게되는데  그 첫해가 공자 섭의 반란으로 왕권 탈취와  대 기근으로 인한 기아와 융족을 등에 업음 용나라의 침입을 들 수 있다. 그 내용이 좌전 문공 14년과 16년에 기록이 나온다. 초장왕은 즉위 초 3년 환란 극복을 기반으로 하여 왕권을 안정화시켜 가며 춘추 오패의 세번째 패자로 등장을 하며 이후 전국시대까지 초나라가 강대국으로의 기반을 다진 것이다.

 

여기서 나오는 초 장왕의 리더쉽을 본다. 춘추시대 초나라와 같은 제후국은 강력한 왕권이 통치하던 시대도 있었지만 대부의 세력이 강한 시기가 더 오래 존속된 것이 사실이다. 노나라의 삼환세력(, , 숙손) 晉 나라의 (,,) 제나라의 (전성) 등이 있다. 이들 대부의 세력이 막강하여 왕권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고 실제 강씨성의 제나라는 전성자에게 나라가 넘어가고 대제국 晉나라는 조, 위 한, 대부에 의해 나라가 쪼개어지며 전국시대에 들어 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춘추시대 어린 나이에 왕이 되고 공자 섭의 난과 대부 약오씨 세력의 견제, 대기근으로 국가의 재난과 융(오랑캐)와 용국의 침입등을 당한 것이다. 이에 초 장왕은 3년을 준비하였을 것이고 3년 준비 후 힘차게 날아오른 대붕이 된 것이다.  국가의 인적 쇄신을 통해 난신적자를 몰아내고 재능 있는 신하를 중용하여 국가의 대기근을 이겨내고 융족을 토벌한 것이다. 이에 강화된 왕권을 기반으로 노 선공 4(기원전 605) 최대의 정적이었던 약오씨 세력을 꺽어 버린 것이다. 이후 국가 안으로 정치를 안정시키고 근심이 사라진 장왕은 영토확대를 이루며 중원의 패권을 쟁취하였다. 이에 초나라는 제 환공 진문공에 뒤를 이어 세번째 패자가 된 것이다.

 

역사적 사실 관점에서 본다면 춘추좌전에 기록된 초장왕의 행적으로 보아 과연 불비불명의 시절이 있을 수 있었겠느냐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어린 나이에 왕이 되고 그 해 공자 섭의 반란으로 왕위를 잠깐이나마 잃어 버렸고 왕의 권위를 수습해야 될 기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즉위 3년 대기근으로 인해 민심이 이반되고 또한 융족을 등에 업은 庸나라의 침입 등으로 정신 없을 상황에 음주가무와 여색에 빠져있는 것을 용인할 백성과 대부들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춘추좌전 노문공 14

 

楚莊王立,子孔,潘崇,將襲群舒,使公子燮與子儀守,而伐舒蓼,二子作亂,城郢,而使賊殺子孔,不克而還,八月,二子以楚子出,將如商密,廬戢黎及叔誘之,遂殺克,及公子燮   

 

초장왕이 즉위하고 자공 번숭이 서의 여러 지방을 공격할 적 공자 섭과 자의로 하여 수비를 맡게하고 서료를 정벌하였다. 두 사람이 난을 일으켜 영땅에 성을 쌓고 적으로하여 자공을 죽이려하였으나 실패하고 돌아왔다 8월 두 사람은 초장왕을 데리고 탈출하여 상밀로 가려했지만 려대부 집리와 숙균이 투극(자의)과 공자 섭을 유인하여 죽였다.       

 

 

노문공 16

 

楚大饑,戎伐其西南,至于阜山,師于大林,又伐其東南,至于陽丘,以侵訾枝,庸人帥群蠻以叛楚,人率百濮聚於選,將伐楚,於是申息之北門不,楚人謀徙於阪高,賈曰,不可,我能往,寇亦能往,不如伐庸,夫與百濮,謂我饑不能師,故伐我也,若我出師,必懼而歸,百濮離居,將各走其邑,誰暇謀人,乃出師,旬有五日,百濮乃罷

自廬以往,振廩同食,次于句澨,使廬戢黎侵庸,及庸方城,庸人逐之,囚子揚窗,三宿而逸,曰,庸師眾,群蠻聚焉,不如復大師,且起王卒,合而後進,師叔曰,不可,姑又與之遇,以驕之,彼驕我怒,而後可克,先君冒所以服陘隰也,又與之遇,七遇皆北,唯裨,,魚,人實逐之,庸人曰,楚不足與戰矣,遂不設備,楚子乘馹,會師于臨品,分二隊,子越自石溪,子貝自仞,以伐庸,秦人巴人從楚師,群蠻從楚子盟,遂滅庸

 

초대기 용벌기서남 지어부산 사우대림 우벌기동남 지어양구 이침자지 용인솔군만이반초 균인솔백복취어선 장벌초 어시신식지북문불개 초인모사에반고 위가왈 불가 아능왕 구역능왕 불여벌용 부균여백복 위아기불능사 고벌아야. 약아출사 필구이귀 백복리거 장각주기읍 수가모인 이출사 순유오일 백복내파.---- 중략----

초자승일 회사우임품 분위이대 자월자석계 자폐자인 이벌용 진인파인종초사 군만종초자맹 수멸용.

 

 

 

초나라에 대기근이 들어 융이 초의 서남쪽을 공격하여 부산까지 이르고 대림에 주둔했다. 다시 그 동남쪽을 공격하여 양구까지 이르고 자지를 침략했다. 용나라가 여러 만족을 이끌고 초나라를 배신하고 균나라는 백복을 선에 집결하여 장차 초나라를 치려했다 이때 신, 식은 북문을 굳게 닫고 지켰다. 초나라사람이 판고로 천도하려 하자 위가가 말하길 " 안됩니다. 우리가 갈수 있다면 적들도 올 수 있으니 용나라를 치느니만 못합니다. 균과 백복은 우리나라가 기근이 들어 군사를 동원할 수 없다 이르고 있어서 우리를 공격한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출병시키면 그들은 두려워하여 돌아갈 것입니다. 백복은 흩어져 거주하므로 각자의 거주지로 도망갈 것이니 누가 서로 도모해줄 겨를이 있겠습니까? 이내 군사를 동원하고 보름이 지나자 백복의 무리는 곧 흩어져 귀환했다. --- 중략 ---

 

초장왕이 역참마를 타고 임품에서 주둔한 군대와 합류하여 군사를 둘로 나누어 자월은 석계에서 자패는 인에세 용나라를 무찔렀다. 진인나라와 파나라의 군사들이 초나라 군을 따르고 만족 무리들이 초나라와 동맹을 맺어 결국 용나라를 멸망시켰다.  

 

 

 

문정경중(問鼎輕重)

 

 

 

 

중국 하나라의 우임금이 구주(九州)의 장관들이 동을 거두어 주조한 큰 솥을 말하며 두개의 손잡이와 3개의 발이 있는 거대한 솥이다. 하 은 주 시대에 천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기물로 궁중에 보관하였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천하 권력을 상징하는 보물이기도 하다. 초 장왕이 국가 내부의 반란과 대기근을 슬기롭게 해쳐 나가고 육혼의 융족을 정벌하며 주나라에 이르러 천하 패권의 야심을 드러내며 주나라 대신 왕손만에게 정의 무게를 물은 것이다. 춘추 패권의 야욕을 넘어 천자의 자리를 넘보는 물음으로 다소 오만해 보이는 이 물음을 왕 손만은 슬기롭게 답을해 위기를 모면하고 있음을 본다. 초장왕 또한 구정을 차지하려 하지만 마땅한 명분이 없어 한 걸음 물러나 패자로서의 권위를 인정받고 물러난다. 춘추좌전 노선공 3년에 글이 나온다.

 

 

춘추좌전 노선공 3

 

楚子伐陸渾之戎,遂至于,觀兵于周疆,定王使王孫滿勞楚子,楚子問鼎之大小輕重焉,對曰,在德不在鼎,昔夏之方有德也,遠方圖物,貢金九牧,鑄鼎象物,百物而之備,使民知神姦,故民入川澤山林,不逢不若,螭魅罔兩,莫能逢之,用能協于上下,以承天休,桀有昏德,鼎遷于商,載祀六百,商紂暴虐,鼎遷于周,德之休明,雖小,重也,其姦回昏亂,雖大,輕也,天祚明德,有所底止,成王定鼎于郟鄏,卜世三十,卜年七百,天所命也,周德雖衰,天命未改,鼎之輕重,未可問也。       

 

초자벌육혼지융 수지우낙 관병우주강 정왕사왕손만노초자 초자문정이대소경중언 대왈 재덕부재정 석하지방유덕야 원방원물 공그구목 주정상물 백물이위지비 사민지신간 고민입천택산림 불봉불약 이매망량 막능봉지 용능협우상하 이승천휴 걸유혼덕 정천우상 재사육백 상주폭학 정천우주 덕지휴명 수소중야 기간회혼란 수대경야 천조명덕 유소저지 성왕정정우겹욕 복세삼십 복년칠백 턴소명야. 주덕수쇠 천명미개 정지경중 미가문야.

 

초장왕이 육혼의 융족을 정벌하고 결국 낙수까지 이르고 주나라 국경에서 열병식을 거행하니 주정왕이 왕손만으로 하여 초왕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초장왕이 구정의 크기와 경중을 물으니 왕손만이 답하길 "정의 무게는 군주의 덕에 있지 정 자체의 무게에 있지 않습니다. 옛날 하나라가 덕을 지녔을 당시 먼 나라에서 기물에 그림을 그려 바치고 구주의 장관들은 금을 바쳤습니다. 구정을 주조할 때 사물을 세겨 만물이 정에 구비되어 사람들로하여 신령한 것과 간사한 것을 구별을 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백성이 강과 저수지 산과 밀림에 들어가도 사악한 정령들과 마주치지 않았고, 피할 수 있었습니다, 상하가 서로 협력하여 하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하 걸왕이 덕이 어지러워지자 구정은 상나라로 옮겨지고 나라의 제사는 600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상나라 주왕이 정치가 포학해지자 구정은 주나라로 옮겨졌습니다. 군주의 덕이 크고 아름다우면 비록 작으나 무거워 옮길 수 없고 군주의 덕이 간악하고 혼란스러우면 비록 크나 가벼워져 옮길 수 있습니다. 하늘의 밝은 덕을 가진이에게 복이 내리면 정은 자리잡을 곳이 있게 되고 성왕께서 정을 겹욕에 안치하실 때 30 700년을 기원하시자 천명을 내려 주었습니다. 주나라의 덕이 비록 쇠잔해졌지만 천명은 아직 고칠 기미가 없습니다. 구정의 경중을 물을 수 없습니다.

 

 

 

왕권강화(王權强化)

 

약관의 나이에 왕에 올라 미덥지 않던 왕이 국난의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아주 소상히 적고 있다. 물론 사기와 같은 문학적인 흥미가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역사적 사실 관점에서 볼때 초 장왕의 리더쉽은 이때부터 발현되었던 것이다 초 세가 마지막 부분에 용나라를 멸하고 도성안 사람들이 크게 기뻐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국민 여론의 지지를 받은 초 장왕의 다음 목표는 분명히 국내 정치권력의 요직을 점하고 있던 약오 세력의 견제 혹은 축출이었을 것이다. 이 약오씨 세력을 멸하고 이후 춘추시대 강국이었던 晉나라와의 패권경쟁에서 승리하여 진정으로춘추시대 세번째 패자로서 중원을 발아래 둔 것이다.

 

 

춘추좌전 노선공 4

 

初,楚司馬子良,生子越椒,子文曰,必殺之,是子也,熊虎之狀,而豺狼之聲,弗殺,必滅若敖氏矣,諺曰,狼子野心,是乃狼也,其可畜乎,子良不可,子文以,及將死,聚其族曰,椒也知政,乃速行矣,無及於難,且泣曰,鬼猶求食。若敖氏之鬼,不其餒而!及令尹子文卒,令尹,子越司馬,工正,譖子揚而殺之,子越令尹,已司馬,子越又惡之,乃以若敖氏之族,圄伯嬴於陽,而殺之,遂處烝野,將攻王,王以三王之子質焉,弗受,師于漳澨,秋,七月,戊戌,楚子與若敖氏戰于皋滸,伯棼射王,汰輈,及鼓跗,著於丁寧,又射,汰輈,以貫笠轂,師懼,退,王使巡師曰,吾先君文王克息,獲三矢焉,伯棼竊其二,盡於是矣,鼓而進之,遂滅若敖氏. ---중략---

 

초 초사마자량 생자월초 자문왈 필살지 시자야 웅호지상 이시랑지성 불살 필멸약오씨의 언왈 랑자야심 시이랑야 기가육호 자랑불가 자문이위대척 급장사 취기족왈 초야지정 이속행의 무급어난 차읍왈 귀유불식 약오씨지귀 불기뇌이! 급영윤자문졸 투반위영윤 자월위사마 위가위공정 참자양이살지 자월위영윤 이위사마. 자월우오지 내이약오씨지족 어백영어요양 이살지 수처증야 장공왕 왕이삼왕지자위질언 불수 사어장서 추 칠월무일 초자여약오씨전우고호 백분사왕 태주 급고부 저어정녕 우사 태주 이관립곡 사구 퇴 왕사순사왈 오선군문왕극식 획삼시언 백분절기이 진어시의 고이진지 수멸약오씨.

 

애초에 초 사마자량이 아들 월초(약오씨 가문으로 성질이 난폭하여 초 장왕에 배반하고 군대를 일으키다 약오 가문 멸망의 단초가 됨)를 낳았는데 자문이 " 반드시 죽여야 한다. 이 아이는 곰과 호랑이 모습에 이리 승냥이 목소리를 타고나 죽이지 않는다면 반드시 약오가문은 멸망할 것이다.  속담에 이리를 닮은 아이는 마음이 거칠고 이는 이리와 같으니 키울 수 있겠느냐? " 자량이 차마 하지 못하니 자문이 크게 근심하였다. 장차 죽이려 하고 그의 일족을 모아 말하길 "월초가 정치를 맡으면 속히 떠나서 어려움이 없게 하라" 또 울며 말하길 귀신도 제사 밥이 필요한데 약오씨의 귀신들은 굶지 않겠는가! " 영윤 자문이 죽자 투반이 영윤이 되고 자월이 사마가 되고, 위가가 공정(장인들의 長)이 되었는데 자양(투반)을 참소해 그를 죽이고 자월이 영윤이 되고 자신은 사마가 되었다. 자월이 또 그(위가)를 미워하여 약오씨 일족을 이끌고 백영(위가)를 요양에서 죽인 후 증야에 머물며 장왕을 공격하려 했다. 초장왕이 세 왕(문왕 목왕 성왕)의 자손을 인질로 보내려 했지만 받지 않았다. 장왕이 장서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가을 7월 무술일에 고호에서 약오씨 세력과 전쟁을 벌이는데 장수 백분(투초)이 초왕에게 활을 쏘았으나 전차의 끌채를 지나 북걸이까지 날아가 징에 박혔다. 군사들이 두려워 물러나려 하자 초장왕은 군사들을 순시하며 말하길 " 나의 선군이신 문왕께서 식나라를 물리치고 화살 세개를 얻었는데 백분이 두개를 훔쳐가고 이번에 다 써버렸다" 라고 하며 북을 치며 병사를 독려하여 진군시켜 약오씨를 멸망시켰다. --- 중략---

 

 

 

절영지연(絶纓之宴)

 

 

초장왕이 군주로서의 덕성을 이야기 해주는 유명한 일화가 절영지연이라는 고사 성어이다.  초장왕이 투초의 난을 평정한 뒤 공을 세운 신하를 위로하기 위해 연회를 열고 주흥이 무르익어 갈 무렵 바람이 불어 촛불이 꺼지며 누군가 초장왕의 애첩의 옷을 잡아 당기며 희롱을 한 사건이 있다.  유향의 설원에 그 일화가 나온다. 이때 초장왕의 군주로서의 관용의 리더쉽에 감화되어 초장왕이 위기에 빠진 상황을 빠져 나올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다. 즉 초 장왕의 이러한 관용의 리더쉽이 인재를 모으고, 모인 인재를 적재적소에 등용을 하여 당시 중원의 패자로 우뚝 서는 기반이 된 것이기도 하다.

 

 

설원(說苑)  복은(復恩)

 

楚莊王賜群臣酒,日暮酒酣,燈燭滅,乃有人引美人之衣者,美人援其冠纓,告王曰:「今者燭滅,有引妾衣者,妾援得其冠纓持之,趣火來上,視纓者。」王曰:「賜人酒,使醉失禮,奈何欲顯婦人之節而辱士乎?」乃命左右曰:「今日與寡人,不冠纓者不懽。」群臣百有餘人皆去其冠纓而上火,卒盡懽而罷。居三年,晉與楚戰,有一臣常在前,五合五奮,首卻敵,卒得勝之,莊王怪而問曰:「寡人德薄,又未嘗異子,子何故出死不疑如是?」對曰:「臣當死,往者醉失禮,王隱忍不加誅也;臣終不敢以蔭蔽之德而不顯報王也,常願肝腦塗地,用頸血湔敵久矣,臣乃夜纓者。」遂敗晉軍,楚得以,此有陰德者必有陽報也。

 

초장왕사군신주 밍모주감 등촉멸 내유인인미인지의자 미인원절기관영 고왕왈 : 금자촉멸 유인첩의자 첩원득기관영지지 취화래상 시절영자. 왕왈 : 사인주 사취실례 내하욕현부인지절이욕사호? 내명좌우왈 : 금일여과인음 불절관영자불환. 군신백유여인개절거기관영이상화 졸진환이파. 거삼년 진여초전 유일신상재전 오합오분 수각적 졸득승지 장왕괴이문왈 : 과인억박 우미상이자 자하고출사불의여시? 대왈 : 신당사 왕자취실례 왕은인불가주야 ; 신종불감이음폐지덕이불현보왕야 상원간뇌도지 용경혈전적구의 신이야절영자. 수패진군 초득이강 차유음덕자필유양보야.

 

초장왕 군신들에게 술을 내려 날이 저물도록 주연을 즐기고 있는데 등불과 촛불이 모두 꺼져버렸다. 이내 누군가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사람이 있어 애첩은 그자의 갓끈을 잡아 뜯고는 초장왕에게 호소했다. 대왕, 속히 촛불을 켜시고 신첩의 옷을 잡아당기는 자가 있어 신첩이 그자의 관 끈을 당겨 가지고 있습니다. 불을 가져와 관 끈이 끊어진 자를 찾아주십시오." 왕이 말하길 " 내가 저들에게 술을 내려 술에 취해 예의가 없는 것인데 내 어찌 부인의 절개를 드러내기 위해 저들을 욕보인단 말이오? “ 이내 조우에 명을 내려 오늘 과인과 더불어 술을 먹으며 관모의 끈을 끊지 않는 자는 즐겁지 않는 자로 간주 할 것이다.” 군신들 백 여명이 관모의 끈을 끊어버리고 불을 밝혀 연회를 다 즐기고 끝마쳤다. 삼 년이 지나고 晉나라와 초나라간에 전쟁을 치를 때 신하 한명이 항상 선두에 있으며 다섯 번 싸워 다섯 번 분투를 하고 맨 앞에서 적을 물리치 고결국 승리하였다. 초장왕이 괴이하게 여기며 묻길 과인의 그대에게 잘해준 적이 없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이와 같이 죽을 각오로 나가 싸우는가? “ 대답하길 신은 죽어 마땅했습니다. 지난날 술에 취해 실수를 함에도 왕께서는 못 본척하시고 벌하지 않으셨습니다. ; 신은 감히 덮어주신 은혜 세상이 다 알게 왕의 은덕을 갚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항상 몸이 망가져 간이나 머리 골이 진흙바닥에 뒹굴고 목을 다쳐서 솟아나오는 피를 적에게 뿌리려 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신이 그 밤에 관모의 끈이 끊긴 자입니다. “ 마침내 晉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초나라는 강성해졌으며 이것이 음으로 행한 은덕은 반드시 겉으로 드러나 보은을 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