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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사기

삼불여 _ 중국 3대 책사 운주유악(運籌帷幄) 장량

2. 장량

 

 

장량은 중국 한()의 후예로 한(漢) 나라의 정치가이자 개국 공신이다. 자는 자방으로 소하 한신과 함께 한 삼걸(三傑)로 불리운다. 군막에서 계책을 세워 천리 밖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다. 運籌帷幄(운주유악)라는 극찬을 받은 인물이다. 월 범려 한 장량, 후한의 제갈량 등 중국 3대 책사 중 한 명이다.

 

조국 한(韓)나라를 멸망시킨 복수를 위해 전재산을 팔아 자금을 마련하고 창해공을 만나 역사(力士)를 추천받아 진시황의 암살을 시도한다. 그러나 황제의 수레가 아닌 빈 수레를 내려쳐서 실패하고 도망을 간다. 이름까지 바꾸고 하비에 숨어 지내다 황석(黃石)공으로부터 병법서를 받아 익히게 된다. 이 황석공 이야기는 꾸며진 이야기 일 수 있지만 장량이 병법을 배운 것만은 확실한 것이다.  사마천은 이런 소설 같은 이야기를 사기에 넣은 이유를 장량편을 통해 잠시나마 엿볼 수 있다. 유후 장량이 책사로서 성장하는 과정에 결정적 계기는 바로 황석공을 만나는 과정에 드러난다. 즉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 그리고 무례함에 대한 참을성을 이 이야기를 통해 보여준다. 어찌보면 한 고조 유방의 책사로 성장과정에 그를 도와준 이들 그리고 그가 도운 이들로 인해 유방의 위기에 대처 가능한 역량을 키운 것이다. 다리 위에서 만난 황석공이 준 것은 태공병법뿐만 아니다. 젊은 시절 장량이 중국 역사상 손에 꼽을 정도의 책사로 성장한 배경에는 바로 그 황석공이 준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인내(忍耐)와 자중(自重)과 미래를 내다보는 지략(智略)인 것이다.

 

良嘗閒從容步游下邳上(량상한종용보유하비이상),有一老父(유일로부),衣褐(의갈),至良所(지량소),直墮其履下(직타기리이하),顧謂良曰(고위량왈):「孺子(유자),下取履(하취리)!」良鄂然(량악연),欲毆之(욕구지)。其老(위기로),彊忍(강인),下取履(하취리)。父曰(부왈):「履我(리아)!」良取履(량업위취리),因長跪履之(인장궤리지)。父以足受(부이족수),笑而去(소이거)。良殊大驚(량수대경),隨目之(수목지)。父去里所(부거리소),復還(복환),曰(왈):「孺子可矣(유자가교의)。後五日平明(후오일평명),與我會此(여아회차)。」良因怪之(량인괴지),跪曰(궤왈):「諾(낙)。」五日平明(오일평명),良往(량왕)。父已先在(부이선재),怒曰(노왈):「與老人期(여로인기),後(후),何也(하야)?」去(거),曰(왈):「後五日早會(후오일조회)。」五日雞鳴(오일계명),良往(량왕)。父又先在(부우선재),復怒曰(복노왈):「後(후),何也(하야)?」去(거),曰(왈):「後五日復早來(후오일복조래)。」五日(오일),良夜未半往(량야미반왕)。有頃(유경),父亦來(부역래),喜曰(희왈):「當如是(당여시)。」出一編書(출일편서),曰(왈):「讀此則王者師矣(독차칙위왕자사의)。後十年興(후십년흥)。十三年孺子見我濟北(십삼년유자견아제북),穀城山下黃石即我矣(곡성산하황석즉아의)。」遂去(수거),無他言(무타언),不復見(부복견)。旦日視其書(단일시기서),乃太公兵法也(내태공병법야)。良因異之(량인이지),常習誦讀之(상습송독지)

 

장량이 일찍이 한가한 틈을 타 하비의 다리 위를 한가로이 거닐고 있었는데, 한 노인이 거친 삼베옷을 걸치고 장량에게 다가와 자신의 신발을 다리 밑으로 곧장 던져버리고는 장량을 돌아보며 말했다. “젊은이,내려가 신발을 가져와라.” 장량이 놀라서 그를 때려주려고 했다. 그 사람이 노인인 지라 억지로 참고 다리 아래로 내려가 신발을 가져왔다. 그러자 노인이내게 신겨라!”라고 했다. 장량은 이미 신발을 주워온 지라 몸을 꼿꼿이 세운 채 무릎을 꿇고 신발을 신겼다. 노인은 발을 뻗어 신발을 신고는 웃으며 가버렸다. 장량은 매우 놀라 떠나는 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노인이 1리쯤 가다가 다시 돌아와 말했다. “가르칠 만한 젊은이로다. 닷새 뒤 새벽에 여기에서 나와 만나자.” 장량이 괴이하게 여기며 무릎을 꿇고하고 대답했다. 닷새 뒤 새벽, 장량이 그곳으로 갔다. 노인이 먼저 와 있다가 화를 내며 말하기를, “늙은이와 약속해 놓고 어째서 늦게 왔느냐?”라고 하더니 자리를 뜨면서닷새 뒤 일찌감치 만나자.”라고 했다. 닷새 뒤 닭이 울 때 장량이 그곳으로 갔다. 노인이 또 먼저 와 있다가 다시 화를 내며또 늦었으니 어쩐 일이냐?”라고 한 다음 자리를 뜨면서닷새 뒤 다시 일찍 오너라.”라고 했다. 닷새 뒤 장량은 밤이 반도 지나기 전에 그곳으로 갔다. 잠시 후 노인도 그곳으로 와서 기뻐하며 말했다. “마땅히 이렇게 해야지.” 책 한 권을 내놓으며 말했다. “ 이 책을 읽으면 왕의 스승이 될 것이다. 10년 후에는 그 뜻을 이룰 것이다. 13년 뒤에 네가 제수(濟水) 북쪽에서 나를 만날 것인데, 곡성산(穀城山) 아래의 누런 돌이 바로 나이니라.”마침내 떠났는데 다른 말은 없었고 다시는 그를 만날 수 없었다. 날이 밝아 그 책을 보았더니 바로 <태공병법(太公兵法)>이었다. 장량은 그 책을 기이하게 여겨 늘 읽고 외웠다.

 

 

그 장량이 펼친 전략 중 가장 큰 것은 최소한의 전투를 거쳐 항우보다 함양의 먼저 입성한 것이다. 秦(진)나라와 전쟁을 치르며 西進(서진)하던 유방의 군대는 요관의 진나라 군대에 전투보다 회유책을 내 좋게 된다. 장량은 요관을 지키는 장수의 인성과 그의 성격을 알고서 뇌물을 주며 회유책을 쓰게 된다. 유방은 장량의 계책대로 역이기 편에 뇌물을 준비하여 요관의 진나라 장수를 설득하여 반란군 편에 서게 만들었다. 그리고 더하여 항복한 진나라 군대가 다시 배반할 것을 염려하여 대비책을 세우며 함양을 공격 결국 진왕 자영의 항복을 받아낸다.

 

사마천은 유후세가에서도 한고조 유방의 인성을 그대로 드러나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다. 함양궁의 수천에 달하는 미녀와 금은보화가 탐이 난 유방은 취하려 들자 번쾌가 만류하고 또한 듣지 않자 장량이 재차 만류하며 걸, 주와 다른 것이 무엇이냐고 따져 물었다. 이에 유방은 마지못해 그 청을 듣고 패상으로 군대를 물리게 된다. 장량은 유방이 함양을 취했을 때 항우의 반응을 미리 예견하였다 볼 수 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만약 유방이 함양을 유린하고 약탈하였다면 민심은 초패왕 항우에게 돌아서고 항우의40만 대군은 유방의 10만 군대를 섬멸하였을 것이다.

 

장량이 책사이자 전략가로서 더 빛난 것은 바로 홍문지연(鴻門之宴)이라고 불리는 일화에 있다. 항우는만을 몰아 홍문에 주둔하고 항우의 책사 범증이 유방을 죽이라 항우에게 권했다. 이사실을 장량과 친한 항백이 장량에게 미리 알려주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장량의 인적 네트워크가 작동하여 사실상 죽음의 연회장에서 유방은 살아 나올 수 있었다.   

 

초패왕 항우가 함양을 차지하고 잠정적으로 패권을 차지한다. 한고조 원년(BC206) 항우는 유방을 견제하려 파촉땅에 유방을 봉한다. 그 당시 파촉으로 향하는 길은 하나여서 들어가고 나오기가 매우 어려운 외지였다. 장량은 이것을 항우의 의심을 누그러 뜨리는 계기로 삼는다. 즉 파촉으로 군대를 물리면서 잔도(棧道)를 부숴버려서 중원에 대한 야망이 없음을 보여준다. 이에 항우는 유방에 대한 경계를 풀고 반란을 일으킨 제나라 전영을 공격하였다. 이 틈을 타 유방은 군대를 이끌고 관중을 차지한다.

 

이를 일본 전국시대에 미루어 본다면 혼노사의 변으로 오다노부나가 사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적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교토에서 먼 벽지로 영지를 바꾸게 하는 일과도 맞닿아 있는 것이다. 이에 임진왜란의 전쟁 중에서도 도쿠가와 가문은 큰 병력 손실과 징수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고 도요토미 사후 전국 통일의 기회가 되었다.

 

장량의 또 다른 능력은 사람을 보는 안목에 있다. 초한 쟁패가 한창인 시절 유방은 초나라를 치려하였다. 이에 장량은 항우의 장수인 영포와 제왕과 연합한 팽월의 포섭하고 기용할 것을 제안한다. 그 당시 맹장(猛將)이던 영포와 팽월을 얻음으로 항우와의 전세의 불리함을 일거에 해소하였다. 그리고 시대의 영웅이자 지장(智將) 한신(韓信)을 추천하여 기용하게 한다. 이로서 유방은 천군만마를 얻은 형세가 되어 초패왕 항우를 물리치게 된다. 수많은 전쟁의 상황을 군막 안에서 훤히 꿰뚫어 운주유악이라는 찬사를 받게 되는 것이다. 전쟁터와 멀리 떨어진 천리 밖의 군막에서 그의 혜안은 빛을 발휘하며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된다.

 

통일 초기 논공행상이 1년여간 미뤄지자 공신들은 기다리다 못해 반란의 기미마저 보이게 된다. 이때도 장량의 지모가 빛을 발한다. 장량은 유방에게 유방이 가장 싫어하고 죽이고 싶어 하는 옹치를 십방후에 봉하라고 계책을 세워 준다. 공신들은 유방과 옹치의 관계가 좋지 않음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옹치가 십방후에 봉해진 것을 보고 모두 기뻐한다. 즉 옹치가 십방후가 될 정도라면 자신들은 더 좋은 상을 받으리라 기대하며 즐겁게 기다린 것이다. 공신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게 만들고 논공행상을 처리하게끔 하였다.

 

유방이 노년에 태자 유영을 폐위시키고 그의 애첩 척부인의 아들 여의를 태자에 앉히고자 하였다. 여후는 장량을 불러들여 대책을 강구를 요청하였다. 이에 장량은 유방이 존경해 마지않고 황제가 불러도 오지 않는 상산사호( 동원공, 녹리선생, 기리계, 하황공)을 초청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태자 유영의 옆자리에 있게 하니 한 고조는 신기해하며 그 연유를 물었다.

 

“내가 선생들을 모시려 수년 동안 찾아다닐 때는 만나주지도 않으셨는데 어찌 지금 내 아들과 함께 있는 것입니까? 폐하는 책 읽는 서생이라 얕보고 욕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그런 굴욕을 견딜 수 없어서 피해 다닌 것입니다. 듣자 하니 태자가 어질고 효심이 깊어 학자들을 존경하여 천하사람들이 태자를 위해서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유방은 태자를 폐위시키려는 그의 마음을 접고 유영을 태자 자리에 있게 하였다. 장량은 너무나도 유방을 잘 알고 있었다. 조정대신들로는 유방이 태자를 바꾸려는 생각을 접게 할 수 없는 것을 알고 유방이 존경해 마지않는 상산사호로 하여 우회적으로 폐위에 대한 생각을 고쳐 먹게 만든 것이다. 장량은 한 건국초기에 적자 승계의 원칙을 고수하게 하여 황제자리 쟁탈로 인해 발생할 변란을 없애버린 것이다.   

 

이렇듯 장량은 유방에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 지혜의 주머니, 그리고 초한 전쟁에서부터 건국초기 한 왕조의 안정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소하와 마찬가지로 장량 또한 노자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여 공성신퇴(功成身退)를 실현한다. 한나라 개국공신 삼걸(三傑)의 하나인 장량은 유방이 하사한 삼만 호의 땅을 사양하고 그의 봉읍지로 내려간다. 그리고 그는 신선의 도를 닦으며 살아간다. 음식을 먹지 않고 몸을 가볍게 하는 술법을 배우고 양생법에 대해 깊이 빠져든다. 유방이 죽고8년 뒤 장량도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