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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야기

戰國策_20161128

戰 國 策

 

 

유향

 

 

 

20세기 이전 세계의 패권은 서구 열강(영국,프랑스,스페인)으로부터 시작되었고 20세기 이후는 독일과 일본 미국, 러시아가 다투었고 지금 현재는 세계 경제 2위 중국이 패권의 중심부로 이동을 꾀하여 미국과 자웅을 겨루려 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직은 군사 경제력 면에서 미국에 뒤지고 있지만 수 년 내 경제력 면에서는 미국을 추월하리라 보여진다. 그런 움직임을 미국이라는 세계제일의 패권국인 미국이 그냥 두고 볼 이유가 없을 것이다. 최근 일련의 군사적인 움직임 한반도 사드 배치와 필리핀을 도와 남중국해 영토 분쟁에 끼어들어 무력 시위를 하는 모습이 그러 것임을 볼 수 있다. 또 외교적 측면에서는 중국을 고립 시키려 제2의 인구 대국이자 경제대국으로 부상중인 인도와의 외교, 한국 일본과 함께 외교적인 공조, 동남아의 친미 국가를 동원하여 중국을 고립 시키는 전략을 펴고 있는 것이다. 중국으로서 참으로 난감해 하지 않을 수 없다

 

20세기 전 서구 열강들의 침탈의 기록을 보면 신대륙을 발견하고 토착 원주민을 몰아내거나 그 지역의 주요 생산물을 탈취하여 본국으로 가져가서 서구 유럽의 부를 축적한 것이고, 통치 형태를 보면 점령지에 총독부를 두어 그 지역을 통치하게 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것이 춘추 시대 봉건제후국의 모습이다 주()왕조에서 친족 및 공이 있는 이들을 제후에 봉하고 그 공납물을 받아 왕조의 창고를 채운 것이다. 이는 중세유럽에서도 마찬 가지의 통치 형태를 보여준다. 20세기 들어 전쟁을 통해서 땅을 할양 받기 시작한 것이 우리가 익히 아는 중국의 홍콩, 일본 북방 4개섬, 폴란드의 발트해 연안의 그단스크 지역이 있다. 일본, 독일은 패전을 하여 영토의 일부를 러시아 미국에 빼앗기기도 한 것이다.

 

 

중국(Chnia:)역사에서 26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와 유사한 상황이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춘추 전국 시대(BC1027~ BC 221)인 것이다. 춘추시대에는 무도한 정치를 일삼는 나라를 정벌 한다는 것으로 주왕조부터 승인된 패자(춘추 오패: 제환공, 진문공, 초장왕, 오왕 합려, 월왕 구천))가 주왕실을 대신하여 다른 나라를 정벌하고 그 벌을 주는 것으로 끝나고 군사를 되돌리는 것이었다 땅을 빼앗고 하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또한 부족국가에서 시작하여 국경의 경계가 불분명하여 백성을 위한 정치를 잘하면 백성이 몰려들고 그렇지 않으면 백성이 다른 나라(제후국)로 옮겨가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이는 영토의 경계가 불분명한 부족국가, 봉건 제후국가에서의 있었던 것이다.

 

 

주왕실의 권위가 쇠락해 가던 중 진()나라가 망해 한, , 조로 삼분되며 시작한 것이 전국시대(BC403~ BC221)인 것이다. 이시기 가장 먼저 전국 칠웅(()()()()()()())의 패권을 잡은 나라가 위()나라 문후(文侯), 무후(武侯)인 것이다. 위문후(재위, 기원전 445-기원전 396)는 전국시대 위나라 개국군주로서 BC403년 한,,조가 주왕실 및 각 제후국으로부터 정식 국가로 승인을 받았고 법가 창설자가 된 이극(李克)을 등용해 법률을 반포하고 정치와 군사 등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 하고 세족정치에서 관료정치로 전환하는 인재를 등용하는 시초가 되었다. 그 인재 등용 사례로는 이극의 스승으로 자하(子夏) 전자방(田子方), 단간목(段幹木), 이리(), 적황(翟璜), 악양(樂羊), 오기(吳起)등이 있었으며 진()나라의 동진을 방어하고 조()()을 설득하여 제나라를 견제하였고 초()나라의 중원 진입을 막아 중원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38년을 재위하였으며 전국시대 초기 강국으로 만들었다. 위 무후가 뒤를 이어 전국시대 초기 강국으로 만들었다.

 

 

이어 등장한 패자는 제위왕과 진효공으로 이시기에 중국 중원은 이 두나라가 천하를 쟁패하기 시작했다. 제위왕은 제나라의 군대를 정비하면서 추기(鄒忌)를 재상, 전기(田忌)를 장군, 손빈(孫臏)을 군사(軍師)에 기용하여 16년 위()나라 군대를 계릉(桂陵)에서 대패시키고 태자 신()을 포로로 잡았으며, 방연(龐涓)을 살해했다. 이어 마릉(馬陵) 전투에서 위()나라를 격파하고, 이때부터 왕이라는 칭호를 썼다. 이때 나온 고사성어가 '위위구조(圍魏救趙, 위나라를 둘러싸 조나라를 구원하다)' '감조유적(誘敵, 솥을 줄여 적을 속이다)'이다.

아버지를 이어 임치(臨淄) 직하(稷下)에 학궁(學宮)을 설치하여 각국의 학자를 초빙해 정치를 논하게 하고, 인재를 선발해 기용하자 국력이 나날이 부강해져 갔다. 이어 마릉(馬陵) 전투에서 위()나라를 격파하고, 이때부터 왕이라는 칭호를 썼다.

 

 

진효공(BC 381 ~ BC 338)은 진나라 25대 군주로 위()나라 출신 상앙(商鞅:? BC338)을 중용하여 두 번의 변법 시행을 통하여 급속하게 국력신장을 이루고 BC350년에 수도를 함양으로 천도하였다. BC359년 상앙을 진나라 변법의 책임자로 등용하고 부국 강병의 계책을 세워 기존 권문세족과 유가와 투쟁하여 정권을 잡은 후 군현제를 실시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확립하고 형법 가족법 토지법 도량형등 여러 방면에서 대개혁을 이루어 후일 진제국의 초석을 다졌다. 재상으로 있는 20여년 동안 나라를 엄정한 법치국가로 성장시켜서 진나라 풍습이 도불습유(道不拾遺: 길에 떨어진 물건조차 줍지 않는다) 민불망취(民不妄取: 백성들이 분에 넘치는 물건을 함부로 받지 않는다)가 생겨날 정도였다. 진효공이 죽자 뒤를 이은 진혜문왕의 태자시절 미움을 산 죄와 상앙 자신이 만든 법에 의해 거열형을 받아 죽게 되는 비운을 겪는다.

 

 

전국시대의 사상가들중 법가와 병가는 부국강병의 강력한 지지세력으로 등장한다. 나라를 보존하고 백성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국가 역량이 총 동원되어야 했던바 반드시 엄법에 의한 내부기강확립이 필요하였고 이는 법가의 주장이 제후들에 의해 아무런 저항없이 수용되었다. 춘추시대 말 묵적(BC470~391)의 묵수(墨守) 병가의 공심(攻心)으로 대변되어 대립하였으나 결국 병가가 이겨서 묵가사상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전국시대 초기는 법가의 법치와 병가의 무력이 강조되고 채택되었고 이들의 사상적인 기반은 노자의 도가사상이 중심이 되어 더욱 정치시켜 나갔다.

 

그리고 전국시대 후반에 등장하는 이들이 귀곡자(BC400 ~320)를 중심으로 소진(BC 337 ~ BC 284) 장의(? ~ BC 309)의 종횡가들이 천하를 주유하며 제후들에 유세를 하였다. 진나라에서 장의는 연횡책을 제후들에 설파하여 6국을 자국의 통제하에 두려 하였고 소진은 진나라의 동진정책 계략을 알아차리고 6국을 종으로 묶어 연합하는 합종책을 시행하여 진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6국은 작은 이익에 급급한 나머지 장의의 계략에 말려들어 느슨한 합종으로 일관하다 한()의 멸망(BC230)을 필두로 제()나라의 멸망( BC221)을 끝으로 자멸의 길을 걸으며 진나라가 통일을 한 것이다. 진시황이 범수의 원교근공(遠交近攻) 정책을 기반으로 하여 6국을 차례로 멸망 시켜갔다. 이 시기가 전국시대 말기로 종횡가들이 활약한 외교 책략의 전성기로 볼 수 있다. 이 시기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행위도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을 전제로 하여 책략과 모략이 성행을 한 것이었다.

 

 

전국시대 전쟁의 양상은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패전국의 영토 즉 성()과 군현(郡縣)을 할양을 요구 하였고 진나라는 이 할양 받은 영토를 자국의 군현으로 흡수하며 천하 통일의 작업을 진행해 나간 것이다. 이때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던 이들이 유세가(외교가: 종횡가)들인 것이다. 전국책은 이 종횡가들과 제후의 활약상을 기술한 책인 것이다. 춘추전국시대는 봉건제하의 질서가 패권국의 질서로 다시 중앙집권적 제국 질서로 구축되어왔고 이를 진나라는 상앙과 장의 범수등의 책략가등을 통해 한발 앞서 나갔으며 같은 대국이었던 제와 초나라는 이 새로운 제국의 질서를 인식하지 못하고 망해 갔던 것이다. 결국 춘추 전국시대는 왕업à 패업à제업의 시대로 이행 과정인 것이고 이 이행 과정중 전국시대 200여 년 동안 200여 차례의 전쟁이 끊임없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진나라가 제일 먼저 신분세습을 토대로 한 지방 분권적인 봉건 질서를 깨트리고 능력본위의 관료체계에 기초한 중앙집권적인 제국 질서를 확립해 나갔던 것이다.

 

 

이 시기가 역동적인 제국 질서로 재편을 준비 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가 바로 철기 문명의 확산인 것이다. 이 철기 문명은 일인당 경작 면적을 확대가 가능해 지고 이로 인해 제후들은 영토의 확장의 욕구를 갖게 된 것이다. 철기의 도입은 농업의 비약적인 증산이 가능해지고 잉여 생산물의 교역 즉 상업이 활발해지며 거대 상업도시를 탄생시킨 것이다. 이는 국가의 세원확보가 용이해져 강력한 군대의 유지가 가능해 지고 중앙집권의 관료체제의 유지가 가은 해진 것이다. 이는 제선왕 앞에서 소진의 유세에도 나타나는데 ‘ 임치 7만호 1호당 3명의 남자 장정만 21만명 ‘ 이라는 수치가 있다. 또 한나라 거상 여불위가 각 국의 교역 도시를 거점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 진나라의 재상으로 활약한 것은 이때의 시대상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전국 초기 위, 조 두 나라가 위세를 떨쳤으나 나라가 작고 백성의 수도 많지 않아 대국으로 성장하기에 한계가 있었다. 전국시대 200여년 내내 제, , 초 세나라가 자웅을 겨루었다. 중기 이후부터는 진과 제, 초 양국의 대결 구도로 진나라는 제,초의 연맹구도를 와해 시키는데 모든 노력을 경주하였고 이때 진나라 장의의 연횡책이 나온 것이다. 연횡책은 진나라와 대등한 관계를 맺어 국가 유지를 도모하는 것이 기본 방향이었으나 육국의 병탄을 하기 위한 하나의 술수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나머지 육국이 소진의 합종으로 맞선 것은 제, 초를 연맹을 기축으로 하여 나머지 한,,,4국이 이에 가담한 것으로 진나라의 동진을 저지한 것이다.

 

 

전국시대 종횡가(외교술사)들은 유가, 법가, 도가, 병가 등과는 달리 사상적 기반이 없어 변화 무쌍한 時變에 대응 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전국시대 봉건세습귀족을 대신할 士 세력이 학문과 능력으로 무장하여 말(辯說)로서 재상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이런 시대적 조류에 편승한 이들이 소진,장의, 범수, 채택,등이다. 한마디 말로서 입신할 수 있으나 반대로 한마디 말 실수로서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들의 변설에는 난세에 살아 남기 위한 치열하고 뛰어난 지략이 담겨 있는 것이다.

 

 

전국시대 4 공자는 제의 맹상군, 조의 평원군, 위의 신릉군, 초의 춘신군이다. 이등은 왕족의 서얼로서 자신의 봉토를 가지며 세객들을 거느리고 자신의 세력을 공고히 하고 국난타계의 선봉 역할을 하였다. 맹상군(전문) 제위왕의 후손으로 3천명의 식객을 거느리며 秦 나라 신하의 모함에 의해 위험에 빠졌을 때 식객의 도움으로 빠져 나올 수 있었던 일화가 鷄鳴狗盜인 것이다. 조나라는 평원군(조등) 조혜문왕의 동생으로 毛遂自薦(모수자천: 어려운일을 당하여 스스로 그 일을 맡고나섬)과 囊中之錐(주머니속의 송곳)이라는 고사를 남겼다. 위 신릉군(무기) 위 소왕의 아들로 조나라 한단이 진나라에 포위 당시 조나라를 구하기 위해 부절을 훔친 일로 竊符救趙의 고사를 남겼다.

 

춘신군(황헐)초 경양왕을 섬기며 뛰어난 외교술로 초나라를 합종의 맹주로 이끌며 25년 동안 재상직에 있었으나 초 고열왕이 죽자 이원의 암수에 걸려 멸족의 화를 입었다. 세객과 세가의 결합은 여불위와 자초(진시황의 부친)의 만남에서 여불위는 신분상승의 한계를 넘으려 하였고 자초 역시 보위에 오르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만남으로 진시황은 탄생한 것이었다.

 

 

진나라의 천하통일은 惟才是擧(유재시거: 오직 재주가 있으면 과감히 발탁하는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여 널리 인재를 모으고 등용한 것이다. 이는 근대에 들어선 중국의 등소평의 흑묘 백묘론에도 영향을 주었다. 진나라의 천하 통일 배경에는 漢中과 옹주를 기반으로 서쪽의 파촉을 손에 얻어서 부국 강병을 지속적으로 유지시킨 것이 결정적 배경이다. 그리고 진 소양왕때 범저가 펼친 원교 근공의 외교술과 진효공의 상앙을 등용하여 變法을 과감히 도입한 것, 상벌제도 토지개간, 병력강화, 군현제 도입,등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의 구축에 있었던 것이다. 장의의 종횡가, 이사의 법가, 왕전의 병가등의 활약이 천하 통일의 기틀이 된 것이다.

 

 

한비자를 끝내고 나오는 인물과 지명이 얽인 역사적 사건이 머리에 들어오질 않았습니다. 공부는 했으나 머리에 남지 않아서 한비자가 살던 당시 시대적 배경을 공부하고자 전국책을 잡았습니다. 1년여에 걸친 전국책(戰國策) 필사(筆寫)와 공부를 마무리 하고 무엇이 들어 있는지 다시 한번 되돌아보는 자리를 가져보았습니다. 이렇게 정리를 하지 않고 넘어가면 또 언제 시간 내고, 기억을 더듬어 정리할 시간이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서 글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문사철이 바탕이 되지 않은 동양고전 공부는 사상누각이고 기초 없는 공부가 됨을 느끼어 그때 시대 상황이 어떠했는지는 문학 작품과 역사서를 통해서 미루어 보고 그 법가 철학 이 태어나게 된 배경을 이해하면 보다 더 깊이 알 수 있을 거라 유향의 전국책을 잡았습니다. 필사와 해석이 어느 정도 해가니 어림은 잡을 수 있었습니다. 전국책을 끝내고 다시 한비자 해석을 하여 오블에 올리고 있습니다. 작년에 끝마친 한비자의 복습이라 생각하고 시간 나는 데로 해석을 하여 올리는 것입니다. 미련한 짓을 시작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회사 생활이 바빠지면 또 소홀해 질 수도 있습니다. 짬이 나는 데로 열심히 정리해 올리려 합니다. 신동준씨의 전국책 해설 본은 전체적인 맥락 잡기에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단지 아쉬웠던 것은 자구의 해석이 매끄럽지 못하거나 해석자체가 의문이 들 때 그런 해석을 한 이유가 분명하지 않아서 그 부분이 아쉬웠습니다. 한비자는 부족한 부분은 왕선겸의 한비자 집해를 참고 하였으나 전국책은 따로 주석서가 없어서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받아 들이기로 하였습니다. 다음에 시간이 좀더 낼 수 있다면 그때는 꼼꼼한 공부를 해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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