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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사기

공자 그 위대한 스승

 

1. 공자의 역사적 이해

 

 

생몰연대는 BC 551 ~ 479년 서주(西周)의 제후국인 노나라 무관 숙량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구()이고 자는 중니(仲尼)이다. 그의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키는 구척 장신에 머리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언덕() 형태로 되어있다. 후대 역사가들의 고증에 의해 공자의 초상화를 보면 미남이 아니라 우락부락하고 때로는 추남의 형태로 그려지고 있다. 공자는 유학의 시조이자 춘추시대 위대한 정치가 교육자 그리고 사상가이다. 당시에는 상갓집 개(喪家之狗)라는 오명(汚名)과 춘추의 여러 나라들이 패권을 다투는 전국상황에서 따르기 힘든 이상정치를 실현하려 애쓴 고독한 사상가이기도 하다. 그의 이상은 정치적으로 요 순 우 삼황오제의 이상적 정치와 노나라의 시조인 주공 단()의 정치 철학을 지향하였다. 그리고 그의 그런 의지가 꺾일 때마다 그는 역사저술과 교육에 매진하여 공문십철(十哲)과 그리고3000여 명에 이르는 학도(學徒)를 두어 가르쳤다. 이는2천5백여 년이 지나 오늘날까지 연구되고 학습되고 있는 것이다.

 

노나라는 (BC1046 ~ 256) ()나라부터 춘추 전국시대까지 존속한 나라로 당시의 曲阜(곡부) 땅에 주나라 무왕 아우인 주공 단에게 봉토를 내려 그의 아들 백금이 다스리던 나라이다. 주(周)왕조의 통치는 주목왕(周穆王) 때,전성기에 이른다. 주나라 왕권이 약화되고 제후들의 패권이 강화되기 시작한 발단은 주 厲(려) 왕의 폭정에 그 신하들과 백성들에 의한 쿠데타에 의해서다. 그 결과로 동아시아 최초의 共和政(공화정)이 탄생하게 된다. 중국 최초의 공화(共和)정이 탄생을 하게 된 배경은 군주의 폭정 어리석음 탐욕이 빚어낸 결과이다.

 

BC844년 주려왕(周厲王)은 더 많은 재물을 모으기 위해 간신(奸臣) 괵공장보 탐신(貪臣) 영이공을 기용해 산림과 하천과 저수지를 국가 독점으로 선포하여 백성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그곳에 들어가 나무를 하거나 고기를 잡을 경우 많은 세금을 물리는 국가독점정책을 시행한다. 에에 백성의 원성은 나날이 커가고 원성이 사방에서 일어난다. 주려왕은 예량보(芮良父)의 충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영이공을 경사(卿士)로 발탁하여, 계속 국가독점정책을 시행한다. 그리하여 전국적으로 원성이 일어나고, 결국 기원전 841, 백성들이 대규모 폭동을 일으킨다. 주려왕은 어쩔 수 없이 체(, 지금의 산서성 霍州)로 도망친다. 이를 역사에서는 "체지란(彘之亂)"이라고 부른다.

 

王行暴虐侈傲(왕행폭학치오),國人謗王(국인방왕)。召公諫曰(소공간왈):「民不堪命矣(민부감명의)。」王怒(왕노),得衛巫(득위무),使監謗者(사감방자),以告則殺之(이고칙살지)其謗鮮矣(기방선의),諸侯不朝(제후부조)。三十四年(삼십사년),王益嚴(왕익엄),國人莫敢言(국인막감언),道路以目(도로이목)。厲王喜(려왕희),告召公曰(고소공왈):「吾能弭謗矣(오능미방의),乃不敢言(내부감언)。」召公曰(소공왈):「是鄣之也(시장지야)。防民之口(방민지구),甚於防水(심어방수)。水壅而潰(수옹이궤),傷人必多(상인필다),民亦如之(민역여지)。是故水者決之使導(시고위수자결지사도),民者宣之使言(위민자선지사언)。故天子聽政(고천자청정),使公卿至於列士獻詩(사공경지어렬사헌시),瞽獻曲(고헌곡),史獻書(사헌서),師箴(사잠),瞍賦(수부),矇誦(몽송),百工諫(백공간),庶人傳語(서인전어),近臣盡規(근신진규),親戚補察(친척보찰),瞽史誨(고사교회),耆艾修之(기애수지),而後王斟酌焉(이후왕짐작언),是以事行而不悖(시이사행이부패)。民之有口也(민지유구야),猶土之有山川也(유토지유산천야),財用於是乎出(재용어시호출):猶其有原隰衍沃也(유기유원습연옥야),衣食於是乎生(의식어시호생)。口之宣言也(구지선언야),善敗於是乎興(선패어시호흥)。行善而備敗(행선이비패),所以財用衣食者也(소이산재용의식자야)。夫民慮之於心而宣之於口(부민려지어심이선지어구),成而行之(성이행지)。若壅其口(약옹기구),其與能幾何(기여능기하)?」王不聽(왕부청)。於是國莫敢出言(어시국막감출언),三年(삼년),乃相與畔(내상여반),襲厲王(습려왕)。厲王出奔於彘(려왕출분어체)

 

여왕의 행위가 포악하고 대단히 오만하여 국인(國人)이 왕을 비방했다. 소공(召公)이 간하였다. “백성들이 왕의 명령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여왕이 노하여 위(衛) 나라의 무당을 불러들여 비방하는 자들을 감시하게 해서는 보고가 올라오면 비방한 사람들을 곧 죽였다. 비방이 드물어졌지만 제후들은 조회하러 오지 않았다.

 

백성에게 입이 있는 것은 마치 땅에 산과 강이 있어 재물이 여기에서 나오는 것과 같고, 또 평야와 습지와 평평한 땅과 기름진 땅이 있어서 입고 먹을 것이 여기에서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입으로 드러내 놓고 말하게 하면 정사의 잘잘못이 여기에서 일어납니다. 백성들이 좋다는 것은 실행하고 잘못한다는 것을 방지하는 것은 재물을 생산하여 입고 먹는 것에 쓰는 방법과 같기 때문입니다. 무릇 백성들은 속으로 생각한 다음 입으로 드러내 놓고 말하며 잘 생각한 뒤에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의 입을 막으면 그것이 얼마나 오래가겠습니까?”여왕은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이에 나라에는 감히 말하려는 자가 없어졌고, 3년 뒤 서로 힘을 합쳐 반란을 일으켜서 여왕을 습격했다. 여왕은 체()로 도망갔다.

 

주 려왕이 도망을 간 후 주(周)나라는 권력의 공백기를 맞이한다. 국민들에 의한 최초의 혁명의 목적은 왕조를 무너트리는 것이 아니라 군주의 폭정에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살고자 했던 혁명이었다. 간신과 탐신, 혼군(昏君)을 몰아내고 들어선 과도 정부가 바로 공화정(共和政)이다. 단순한 공화정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볼 수 있다. 즉 이때부터 제후들은 주 왕실을 무시하고 스스로 부국강병하여 주 왕실의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군주가 사라진 나라에 제후가 따를 자 그 누가 있겠는가? 소공(召公) ()과 주공(周公) () 14년의 통치기간이 바로 공화정의 시간이었다. 이후 주 선왕(宣王)이 옹립되기까지 이어졌고 중국 최초의 공화정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간다.

 

召公(소공)、周公二相行政(주공이상행정),號曰(호왈)共和(공화)共和十四年(공화십사년),厲王死于彘(려왕사우체)。太子靜長於召公家(태자정장어소공가),二相乃共立之王(이상내공립지위왕),是宣王(시위선왕)。宣王即位(선왕즉위),二相輔之(이상보지),修政(수정),法文(법문)、武(무)、成(성)、康之遺風(강지유풍),諸侯復宗周(제후복종주)。十二年(십이년),魯武公來朝(로무공래조)

 

사기에 나오는 내용은 이상(二相)이 공화(共和)했다고 한다. 주공, 소공의 두 재상이 공동으로 집정했다는 것이다. 소공의 시호는 목()이고 이름은 호()이며, 주공은 주정공(周定公)이다. 이 사건 이후로 왕의 권위는 실추되고 국력은 쇠미해지며 772년 결국 전국이 혼란의 상태가 되는 춘추의 시대로 접어든다. 춘추로 들어선 중국(中國)은 대국이 소국을 병탄하고, 강국이 약국을 약탈하는 시대로 접어든다. 주왕실의 권위가 무너진 결정적 계기는 평왕 때 서주가 멸망하고 동주로 옮겨오며 주나라의 국력이 약화되어 명목상의 봉건왕정인 시대가 되어 갔다. 주왕조의 흩어진 권력은 제후들에게 나누어지며 이에 나타난 최초의 오패가 바로 제 환공이다. 제 환공은 주나라 천자를 대신하여 아홉 번이나 제후국들을 모아 회맹을 하였고 중원의 질서를 잡아갔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제환공이 죽자 다시 한번 중원에서 권력의 공백이 발생하고 다시 진(晉)문공과 송(宋)양공 그리고 진(秦)목공, 오 합려 월 구천 등으로 패권은 이동하여 중원은 제후 간 다툼으로 무질서한 상태가 연출된다. 즉 이러한 정치 사회상은 경대부들로 하여금 제후들의 권세에 따라 복종하고 때로는 무시하며 자신들만의 세력확장에 명분을 주게 된다. 즉 주 천자를 모셔야 될 제후국이 국력에 따라 오만 방자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제후국의 경 대부들이 그들을 본받아 제후들의 권세의 강하고 약함에 따라 제후를 무시하고 심지어는 업신여기기까지 하며 자신의 입맛에 맞는 군주를 세우는 군신 간의 예의와 정의는 사라지는 시대인 춘추의 혼란한 정국을 만들어 간다.

 

공자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춘추를 지으면서 알았을 것이고 동시대의 노나라 공실과 삼환 대부들의 관계에서 실증하였을 것이다. 공자는 이를 논어와 춘추 예기 등의 그의 저작들을 통해 통렬히 주장하고 필주(筆誅)를 가하며 나무랬던 것이다. 즉 공자가 말한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인하지 못하고 의롭지 않으며 예가 사라지고 지혜롭지 못한 혼군(昏君)등의 사회적 상황을 비판하며 그의 철학적 사유를 완성해 간다.

 

2. 공자의 정적(政敵)_삼환(三桓) 세력

 

노 장공과 삼환의 가계도

 

춘추 초기, 노나라는 동방의 강국으로, 은공, 환공 시대(기원전 722 ~ 기원전 694) 여러 번 제, 송 등의 나라와 싸워 이겼고, 또 기, 거와 같은 소국에 부단히 침공당했다. 춘추시대 중기, 사회가 변하여, 정권은 귀족 대신의 수중에 들어갔다. 장기간 실권을 장악한 주요는 노 장공의 세 아우 계우, 숙아, 경보의 자손으로, 계손씨, 숙손씨숙손씨, 맹손씨 삼가(三家)라 했다. 위의 가계도에 보는 바와 같이 저들 모두가 노환공(桓公)의 후손이어서 삼환(三桓)이라 했다.

 

어리석은 군주의 등장은 주 왕실뿐만 아니라 제후국들에게서도 나타난다. 그것이 바로 노나라의 三桓(삼환)의 등장이 되는 것이다. 삼환이란 노나라 환공의 아들 莊公 때에 그의 동생 경보, 숙아,계우가 공족의 한 세력을 유지하며 힘을 길러 결국은 제후인 장공을 시해하고 국정을 농단하며 일어난 것이다. 이 후손들이 권력을 유지하며 공자의 시대까지 국정을 농단하며 공자의 인생여정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된다.

 

경보 (慶父)

중국 춘추 시대 노(魯)나라 사람(?~B.C.660). 노장공(魯莊公)의 서형(庶兄)이다장공이 죽은  그의 아들 자반(子班) 즉위하자 그를 살해하고 이어 즉위한 민공(閔公또한 죽였다(땅으로 도망하였다가 귀국하는 도중에 형세가 불리하자 자살했다후세에 내란을 자주 일으키는 사람을 일컬어 경부(慶父) 불렀다중경보(仲慶父또는 공중(共仲), 맹손씨(孟孫氏)로도 불린다.

 

숙아[叔牙]

일명 희숙(僖叔). 춘추 시대 노(魯)나라 사람. 장공(莊公)의 동생이다. 장공이 적사(嫡嗣)가 없자 서자(庶子) ()을 사랑했다. 장공이 병에 들어 그에게 후사를 물으니 경보(慶父)를 세우라고 말했다. 공이 그러고 싶지 않아 반을 소제(少弟) 계우(季友)에 속하게 했다. 계우를 장공의 명령으로 짐독(鴆毒)을 먹여 살해하고 그 후손을 세워서 숙손씨(叔孫氏)로 삼았다.

 

계우 [季友]

노환공(魯桓公)의 말자(末子)로 형 노장공(魯莊公)이 서거한 후 제후위를 노리는 서형(庶兄) 경보(慶父)의 난을 수습하고 그를 추방시켜 더 큰 혼란을 막음. 난리가 가라앉고 노장공의 아들 노희공(魯僖公)이 즉위하자 내정을 안정시킨 공로로 비(費)읍과 문양(汶陽) 땅을 하사받고 계손씨(季孫氏)의 개조가 됨. 그의 자손들은 후대에 공손 오()의 자손들인 맹손씨(孟孫氏)와 공손 자()의 자손들인 숙손씨(叔孫氏)와 함께 '삼환씨(三桓氏)'로 통칭되면서 노나라 내정을 전단(專斷)하게 됨.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논어와 사기 공자세가에 드러난 공자 유년과 청년시절의 모습에서 서로 부합되지 않는 이야기가 나온다. 공자는 어릴 적 빈천하였다는 기록과 예법에 관심이 많아 제기를 가지고 놀았고 예법에 관심이 많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의 제사는 제후국의 관리들이 맡는 직업이었으며 평민 특히나 빈민들이 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었다. 17세까지 공자는 빈천했다고 되어있는데 이를 미루어 보자면 과연 가난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또한 계씨의 향례를 참석하려 했던 일과, 맹희자가 죽으며 그의 아들 맹의자에게 공자를 스승 삼으라 했던 일 등이 모두 공자 17세 이전에 있었던 일이다. 만약 가난하였다라고 한다면 제기를 가지고 놀 수도, 대부의 향례에 감히 참석하려 들 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된다. 또한 그의 부친과 모친을 합장하였다는 기록에서도 만약 가난하였다면 가능했을까라?라는 의문을 가져본다. 사마천의 공자세가의 내용을 미루어 보자면 사마천은 공자를 추앙하였다. 황로학에 기반한 그의 학문적 토대는 공자를 세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 하나만으로도 그를 추앙하고 흠모했음을 알 수 있다.

 

공자는 20세에 계씨의 말단 관리가 되어 곡창과 목축의 일을 맡게 된다. 저울질이 공평하고 가축들이 번성하여 사공(司空)으로 승진을 하게 된다. 뚜렷한 이유는 설명되어 있지 않으나 공자의 1차 천하주유가 이때 즈음 시작된다.  제 1차 천하주유(天下周遊)를 하며 제, , , , 채나라등 을 돌아보며 견문을 넓히게 된다. 공자의 학문적 기반은 어디서 유래되었는지 잘 나와 있지 않다. 논어도 맹자도 역사서 어디 한 켠에도 누구에게서 修學(수학)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단 하나의 기록에 남은 것은 공자가 주나라로 가 노자에게 예를 물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유교를 숭배하는 이들에게 말을 하면 성인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배움이 가능하였다는 말을 한다. 즉 生而知之 태어나며 잘 알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통해 보자면 공자가어나 사기에 나타난 내용을 미루어 짐작해보자면 그 첫 번째 단초가 주 성왕(成王)이 삼촌이 제후로 있는 노나라에 천자(天子)의 예법을 지낼 수 있도록 배려 해준 일화가 나온다. 이 일로 노나라는 천자의 예법이 고스란히 전승된 나라로써 그 전승된 예법을 공자는 배웠을 것이다라고 추정된다. 두 번째가 서주 호경이 신(申)나라와 융족 연합군의 침입으로 인해 멸망당하고 궁전이 약탈당함으로써 궁중의 많은 기록들이 소실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이로써 당시 천자의 나라에 많은 기록물들보다 노나라의 기록이 많았을 것이라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 본다. 그래도 풀리지 않는 의문의 하나는 공자의 스승이다. 스승의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이것을 뒤집어 사유해본다면 글을 통하고 당시 시대 상황을 읽어내어 배웠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자가 일차 천하 주유를 끝내고 돌아오자 노나라 남궁경숙이 공자와 함께 주나라로 간 기록이 나온다. 그 방문에서 노자를 만나 예를 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당시 나이가 서른 가까이 되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기 기록에 나온 노자의 말은 아래와 같다.

 

魯南宮敬叔言魯君曰(로남궁경숙언로군왈):「請與孔子適周(청여공자적주)。」魯君與之一乘車(로군여지일승차),兩馬(량마),一豎子俱(일수자구),適周問禮(적주문례),蓋見老子云(개견로자운)。辭去(사거),而老子送之曰(이로자송지왈):「吾聞富貴者送人以財(오문부귀자송인이재),仁人者送人以言(인인자송인이언)。吾不能富貴(오부능부귀),竊仁人之號(절인인지호),送子以言(송자이언),曰():『聰明深察而近於死者(총명심찰이근어사자),好議人者也(호의인자야)。博辯廣大危其身者(박변광대위기신자),發人之惡者也(발인지악자야)人子者毋以有己(위인자자무이유기),人臣者毋以有己(위인신자무이유기)。』」孔子自周反于魯(공자자주반우로),弟子稍益進焉(제자초익진언)

 

인사를 하고 떠나려 하자 노자가 전송하며 말했다. “내가 듣기에 부귀한 자는 재물을 주어 사람을 전송하고, 어진 자는 좋은 말을 하여 전송한다고 합디다. 나는 부귀하지는 못하지만 어진 사람이란 이름을 외람되이 차지하고 있으니 이런 말을 하여 그대를 전송하고자 하오. ‘총명하고 깊이 살피는 사람이 죽기 쉬운 까닭은 남을 비난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오. 박식하고 말을 잘하며 식견이 넓은 사람이 위험이 닥치기 쉬운 까닭은 남의 잘못을 들추어내기 때문이오. 자식된 자는 부모 앞에서 사심이 있어서는 안 되고, 신하된 자는 군주 앞에서 사심이 있어서는 안 되오.’” 공자가 주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오자 제자들이 갈수록 늘어났다

 

당시는 춘추 말기로써 진() () 제(齊)나라가 하나같이 강국이었다. 이 당시 진()은 노나라와 마찬가지로 진 평공이 어리석은 군주여서 조() () (), 그리고 지() () 중항(中行)씨등 6()이 국정을 농단하며 동쪽의 제후들에게 싸움을 걸어왔다. 당시 초나라도 그 광활하고 비옥한 영토에서 나오는 국력으로 중원의 여러 나라를 공격하였다. 국력이 약한 노나라는 제나라의 공격을 자주 받고, 진(晉)나라와 초(楚)나라의 눈치를 보며 살아갈 운명이었다.

 

노소공 20, 공자 나이 30( BC522) 제 경공이 유명한 재상과 같이 노나라에 와서 공자를 만나 서쪽 변방에 있던 秦(진)나라의 강성함에 대해 묻자 진목공의 현명함과 초나라 사람이고 후에 오고대부라 불리는 백리해의 등용을 말하며 이것이 패업을 이룬 결정적인 요인이라 말하였다.  경공은 겉으로 기뻐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은연중 공자의 현실정치 참여 욕구가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공자나이 35 (BC 517) 계평자가 후소백과 투계놀이 도중 서로 속여 싸움으로 번지자, 노 소공은 후소맥의 편을 들며 군대를 일으켜 계평자를 치려하였다. 이에 삼환세력은 연합하여 노 소공을 공격하였고 싸움에 진 노 소공은 제나라로 도망쳐 달아났다. 삼환의 권력농단에 노나라는 더욱더 혼란스러워져 갔다. 삼환(三桓)의 전횡은 극에 달하고 제후의 나라가 아닌 대부가 권력을 차지한 나라가 되어가며 더욱더 혼란속으로 빠져 들어간 것이다.

 

노소공이 제나라로 망명하자 공자도 노나라를 떠나 제나라 경공에 잠시 의탁하게 된다. 제경공이정치를 묻자 그 유명한 “君君(군군),臣臣(신신),父父(부부),子子(자자)” 라는 촌철살인의 말을 남긴다. 이에 경공이 감탄하며 공자의 국정 참여를 그의 신하들과 논의하며 니계땅에 봉하려 하였다. 그러나 제나라의 재상인 안영(晏嬰: BC 578 ~ 500)이 반대를 한다. 당시 제나라는 안영(晏이 제 경공을 도와 제나라 국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안영이란 인물은 제나라 장공에서 경공에 이르기까지 3대의 현신으로 역신(逆臣) 최저 경봉이 난을 일으켜 제 장공을 시해하자 국내에 남아 난을 수습하고 역신을 견제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최저와 경봉이 실권하자 경공의 재상이자 고문관이 되어 제나라의 부흥을 이끌며 대외적으로 작은 패업의 성과를 이뤄내어 관중에 비견될 만큼 제나라의 대신(大臣)이었다.안영은 공자를 견제하며 유가(儒家)의 예()를 중시 사상을 비판하며 공자를 곁에 두지 말 것을 제 경공에게 강권한다. 결국 제나라를 떠나 노나라로 돌아가게 된다.

 

3. 공자의 교육관_ 단 한 번도 같은 답을 주지 않는 공자

 

계강자가 공자에게 정치를 물은 적이 있다. 그리고 똑같은 질문을 제 경공이 한 적이 있다.

계강자의 물음에는 (정자 정야:政者 正也) 정치란 바른 것입니다 “라고 하였고, 제경공에게는 “「君君,臣臣,父父,子子。」군주는 군주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계강자가 물었을 때 노나라에서 계강자의 횡포는 군주를 업신여기며 오만하였기에 정치는 바름입니다”라고 하였다. 군주와 위정자들이 물었을 때 그들이 해왔던 정치 이력과 그들이 행해야 할 방향으로 답을 하였던 것이다.

 

景公問政孔子,孔子曰(공자왈):「君君(군군),臣臣(신신),父父(부부),子子(자자)。」景公曰(경공왈):「善哉(선재)!信如君不君(신여군부군),臣不臣(신부신),父不父(부부부),子不子(자부자),雖有粟(수유속),吾豈得而食諸(오기득이식제)!」他日又復問政於孔子(타일우복문정어공자),孔子曰(공자왈):「政在節財(정재절재)。」景公說,將欲以尼谿田封孔子。晏嬰進曰:「夫儒者滑稽而不可軌法;倨傲自順,不可以下;崇喪遂哀,破厚葬,不可以俗;游說乞貸,不可以國。自大賢之息,周室衰,禮樂缺有間。今孔子盛容飾,繁登降之禮,趨詳之節,累世不能殫其學,當年不能究其禮。君欲用之以移齊俗,非所以先細民也。」後景公敬見孔子,不問其禮。異日,景公止孔子曰:「奉子以季氏,吾不能。」以季孟之間待之。齊大夫欲害孔子,孔子聞之。景公曰:「吾老矣,弗能用也。」孔子遂行,反乎魯。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를 묻자 공자가 말했다. “군주는 군주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  경공이 말했다. “좋은 말씀이오! 분명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고,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면 비록 곡식이 있다 해도 내 어찌 그것을 먹을 수 있겠소!”  다른 날 또 공자에게 정치를 묻자 공자는 말했다. “정치는 재물을 절약하는 데 있습니다.” 경공이 기뻐하며 니계(尼谿)의 땅에 공자를 봉하고자 했다.

 

안연이 인()을 물었을 때 극기복례(克己復禮)’를 말하였고 번지가 물었을 때는 애인(愛人)’이라 하였다. 안연은 공자가 가장 아꼈을 만큼 인하고 지혜로워서 좀 고차원의 답을 하였고 번지는 약간 둔하여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라는 일차원적인 답을 하였다. 그리고 덕행이 뛰어난 제자 중궁이 물었을 때는 기소부욕(己所不欲), 물시어인(勿施於人)이라 하였다. 즉 그들의 자질과 성정(性情)에 따라 개개인 별로 다른 해답을 주어 스스로 생각게 하였다. 즉 요즘 말로 치면 맞춤교육, 눈높이 교육이라 할 수 있다. 획일화된 가르침이 아니라 상황에, 때에 맞게 그리고 사람에 맞는 교육관이기도 하다.

 

淵問仁。子曰:克己復禮仁(극기복례위인)。一克己復禮(일일극기복례),天下歸仁焉(천하귀인언)仁由己(위인유기),而由人乎哉(이유인호재)?」淵曰:「請問其目。」子曰:「非禮勿視,非禮勿聽,非禮勿言,非禮勿動。」淵曰:「回雖不敏,請事斯語矣。

 

樊遲問仁(번지문인)。子曰(자왈):「愛人(애인)。」問知(문지)。子曰(자왈):「知人(지인)。」樊遲未達(번지미달)。子曰:「直錯諸枉,能使枉者直。」樊遲退,見子夏。曰:「也吾見於夫子而問知,子曰,『直錯諸枉,能使枉者直』,何謂也?」子夏曰:「富哉言乎!舜有天下,選於眾,皋陶,不仁者遠矣。湯有天下,選於眾,伊尹,不仁者遠矣。」

 

仲弓問仁。子曰:「出門如見大賓(출문여견대빈),使民如承大祭(사민여승대제)己所不欲(기소부욕),勿施於人(물시어인)

。在邦無怨,在家無怨。」

 

 

논어 전편을 통틀어 공자의 교육관을 가장 잘 보여주는 핵심이 바로 자한 편에 있다. 공자가 가르친 4가지는 四(사교):文(),行(),忠(),信() 배우고 익혀야 하는 文(), 독실한 행함 行(), 진실됨의 忠()그리고 믿음이 있는 信()을 가르쳤다. 그리고 마음에서 끊어낸 4가지는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지 않는 무의(毋意), 반드시 이루려 무리하지 않는 무필(毋必),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바꾸려 하지 않는 고집을 없애는 무고(毋固), 자신의 논리가 틀렸음에도 주장을 굽히지 않는 아집을 없애버린 무아(毋我)였다. 오늘날의 용어로 풀어내보면 바로 이데올로기, 관념, 특히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새로운 문화와 조류 그리고 사상을 받아들이는데 국한되지 않고 상대방의 말을 듣는 경청의 자세를 말하고 있기도 하다. 즉 타인의 말을 들음에 자신의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이다. 이 경청을 통해 상대방을 이해하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조리 있게 전달함을 의미한다. 즉 자신이 가진 고정관념을 없애는데 끊임없이 노력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공자는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분발하지 않는 제자들에게는 깨우쳐 주지 아니하였고 하나를 듣고 셋을 미루어 짐작하지 않으면 즉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반복해서 가르치지 않았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孔子以四(공자이사교):文(),行(),忠(),信()(절사):毋意(무의),毋必(무필),毋固(무고),毋我(무아)。所(소신):齊(),戰(),疾()。子罕言利與命與仁(자한언리여명여인)。不憤不(부분부계)一隅不以三隅反(거일우부이삼우반),則弗復也(칙불복야)

 

논어 전편에 나오는 모든 공자님의 말씀은 짧지만 깊은 울림을 준다 그리고 그것을 깨치지 아니하더라도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힘을 지닌다. 개인적인 경험 중 하나가 논어를 매일 공부하며 암송하며 거울을 본 적이 있다. 매일 보는 얼굴이지만 그 얼굴에 화내고 미워하고 모진 인상이 잦아들고, 유하고 선하고 평온한 인상이 되어감을 본 적이 있다. 그리고 내어놓는 말에서도 그러함이 느껴진 것이다. 그리고 행하기 전에 삼가 다시 한번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만약 공자 스스로가 말과 사유(思惟)만으로 이러한 주장을 하였다면 아마도 그 주장에 힘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많은 제자들이 따르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그의 인의(仁義)의 정신은 계승되어 내려오지 못하였을 것이다.

 

3. 공자의 현실 정치 참여의 욕구

 

공자의 주장하는 군자의 소임은 입신양명(立身揚名)이다. 공자도 끊임없이 현실 정치에 참여하려 하였다. 공자나이 42세 때 계평자에 의해 유랑생활을 하던 노소공이 죽었다. 노정공이 제후에 오르고 5년 뒤 계평자가 죽고 그의 아들 계환자가 그의 뒤를 이었다. 게평자와 마찬가지로 노나라의 권력을 손에 쥔 계환자는 오만 방자하여 노 정공을 업신여겼다. 이 당시 대부 계환자의 집안에는 가신 중양회가 신임을 얻고 있었고 또 다른 가신 양호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양호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정공 9년 양호가 계씨와의 권력다툼에 지고 제나라로 달아나게 된다.

 

이는 제후가 천자를, 경대부는 제후를, 대부의 가신들은 경대부를 참람되이 반역을 도모하는 즉 정도(正道)와 예()가 사라진 노나라가 되어간 것이다. 노나라에 道()가 사라지자 이에 공자는 물러나 시()() () ()을 제자들에게 가르치며 있었다. 이런 반란에 반란이 거듭되던 시국에 양호를 물리치고 권력을 잡은 이는 계()씨의 가신 공산불뉴였다. 공산불뉴가 공자를 초빙하여 권력장악의 정당성을 얻고자 하였다. 이에 공자는 가려하였으나 자로가 언짢아하며 공자를 만류하는 일화가 나온다.

 

公山不以費畔季氏(공산부뉴이비반계씨),使人召孔子(사인소공자)。孔子循道彌久(공자순도미구),溫溫無所試(온온무소시),莫能己用(막능기용),曰(왈):「蓋周文武起鎬而王(개주문무기풍호이왕),今費雖小(금비수소),儻庶幾乎(당서기호)!」欲往(욕왕)。子路不說(자로부설),止孔子(지공자)。孔子曰(공자왈):「夫召我者豈徒哉(부소아자기도재)?如用我(여용아),其東周乎(기위동주호)!」然亦卒不行(연역졸부행)

공산불뉴는 비(費) 읍을 점거해 계씨에게 반란을 일으키고서 사람을 보내 공자를 불렀다. 공자는 치국의 도를 지켜온 지 오래였으나 그 뜻을 펼칠 곳이 없어 울적하였고, 자신을 기용하는 사람도 없던 차라 말하기를당초 주 문왕과 주 무왕도 풍()과 호()에서 일어나 왕업을 이루었고, 지금 비(費) 읍이 비록 작기는 하지만 혹시 그와 거의 비슷하지 않겠는가?”하며 가려고 했다. 자로가 언짢아하면서 공자를 말렸다. 공자가 말했다. “나를 부르는 자가 어찌 공연히 부르겠느냐? 만약 나를 기용하면 그곳에 동주(東周)를 부흥시키겠다!”라고 했으나 끝내는 가지 않았다.

 

노정공 8(BC500) 노나라의 정권을 잡고 있던 三桓(삼환) 세력의 적자들이 양호에 의해 죽게 되었다. 계환자가 계책을 써서 빠져나가고 그 뒤 삼환이 다시 뭉쳐 양호를 치니 양호는 양관으로제나라로 달아났다. 노나라의 권력 혼란기에 노정공은 공자를 등용해 삼환을 견제한다. 처음 노정공은 공자를 중도의 재상에 임명하자 중도는 잘 다스려지어 신임을 얻게 되며 이어 사공과 대사(大司寇)구까지 오르게 된다. 대사구는 현재의 법무부 장관으로 노나라의 법을 관장하는 장관이다. 이에 공자는 본격적인 정치를 하며 왕실권위의 회복과 법 집행자로서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당시 권신이었던 대부 소정묘(少正卯)를 주살(誅殺)하게 된다.

 

당시 소정묘는 공자는 같은 작위로 大夫(대부) 신분이었다. 7일 조회를 열어 토론 끝에 결국 소정묘를 죽이게 된다. 이를 제자들이 걱정하며 말하길 소정묘는 노나라에서 이름 있는 대부인데 선생님께서 주살하시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까?”라고 말하니 아래와 같이 말한 것이다. 공자는 이 소정묘 주살을 통해 두 가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 것이다. 그 첫 번째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립하여 자신이 펴고자 하는 정치철학을 노나라에 세우려 한 것이고, 그 두 번째가 삼환 세력의 견제와 통제를 염두에 둔 일종의 정치적 행위였다고 볼 수 있다. 즉 삼환 세력들에게 너희도 말을 듣지 않는다면 소정묘와 같이 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순자 유좌편

孔子魯攝相(공자위로섭상),朝七日而誅少正卯(조칠일이주소정묘)。門人進問曰(문인진문왈):「夫少正卯魯之聞人也(부소정묘로지문인야),夫子政而始誅之(부자위정이시주지),得無失乎(득무실호),」孔子曰(공자왈):「居(거),吾語女其故(오어녀기고)。人有惡者五(인유악자오),而盜竊不與焉(이도절부여언):一曰(일왈)心達而險(심달이험);二曰(이왈)行辟而堅(행피이견);三曰(삼왈)而辯(언위이변);四曰(사왈):記醜而博(기추이박);五曰(오왈):順非而澤(순비이택)--此五者有一於人(차오자유일어인),則不得免於君子之誅(칙부득면어군자지주),而少正卯兼有之(이소정묘겸유지)。故居處足以聚徒成群(고거처족이취도성군),言談足飾邪營眾(언담족식사영중),足以反是獨立(강족이반시독립),此小人之桀雄也(차소인지걸웅야),不可不誅也(부가부주야)。是以湯誅尹諧(시이탕주윤해),文王誅潘止(문왕주반지),周公誅管叔(주공주관숙),太公誅華仕(태공주화사),管仲誅付里乙(관중주부리을),子誅鄧析史付(자산주등석사부),此七子者(차칠자자),皆異世同心(개이세동심),不可不誅也(부가부주야)。詩(시)》曰():『憂心悄悄(우심초초),慍於群小(온어군소)。』小人成群(소인성군),斯足憂也(사족우야)。」

 

"첫 번째는 마음이 비뚤고 험악한 것, 두번째는 행실이 괴팍하고 고집스러운 것, 세번째는 말이 거짓말로 변명하는 것, 네번째는 글이(기록이) 추잡함에도 많이 아는 척하는 것, 다섯번째는 순리를 따르지 않으면서 은혜로운 척하는 것인데, 이 다섯 가지 중 한 가지라도 그 사람에게 있으면 군주로부터 주살(誅殺)을 면하지 못하는 것인데 소정묘는 그 다섯 가지를 모두 겸하여 가지고 있었다."

 

노정공 10년 공자나이 52세 노나라와 제나라가 평화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같은 제후국으로 동등한 위치에서 제 경공과 노 정공은 협곡에서 회맹을 한다. 이때 제후들 간의 예법을 익힌 공자는 제나라의 예에 맞지 않는 오랑캐의 춤과 음악을 지적하고 궁중의 춤과 음악을 연주하라고 주청 하자 제 경공이 부끄러워하였다. 그러면서 담당관리의 잘못을 꾸짖으며 誅殺(주살)을 강하게 주장한다.  이에 제경공이 명을 내린다. 제후들간의 회맹에서 예()가 노나라에 비해 한참 미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자 제나라 수행원이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며 노나라에서 취한 운, 민양, 구음 땅을 돌려줄 것을 주청 하게 된다. 이것으로 노나라에서 공자의 위상은 더 높아지게 된다.

 

 

。景公懼而動(경공구이동),知義不若(지의부약),歸而大恐(귀이대공),告其群臣曰(고기군신왈):「魯以君子之道輔其君(로이군자지도보기군),而子獨以夷狄之道寡人(이자독이이적지도교과인),使得罪於魯君(사득죄어로군),之奈何(위지내하)?」有司進對曰(유사진대왈):「君子有過則謝以質(군자유과칙사이질),小人有過則謝以文(소인유과칙사이문)。君若悼之(군약도지),則謝以質(칙사이질)。」於是齊侯乃歸所侵魯之鄆(어시제후내귀소침로지운)、汶陽(문양)、龜陰之田以謝過(구음지전이사과)

 

경공은 두려워하면서도 감탄하였으며도의적인 면에서 따르지 못함을 알고 돌아와서 크게 두려워하며 신하들에게 말했다. “노나라는 군자의 도리로 그 군주를 보좌하는데 그대들은 오로지 이적(夷狄)의 도리로 과인을 가르치려 들다가 과인으로 하여금 노나라 군주에게 죄를 짓게 했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은가?”담당관리가 나서서 대답했다. “군자는 과오를 범하면 실질적인 것으로 사죄하고소인은 잘못을 하면 말로만 사죄합니다. 군주께서 만약 마음이 편치 않으시면 실질적인 것으로 사죄하면 됩니다.” 이에 제 경공은 곧 노나라로부터 빼앗은 운(), 민양(汶陽), 구음(龜陰)의 땅을 돌려주는 것으로 잘못을 사죄했다.

 

노정공 13(BC497) 공자는 섭정으로써 그리고 자로를 계씨가문의 가신으로 들여보내어 자신이 정치적 목적이었던 三桓(삼환) 세력의 약화를 위한 정치적인 작업을 한다. 노정공으로 하여금 대부들의 무기비축과 성(城) 높이를 문제 삼게 하여 성을 허물고 무기를 없애는 작업을 진행한다. 숙손씨의 호응으로 먼저 후성을 허물고, 계씨의 가신인 공산불뉴의 성읍인 비(費) 성을 허물었다. 마지막으로 맹손의 식읍인 성(成) 읍을 허물고자 하였으나 맹손씨와 그의 가신 공렴처보의 반대로 실패하며 반쪽의 성공으로 그치게 된다.

 

노나라의 정치가 공자에 의해 안정되자 인접 국가들은 위기감을 느낀다. 특히 공자를 접해본 경험이 있는 제나라 경공은 노나라의 안정과 국력신장이 장차 제나라에 위기로 다가올 것을 염려하게 된다. 정공 14년 공자나이 55세 공자의 이상정치 실현은 삼환의 견제와 제나라의 미인계 공작에 여지없이 무너지게 된다. 제 경공은 대부 여서의 미인계를 써서 노정공을 여색에 빠지게 하고 정사를 게을리하게 만든다. 공자의 정적 계환자는 노정공을 부추겨 여악(女樂)을 받아들이게 하여 사흘 동안 국정을 돌보지 않게 만든다. 이에 자로는 공자에게 이제 노나라를 떠날 때가 되었다고 말하자 공자가 말하길 노나라 군주가 얼마 뒤 교(郊) 제사를 지낼 텐데 예전처럼 제사에 쓴 고기를 나눠준다면 남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바람과는 달리 제사 고기를 나누어 주지 않자 그 의미를 알아챈 공자는 노나라를 떠나게 된다. 이때부터 공자의 주유천하가 시작되는 것이다. 

 

4. 공자, 노나라를 떠나다

 

정치 행정가로서의 공자는 계손씨의 가신 때부터 노나라의 대사구에 이르기까지 많은 공을 쌓고 명성을 얻는다.  가장 큰 치적으로는 제나라와의 회맹에서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는 성과를 거두었고, 전횡을 일삼던 대부 소정묘를 주살하였으며, 삼환 세력의 힘을 빼기 위한 불필요한 성곽을 허물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정책도 계환자의 계략에 의해 중단되고야 만다. 즉 공자의 세력 성장에 두려움을 느낀 계환자는 맹손 숙손의 세력들과 힘을 합쳐 공자를 견제한다. 맹손씨의 성읍을 허무는 작업이 명목상으로는 그들의 가신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하나 실질적으로 삼환의 견제가 있었을 것이라 보인다 공자는 노나라에서 자신의 위치와 이상정치 실현이 어려워짐을 정확히 읽어낸 것이다.

 

공자 학이편에 오십(五十)이면 지천명(知天命) 글이 있다. 즉 천명을 알고 물러나는 공자의 처세였던 것이다. 더 이상 욕심을 부린다면 욕되거나 위태로움이 자신에 미칠 것을 알았던 것이다. 이때 공자는 천명(天命)을 알았던 것이다. 하늘이 허락한 현실정치의 참여는 거기까지였던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知天命(지천명)이라 하였을 것이다. 14년 동안 공자는 천하를 주유하며 춘추 제후국의 실상과 제후와 대부 그리고 그가 머물렀던 나라의 인간 군상을 통해 또 다른 깨우침이 있었을 것이다. 이렇듯 공자의 배움은 춘추 제후국의 군주와 대부 그리고 세상 흩어져 살아가는 은자(隱者)들을 통해 자신의 학문의 깊이를 더해간다. 

 

공자가 먼저 간 곳은 위(衛)나라로 갔으나 군주 영공은 공자를 겉으로는 대우해주는 척하며 속으로는 사람을 보내 공자를 감시하게 하였다. 공자는 화를 입을까 위를 떠나 진나라로 갔다. 가는 길에 광(匡)성에서 양호를 닮았다는 이유로 포위당하였으나 위나라 대부 영무자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그뒤 위 영공(靈公)의 부인 남자의 초청으로 위나라를 방문하였다. 그러나 남자가 공자의 명성을 이용하려 하는 것을 알아채고 다시 위나라를 떠나 조나라, 그리고 송나라로 갔다. 송나라에서는 사마환퇴가 공자를 죽이려 하여 정(鄭)나라로 떠났다. 그뒤 진(陳)나라에서 3년을 살았는데 정나라의 전쟁으로 인해 포향을 거쳐 다시 위나라로 갔다. 위영공이 끝내 공자를 중용하지 않자 다시 진()으로 돌아왔다. 이렇듯 공자의 천하주유는 고난의 행군과 같았다.

 

계환자가 병에 걸려 죽으려 할 때 계강자에게 공자를 다시 불러 중용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그러나 계강자는 공자는 차마 부르지 못하고 공자의 제자 염구를 불러 대부집안의 재상을 맡겼다. 그 뒤로도 공자는 채나라에서 3년을 머물고 초나라 소공의 초빙으로 초나라를 갔다. 초 소공은 공자의 명성을 듣고 그를 중용하려 하자 영윤 자서의 반대로 결국 공자의 등용은 무산되었다. 노애공 11(BC484) 공자나이 68세 노나라와 제나라 간의 전쟁에서 염구가 큰 공을 세우자 계강자는 염구를 통해 공자를 다시 노나라로 예를 갖추어 불러들이게 된다. 이때 나이 68, 55세 시작된 천하 주유는 13년이 지나 68세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13년 천하주유 중 진, 채나라에서 곤경에 빠졌을 때 일화가 있다. 이 편을 통해 자로와 자공과 안회의 자질을 엿볼 수 있다. 노애공 6(BC489) 공자나이 63세 때 공자는 채(蔡) 나라에서년을 머물다 초 소왕이 공자의 명성을 듣고 그를 초빙하자 이를 두려워한 채나라 대부는 공자일행을 교외에서 포위한다. 공자일행은 곤경에 빠진 데다 식량까지 바닥났다. 제자들이 굶주림에 시달임에도 공자는 시를 읊고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부르니 기분이 상한 자로가 불만의 목소리로 한마디 한다.

군자도 이처럼 곤궁할 때가 있습니까?” 공자가 말하길 군자는 안빈낙도하며 하며 절개를 지키지만 소인은 궁하면 나쁜 짓을 한다

자공도 불만석인 표정을 짓자 공자가 말하길 ()야 너는 내가 많이 배우고 그 배운 것을 일일이 기억한다고 생각하느냐? 자공이 대답하길 그럼 그렇지 않다는 말씀이십니까?” 공자가 말했다  아니다 나는 한 가지 도리로 세상의 모든 것을 꽤 뚫어 볼 뿐이다.”

공자는 제자들의 불만을 눈치채고 자로에게 말하였다.

시경에 무소나 호랑이는 살기 위해 광야에서 동분서주한다’라고 쓰여있는데 나도 그런 동물처럼 광야를 동분서주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그럼 나의 도가 잘못되었단 말이냐?”라고 물었다.

 

이 물음을 통해 공자는 제자들의 답을 유도하고 자로와 자공 그리고 안회의 성정에 맞게 답을 한다. 공자가 인용한 글은 시경(詩經) 소아(小雅)를 인용한 것으로 주나라 때 부역을 가는 이들의 괴로움을 노래한 것이다. 공자가 곤경에 빠져 편히 거처하지 못함을 탄식과 더불어 자로에게는 자로의 어법으로 자공에게 자공의 어법으로 고난의 상황에 대한 불만을 누그러트린다. 그러나 안회의 답만은 달랐다. 안회의 답은 불편의 토로가 아닌 공자의 도의 크고 높음을 말하였다. 이에 공자는 기뻐하고 웃으며 안회의 집사가 되겠다는 말을 한다. 공자의 농담이었을지라도 제자 중 안회만이 유일하게 공자의 마음을 알아주고 그에 합당한 답변을 한 것이었다.  

 

「《()》云()率彼曠野(솔피광야)』。吾道非邪(오도비사)?吾何於此(오하위어차) 回曰(안회왈):「夫子之道至大(부자지도지대),故天下莫能容(고천하막능용)。雖然(수연),夫子推而行之(부자추이행지),不容何病(부용하병),不容然後見君子(부용연후견군자)!夫道之不修也(부도지부수야),是吾醜也(시오추야)。夫道已大修而不用(부도기이대수이부용),是有國者之醜也(시유국자지추야)。不容何病(부용하병),不容然後見君子(부용연후견군자)!」孔子欣然而笑曰(공자흔연이소왈):「有是哉氏之子(유시재안씨지자)!使爾多財(사이다재),吾爾宰(오위이재)。」

 

안회가 대답했다. “선생님의 도가 지극히 크기 때문에 천하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선생님께서 그 도를 널리 알려 실행하신다면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것이 무슨 걱정입니까받아들여지지 못한 다음에야 비로소 군자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무릇 도를 닦지 않은 것은 나의 치욕이지만도를 크게 닦아 놓았는데도 쓰이지 못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자의 치욕입니다.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것이 무슨 걱정입니까받아들여지지 못한 다음에야 비로소 군자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공자는 흔연히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구나! 안씨 집안의 아들이여! 만약 네게 재물이 많다면 내가 너의 집 가신 노릇을 하겠다.

 

5. 공자의 사상 인()과 예()

 

공자는 위대한 사상가라 말한다. 그 위대한 사상이 오늘날까지 전해진 중요한 사상 중 하나가 정명(正名) 론이다.정명사상은 ()을 바로잡는다라는 의미다. 자로가 공자에게 정치를 하신다면 무엇을 먼저 하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공자가 말하길 반드시 명()을 바로잡겠다. 고 하였다. 그럼 이 명()이란 무엇인가? 어렵지만 간단한 표현으로 그 이름()에 부합하는 실제()가 있어야 그 이름이 성립한다는 의미이다.

 

계강자가 정치에 대해 물었을 때 정치는 바름()입니다라고 답한 것을 정명론으로 풀어내어보면 정치()는 명분()이고 바름()은 실제()인 것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어버이는 어버이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나 사물의 이름과 그것들이 지닌 덕성이 일치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을 실()에 맞게 바르게 한다는 것이다.

 

이 위대한 사상은 노자의 도덕경 1무명천지지시(無名天地之始), 유명만물지모(有名萬物之母),에도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이름 없는 것은 우주로부터 시작되나, 이름을 갖게 되는 것은 만물(사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물을 지칭할 때 이름을 부여하여 인식을 함으로써, 문명세계를 이루었고, 인식이 거기서부터 발생된다고 말하는 부분이다. 이 명()이 생기면서 우주삼라만상의 인식체계에 시작이 있는 것이다. 공자가 명()을 바로잡는다는 것은 높은 수준의 정치행위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를 통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계가 바로 정명론인 것이다. 이 논어에 실려있는 공자의 정명이란 단어는 순자에 의해 더욱 연구되어 정명이란 편명을 통해 사상으로 더 확장한다. 참조 https://ctext.org/xunzi/zheng-ming/zh

 

공자님의 사상을 표현하는 단어가 여러 가지 있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인()이고 예()이다. 예를 개인적 차원 사회적 국가적 차원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필요한 덕목이 인()인 것이다. 막상 인()에 대한 정의는 내리기 힘들다 또한 가르치기도 쉽지 않은 것이다. 가장 쉬운 그러나 부족한 설명이 바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출발된 사상은 세상의 모든 만물을 대하는 자세로 표현되고 변주된다. 논어를 통해 나온 인을 설명하자면 공자의 애제자 안연에게 극기복례(克己復禮)’라 하였다. 극기란 자기를 이기어 욕망의 억제를 말하며, 복례란 예에 부합되는 말과 행위를 말한다.  안연은 더 나아가 극기복례가 무엇인지 물었다. 공자는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 말고 행하지도 말아라”라고 하였다. 여기서 예란 주(周) 나라 종법사회에서 형성된 그 질서체계를 말한다. 즉 봉건 군주제에서 국가 사회 나아가 개인 간의 관계 맺음을 주(周) 나라의 예()를 통해서 행하라고 하는 것이다.  공자가 이처럼 예()를 강조한 것은 당시 주나라의 유()와 려(厲) 왕의 실정으로 군신의 관계에 예가 무너져가고 노나라 대부 삼환세력의 득세로 인한 제후와 대부들 간의 예의가 실종이 되고 심지어는 군주를 쫓아내고 시해하는 상황에서 더욱더 강조를 한 측면이 있었을 것이라 추론해 본다.

 

공자는 인()을 개인 간의 관계에서 도덕적 원칙을 말하였다. 사람이 인하여 부자간에 자()와 효()가 있고 군신 간에 충()과 신()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확장하여 공자의 제자 증삼은 충서(忠恕)로서 공자의 사상을 쉽게 풀이하였다. 즉 진실된 마음과 같은 마음을 말한 것이다. 공자는 이 서()를 위령공 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기가 바라지 않는 바를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 바로 이것이 서()인 것이다.

 

공자는 말년에 자신의 사상을 바로 시, , , , , 춘추에 녹여 역으며 후대에 영향을 끼친다. 그 중 특히 춘추(春秋)는 노나라를 중심으로 서술한 역사서로 노 은공(隱公)에서부터 애공(哀公) 14년까지 각 나라에서 발생한 역사적 사건들을 기록하고 간략한 말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그가 기록한 춘추에는 무도한 군주나 대부는 예리한 붓 칼로써 주살하였고 현군이나 충신은 그들의 덕을 기리었다. 여기서 무도한 군주나 대부는 인하지 못하고 무도하고 예의가 없는 이들을 가차 없이 베어버린 것이다. 공자는 말했다. “ 후손들이 나를 알아준다면 그것은 모두 춘추 때문일 것이고 나를 비난한다면 그 또한 춘추 때문일 것이다.” 후대의 난신적자들이 두려워할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이 춘추이다.

 

공자는 춘추(春秋)를 술()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주 문왕을 성왕이라고 말하였다. 주 문왕 시대의 이상정치의 모습을 그리워하였다. 춘추시대 주왕조가 쇠락해가는 과정에서 인(仁)의(義)예()의 상실의 과정을 역사를 통해보았을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국가통치를 인의 예를 통한 덕치(德治)로 보았던 것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춘추의 제후국 군주들에게 유세를 하였고 자신의 이상정치를 실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부자관계 군신 간의 관계 예의 질서가 무너져가는 시점에서 인의(仁義)를 부르짖으며 정치에 참여하려 함이 오히려 이상주의자이자 몽상가의 모습으로 제후들 사이에 비친 것이다.

 

공자는 노나라 대사구(大司寇) 이후 끊임없이 현실정치에 참여하려 했다. 그것이 비록 대부의 가신이었음에도 하려 한 것은 주나라 종법 봉건의 질서가 무너지고 무도하고 실권이 없는 제후보다 오히려 자신의 이상정치 실현이 쉬울 수 있겠다는 판단에서였지 않을까 감히 상상해 본다.노군주의 실정에 삼환의 득세 강대국이었던 晉나라가 육경에게 권력이 넘어간 상황, 이런 시대적 배경이 공자가 천자나 제후를 통해 현실정치 참여보다 제자의 육성과 경서의 전술에 전념하게 만든 것이다. 이로 인해 공자의 사상은 완성되어2500여 년 간 동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로 전파되어 간 것이다.

 

감히 공자님의 사상을 평한다는 것 자체가 무례한 일이다. 그러나 공자의 제자들에 의해 쓰인 논어 춘추 그리고 사서오경,사마천의 사기를 통해 공자님을 맞이한다. 그 위대하고 거대한 사상을 배움이 짧은 나로서는 감히 평할 수 없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통해 그리고50여 년 해온 배움을 통해 공자님의 삶을 짧게나마 정리해 본다. 공자님을 가장 잘 표현한 사람이 둘 있다. 하나가 공자의 제자 안연이다. 그는 공자님을 일러 이렇게 평하였다.

스승님의 학문과 사상은 넓고 심오해서 우러러볼수록 숭배하게 되고, 깊이 연구할수록 학문의 견고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앞에 있는 줄 알았는데 홀연히 뒤에 있곤 했습니다. 스승님은 우리를 차근차근 가르치셨습니다. 먼저 고전을 통해 지식을 넓히고 예법을 통해 행동규범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중간에 배움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스승님의 학문과 식견은 여전히 제 앞에 우뚝 서 있었고 스승님의 경지에 이르고자 온 힘을 쏟았으나 따라잡을 수 없었습니다.”  

 

  喟然歎曰(안연위연탄왈):「仰之彌高(앙지미고),鑽之彌堅(찬지미견);瞻之在前(첨지재전),忽焉在後(홀언재후)。夫子循循然善誘人(부자순순연선유인),博我以文(박아이문),約我以禮(약아이례)。欲罷不能(욕파부능)竭吾才(기갈오재),如有所立卓爾(여유소립탁이)。雖欲從之(수욕종지),末由也已(말유야이)

 

 

마지막으로 공자님 스스로가 평가하신 글로 마친다.

 

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 서른에 자립했으며, 마흔에 인생의 목표에 흔들림이 없었다. 쉰에 하늘의 뜻을 알았고, 예순에 귀에 거슬리는 것이 없었으며 일흔에는 마음 내키는 대로 좇아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子曰(자왈):「吾十有五而志于學(오십유오이지우학),三十而立(삼십이립),四十而不惑(사십이부혹)五十而知天(오십이지천명),六十而耳順(륙십이이순),七十而從心所欲(칠십이종심소욕),不踰矩(부유구)。」

 

오십 중반에 공자님의 글을 통해 어렴풋이나마 天命을 알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