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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_평준서

반구저기 2020. 11. 22. 15:24

부동산폭등과 MMT

 

불과 몇 달 전까지 나는 무주택자였다. 2009년 부산으로 가족들과 이사한 이래로 전세입자였다. 이사 당시 기억으로 해운대 2002년식 아파트가 2억이 채 되지 않는 금액으로 전세를 살 수 있었다. 그러다 4년후 집주인이 집을 판다고 하여 전세를 옮겨2 5천 그리고 2014년 최경환 경제 부총리 때 한국식 양적 완화로 금리 인하가 시작되며 집값은 고공 행진의 시작을 알렸다. 그 당시 이사철 마다 집사람은 집을 사자고 조르고 나는 조금만 더 지켜보자는 입장이었다. 집값이 오르고 그럴 때마다 이사를 해야 했던 집사람은 나의 결정을 미덥지 않게 따라 주었다. 결국은 2019년 집값은 폭등하기 시작하여 2006 36천의 아파트가 지금에 이르러 7억에 거래가 되고 있으니 나로선 집사람에게 미안할 따름이었다. 결국은 집사람의 집을 매수 하려는 생각을 굳힌 것은 이번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얼마나 미숙한지 알게 된 것이고, 그로 인해 폭등한 주거비용이 나와 같은 무주택자들에게 상대적 박탈감과 상실감이 그 화풀이 대상으로 지금의 문제인 정부로 향하게 된것이다.

 

노무현 정부때의 기억이 다시 떠올리게 하는 것은 그때도 마찬가지로 인위적으로 주택 안정화를하려다 결국은 집값을 잡지 못하고 앙등하였고 결국은 시장의 금융위기로 인한 대외적 변수에 의해 집값은 서서히 잡혀 갔다. 그 대외변수는 주지하다시피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금융사태 때이다. 그 이후 미국은 엄청난 량의 머니 프린팅을 실시한다. 금융시스템 붕괴를 우려한 미국은 말 그대로 윤전기를 돌려 달러를 찍어내고 낮은 수준의 금리로 자국 내 금융과 기간산업 자동차등을 지켜낸 것이다. 그 뒤로 금리 인상을 하자 다시 금융과 세계경제는 위기의 시그널을 FED에 보내자 다시 금리를 내리고 머니프린팅 스텐스를 취하게 된다.

 

그리고 그 정점이 코로나19로 전세계 은행이 돈을 마구 찍어내어 경기를 살리는 정책을 펴게 되며 전세계 자산시장의 인플레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 중의 하나가 금가격이고 , 주식, 부동산, 즉 실물에 쓰는 우리 공산품을 제외한 모든 자산의 버블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MMT(Mordern Monetary Theory)는 정부의 지출이 세수를 넘어서는 안된다는 주류경제학의 원칙을 깨고 경기부양을 위해 정부가 화폐 즉 통화량을 계속 증가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이다. 이는 1970년대 미국의 결제학자들 사이에서 주창한 이론으로 국가가 과도한 인플레만 없다면 경기 부양을 위해 머니 프린팅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조금 더 들어가면 주류 경제학자들의 화폐의 기능은 시장에서 가치교환의 효율성을 말하지만 MMT이론가들은 정부가 조세를 거두기 위해 화폐를 발행한 것으로 본다. 각국정부의 통제력에 기반한 국체발행은 파산의 일이 없기 때문에 적자국채 발행이 늘어도 괜찮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기축통화국 그리고 그 미국과 무제한 통화 스왑을 맺은 국가는 상관이 없겠지만 통화 스왑을 맺지 않는 개도국은 국채 발행을 자유롭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 개도국의 딜레마가 있다. 기축통화국이야 국채를 얼마나 발행을 하던, 자국의 기업어음을 얼마나 매수를 해주던 간에 중앙정부가 채무과다로 파산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달러가 들어오는 무역수지 흑자국은 그나마 형편이 낫다. 달러가 지속적으로 유입되기에 파산의 위험이 적어서 어느 정도의 양적 완화 금리인하는 가는 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중남미 개도국과 아프리카, 동유럽, 아시아 많은 나라들은 고스란히 MMT의 태풍에 노출되는 것이다.

 

한때 우니나라에 일본계자금 산ㅇ머니, 무ㅇㅇ 등의 일부 제3금융의 고금리 대출(63%까지 기억남)이 있었다 이 일본계 자금은 자국내에서 제로금리로 돈을 한국으로 유입해와서 고금리 장사를 하는 것을 본적이 있다. 좀더 지난 97년 한국 IMF 당시에도 낮은 금리의 달러  자금이 국내 낮아진 자산을 거져 주워 가다시피 한 기억이 난다. 그 대표적 사례가 외환은행을 2천억에 사서 4조에 팔고 나간 론스타등을 우리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2013년 아베정부가 들어서며 아베노믹스가 시행된 후 일본중앙은행이 대규모 국채를 사들여 막대한 돈을 풀어도 일본물가가 년 2%대 아래에 있으니 MMT이론가들은 이를 실증사례로 들고 있다. 물론 일본 경제가 살아 났냐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다. 혹자는 머니프린팅이라는 마약이 사라지는 순간, 미국과 통화 스왑의 혜택이 사라지는 순간 일본이란 나라는 국가가 부도난다는 설도 있다.

 

이러한 머니 프린팅은 우리가 살아가는 의식주에 영향을 알게 모르게 미치고 있다. 특히나 대한민국에서는 가계자산의 80~90%를 차지하는 주()에 영향을 피친 것이다. 불과 1년전 10억 하던 서울의 아파트가 20억으로 8억하던 부산 수영구의 한 아파트가 18억으로 수직상승 하였다.

 

이번 부동산 폭등이 나의 부동산에 대한 관점과 시장을 이기려는 정부정책이 얼마나 무모한지 다시 한번 일깨워준 계기가 되었다. 두 번이나 정부가 시장을 통제해주고 주거 물가를 안정화시켜 줄 것이라는 믿음을 거두게 되었다. 보수는 시장친화적인 정책을 통해 물가를 앙등시켜 민중을 가난하게 만들고 진보는 어리석은 정책으로 시장을 왜곡하여 민중을 더욱더 가난하게 한다는 것을 더 뼈저리게 느낀 것이다.

 

아래는 사마천 사기 (평준서)에 나타난 한()나라의 시대상이다. 초기 약법삼장의 정책으로 백성(사농공상)이 부유해 졌으나 상인의 탐욕에 의한 독점의 폐해와 한나라 화폐 개혁이 인플레가 상인들의 매점매석으로 물가 폭등 이윤 극대화 그리고 한무제가 시행한 상인의 통제를 보여주는 글이 있다어 공유한다.

 

 

1.매점매석(買占賣惜)의 기원

 

상인의 이익 추구 관점에서 매점매석은 기원전이나 기원후 다 마찬가지다 즉 자본주의의 시작은 철기문명 도입으로 경작면적이 늘어나고 그에 따른 잉여생산물의 교환이 시작되며 태동되었고 화폐의 사용을 통해 꽃피워 나간 것으로 볼 수 있다. 경제권력과 통치 권력의 결합을 미연에 막고자 그 상인의 자식은 정계진출을 막은 내용도 있음을 본다. 또한 잘못된 정책이 화폐발행권을 민간에 이양 이것이 통화량의 증가를 가져옴음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이로 인한 폐해는 물가의 상승이고 자산 가격의 폭등을 유발시킨다.

 

흔히들 국민의 부유한 척도 기준을 GDP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경제적 지표일 뿐이다. 나라가 부유하다하여 백성이 부유한 것은 아니다. 즉 국민들이 실생활에 소비하는 의식주에 있어어 얼마나 많은 비용을 지불하느냐를 본다면 GDP가 낮은 나라보다 오히려 더 궁핍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소득대비 의식주의 실질 비용인데 그 실질 비용이 증가를 하면 즉 국민은 가난해지는 것과 같다. 이를 역으로 보면 비록 GDP는 낮더라도 국민의 의식주에 들어가는 비용이 낮으면 낮을수록 국민은 넉넉하진 않으나 부족하진 않은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이다.

 

2200년전 한나라 고조에서 한무제에 이르는 시절의 국가 경제정책은 오늘날의 모든 경제적 폐해를 다 다루고 있다. 경제를 활성화 하기 위하여 상법을 느슨하게 함과 경제권력의 부상을 막고 매점매석을 못하게 하는 정부의 적절한 통제 등이 이 평준서에 나와 있는 것이다.

 

그 기록을 돌아보면

 

1 漢興,接秦之獘,丈夫從軍旅,老弱轉糧,作業劇而財匱,自天子不能具鈞駟,而將相或乘牛車,齊民無藏蓋。於是秦錢重難用,更令民鑄錢,一黃金一斤,約法省禁。而不軌逐利之民,蓄積餘業以稽市物,物踴騰糶,米至石萬錢,馬一匹則百金。

 

중략법령을 간소하게 하고 금령을 줄였다. 그러자 법을 지키지 않고 이익만 추구하는 백성(상인)이 매점매석하여 시장의 물가가 크게 올라 쌀 한섬은 만전 말한필은 백금이 되었다.

 

2 天下已平,高祖乃令賈人不得衣絲乘車,重租稅以困辱之。孝惠、高后時,天下初定,復弛商賈之律,然市井之子孫亦不得仕宦吏。量吏祿,度官用,以賦於民。而山川園池市井租稅之入,自天子以至于封君湯沐邑,皆各私奉養焉,不領於天下之經費。漕轉山東粟,以給中都官,歲不過數十萬石。

 

효혜제와 고후시기에는 천하가 안정되자 상법을 느슨하게 풀어주고 그 자식들이 관리가 되지 못하게한 것이다 (이것은 상인이 돈으로 권력을 사지 못하게 막은 것과 같다.)

 

 

3 至孝文時,莢錢益多,輕,乃更鑄四銖錢,其文「半兩」,令民縱得自鑄錢。故吳諸侯也,以即山鑄錢,富埒天子,其後卒以叛逆。鄧通,大夫也,以鑄錢財過王者。故吳、鄧氏錢布天下,而鑄錢之禁生焉

 

효문제때 협전은 더욱 많아지고 가벼워져 별도의 사수전을 주조했는데. 반량이란 글자가 새겨져있고 백성으로 하여금 주조도 가능케 하였다. 때문에 오왕(유비)는 소유한 산에서 나는 철로 주조하여 그의 부유함이 천자에 비등할 정도였고 그 후에 결국 반역하였다. 등통은 대부로서 그역시 돈을 찍어내어 그의 재산이 왕을 능가하였다 때문에 오왕 유비 등통의 돈이 천하에 퍼지니 주조권을 금지하였다.

 

15 其明年,山東被水菑,民多饑乏,於是天子遣使者虛郡國倉廥以振貧民。猶不足,又募豪富人相貸假。不能相救,乃徙貧民於關以西,及充朔方以南新秦中,七十餘萬口,衣食皆仰給縣官。數歲,假予業,使者分部護之,冠蓋相望。其費以億計,不可勝數。於是縣官大空。

산동지방에 수해를 입어 많은 백성이 굶주리자 이에 천자는 사신을 파견하여 그 지방의 창고를 열어 빈민을 구휼하였으나 오히려 부족하여 부유한 호족에게 물자를 빌렸으나 여전히 부족하였다.

 

 而富商大賈或財役貧,轉轂百數,廢居居邑,封君皆低首仰給。冶鑄煮鹽,財或累萬金,而不佐國家之急,黎民重困。於是天子與公卿議,更錢造幣以贍用,而摧浮淫兼之徒。是時禁苑有白鹿而少府多銀錫。自孝文更造四銖錢,至是歲四十餘年,從建元以來,用少,縣官往往即多銅山而鑄錢

 

그러나 부유한 상인들 중에 혹자는 재물을 축적하고 빈민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화물을 실은 수레가 수백 량에 이르렀으며, 읍 안에서 매점매석을 하여 물자를 독점했다. ()으로 봉해진 자들도 모두 머리를 숙이고 물자를 빌릴 정도였다. 혹자는 철기를 주조하고 소금을 만들어, 재물을 만금이나 축적했으나, 국가가 위급할 때에 돕지 않았기 때문에 서민들만 이중삼중으로 괴롭게 되었다. 이에 천자와 공경들이 상의하여 별도로 새로운 동전과 화폐를 만들어서 조정의 재정으로 쓰고, 경박하고 음란하며 불법적으로 토지를 겸병한 자들을 억누르려고 했다.

 

 

2.인플레이션과 상인 그리고 고민령

 

 

당시 철은 전쟁의 무기 그리고 돈을 주조하는 재료였고 소금은 백성들의 삶에 반드시 필요한 필 수 불가결의 재화였다. 이를 민간 경제에 맡긴 결과 이익만 좇는 상인들에 의해 매점매석이 되니 이를 징치하고자 공근과 함양이 정부 통제아래 두자고 주창한 것이다. 천자의 승인을 득한 후 소금과 철의 정부 전매정책을 시행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이유는 지방정부의 많은 관리들이 상인계급 출신이었고 그로 인해 통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앞서 언급한 상인이 권력을 얻는 것을 경계하였으나 한무제의 무리한 영토확장정책과 봉선에 무리한 지출로 매관매직을 통해 세수를 확보할 수 밖에 없었고, 그 정책으로 세력을 키운 상인들은 염철에 대한 독점적 권한은 더욱 강해지게 된다. 즉 어떠한 정책도 시장에 먹히지 않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이를 미루어 현재 한국의 부동산 시장을 보노라면 그 자산가격(부동산 주식 등..)의 상승의 과실을 지금의 위정자들과 상인들이 독차지 하는 것이니 어떠한 정책도 보내 의도한 바를 달성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취한 양적 완화의 정책은 자산인플레를 초래하고 있다. 그 인플레이션을 즐기는 사람들은 바로 산업자본 금융자본 정부 등일 것이다. 거기에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중위자산 이하의 백성들이 고스란히 당하고 있는 것이고 중위 자산 이하의 국민들의 부를 금융자본과 산업자본 그리고 부동산에 치부하는 사람들이 고스란히 가져가고 있다.

그런 폐해를 한무제는 민전제를 통해 혁파하고자한다. 부과된 세금을 속인 것을 고발한 자에게 그 민전제를 통해 거둬들인 벌금의 반을 주는 제도를 시행한다 이것이 고민령이다. 민전제 시행후 상인들의 고발이 많아지고 중등이상의 상인의 재산을 몰수하여 국고는 채워져 갔다. 이 계기가 많은 수의 상인계급의 몰락을 가져온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한무제는 다시 영토확장에 힘써 국고를 탕진해가니 징수된 세금과 벌금은 일반백성에게 돌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한무제의 가장 큰 실정은 이 채워진 국고를 통해 부국은 하였으나 백성의 고단한 삶은 돌보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영토확장의 정책을 버리고 봉선의식을 간소화하여 민중의 삶을 돌보았다면 가장 위대한 황제가 되었을 것이이라 상상해본다.       

 

 

大農上鹽鐵丞孔僅、咸陽言:「山海,天地之藏也,皆宜屬少府,陛下不私,以屬大農佐賦。願募民自給費,因官器作煮鹽,官與牢盆。浮食奇民欲擅管山海之貨,以致富羨,役利細民。其沮事之議,不可勝聽。敢私鑄鐵器煮鹽者,左趾,沒入其器物。郡不出鐵者,置小鐵官,便屬在所縣。」使孔僅、東郭咸陽乘傳行天下鹽鐵,作官府,除故鹽鐵家富者吏。吏道益雜,不選,而多賈人矣。

 

대농(大農)은 염철승(鹽鐵丞) 공근, 동곽함양과 다음과 같이 상주했다.

부식(浮食, 덕에 비해 식록이 많은 사람)과 기민(奇民, 친히 생산에 종사하지 않는 제후)들은 산과 바다의 화물(소금과 철)을 멋대로 독점해 치부하고 가난한 백성을 노비처럼 부리고 이익을 취하고 있습니다. …. 중략…. 그리하여 철과 염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관부를 세우고, 원래부터 염철을 경영했던 부자들을 관리로 임용했다. 이로 인해 관리제도는 더욱 난잡하게 되었고, 능력있는 관리를 뽑지 않았고, 관리 중에 상인 출신이 많아졌다.

 

 

23 商賈以幣之變,多積貨逐利。於是公卿言:「郡國頗被菑害,貧民無業者,募徙廣饒之地。陛下損膳省用,出禁錢以振元元,寬貸賦,而民不齊出於南畝,商賈滋眾。貧者畜積無有,皆仰縣官。異時算軺車賈人緡錢皆有差,請算如故。諸賈人末作貰貸賣買,居邑稽諸物,及商以取利者,雖無市籍,各以其物自占,率緡錢二千而一算。諸作有租及鑄,率緡錢四千一算。非吏比者三老、北邊騎士,軺車以一算;商賈人軺車二算;船五丈以上一算。匿不自占,占不悉,戍邊一歲,沒入緡錢。有能告者,以其半之。賈人有市籍者,及其家屬,皆無得籍名田,以便農。敢犯令,沒入田僮。」

 

상인들은 화폐의 주조가 자주 변하자 물건을 축적하여 이윤을 추구했다. 이에 공경대신들은 다음과 같이 상주했다. ….중략..... 이런 사실을 고발하는 자에게는 몰수한 민전의 반을 지급해야 합니다. 상인으로 시전에 등록한 자나 그 가족들은 모두 전답을 점유하지 못하도록 해 농민에게 이익을 주어야만 합니다. 감히 명령을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그의 전답과 동복(僮僕)을 몰수해야 합니다.”

 

35 卜式相齊,而楊可告緡遍天下,中家以上大抵皆遇告。杜周治之,獄少反者。乃分遣御史廷尉正監分曹往,即治郡國緡錢,得民財物以億計,奴婢以千萬數,田大縣數百頃,小縣百餘頃,宅亦如之。於是商賈中家以上大率破,民甘食好衣,不事畜藏之業,而縣官有鹽鐵緡錢之故,用益饒矣。

 

복식(卜式)이 제나라 왕의 재상이 되었다. 그리고 양가(楊可)가 주관하는 고민(告緡, 자산을 자진 신고하지 않는 사람을 고발)이 천하에 두루 퍼져, 중산층 이상의 상인들은 대부분 고발되었다. 두주(杜周)가 고발된 사람들을 다스렸는데, 사건을 뒤집는 경우는 매우 적었다. 이에 어사(御史), 정위(廷尉), 정감(正監) 등의 관원들을 조로 나누어 군군에 파견하여 고민사건을 처리했다. 그 결과 백성들로부터 거두어들인 재산은 억으로 계산할 정도였고, 노비의 수는 천만, 경작지는 큰 현의 경우에는 수백 경(), 작은 현의 경우에는 백 수십 경 정도를 얻었고, 주택도 그와 마찬가지였다.

 

이에 중등 이상의 상인들은 대부분이 파산했고, 백성들은 겨우 달게 먹고 좋은 옷을 입는 것에 만족해야지 사업에 종사하면서 재산을 축적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조정은 소금과 철을 관영하고 민전을 고발한 연유로 재정이 더욱 풍요로워졌다. 함곡관을 더욱 확장되고, 경성에 좌우보(左右輔)를 설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