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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노(解老)2_

반구저기 2019. 5. 3. 20:42

因道全法(도에 의해 법을 완전하게 한다)

 

노자와 한비자

 

德者,內也。得者,外也。上德不德,言其神不淫於外也。神不淫於外則身全,身全之謂德。德者,得身也。凡德者,以無集,以無欲成,以不思安,以不用固。之欲之,則德無舍,德無舍則不全。用之思之則不固,不固則無功,無功則生於德。德則無德,不德則在有德。故曰:「上德不德,是以有德。」

 

덕자내야 득자 외야 상덕부덕 언기신부음어외야 신부음어외칙신전 신전지위득 득자 득신야 범덕자 이무위집 이무욕성 이부사안 이부용고 위지욕지 칙덕무사 덕무사칙부전 용지사지칙부고 부고칙무공 무공칙생어덕 덕칙무덕 부덕칙재유덕 고왈 상덕부덕 시이유덕

 

덕은 내적인 것이고 득은 외적인 것이다. 최상의 덕은 덕스럽지 않다고 한 것은 그 정신이 외부의 것에 의해 도리에 어긋나지 않은 것이다. 정신이 외물에 의해 도리에 어긋나지 않은즉 자신은 온전해지고 자신이 온전해짐을 일러 덕이라 하는 것이다. 덕이란 자신을 얻는 것이다. 무릇 덕은 무위(함이 없는 것)이 모인 것이고 무욕(욕심이 없는 것이) 으로서 이루는 것이고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평안해지는 것이고 쓰지 않음으로 단단해 지는 것이다. 무엇을 하고자 욕심을 부리면 즉 덕은 안정될 수가 없게 된다. 덕이 안정되지 않으면 온전해지지 않는다. 사용하려 하거나 생각하려 한즉 확고해지지 않고 확고해지지 않으면 즉 공이 없게 되고 공이 없는 것은 인위적으로 덕을 얻으려는 것에서 비롯된다.(?) 인위적인 덕을 얻게 되면 덕이 없게 되고 인위적으로 덕을 구하지 않으면 덕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도덕경(38)에 이르길 [최상의 덕은 자신의 덕을 덕으로 여기지 않아 이를 일러 덕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

 

所以貴無無思虛者,謂其意無所制也。夫無術者,故以無無思虛也。夫故以無無思虛者,其意常不忘虛,是制於虛也。虛者,謂其意無所制也。今制於虛,是不虛也。虛者之無也,不以無為為有常,不以無為為有常則虛,虛則德盛,德盛之謂上德,故曰:「上德無而無不也。」

 

무위(아무것도 함이 없고)하고 무사 (사려함이 없고)하고 허정의 상태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그 의지가 (외물)에 의해 제어 받음이 없기 때문이다. 무릇 도술(다스림의 도,술법)의 능력이 없는 자는 일부러 무위,무사하여 허정함을 이루려는 것이다. 그러나 하지 않고 생각지 않고 허정하려는 자는 그 의지가 항상 허정 상태를 잊지 않기 때문에 무(허정)를 잊지 못하니 이것이 허정함 의해 제어를 받는 것이다. 허정함이란 그 의지가 속박(제어)상태에 있지 않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금 허정하려고 제어한다면(그 생각에 빠져있음) 이는 허심의 상태가 아니다. 허정한 자의 무위는 무위함을 항상하지 않는 것이고 무위함에 항상 하지 않는 것이 즉 허정한 것이고 허정한 것 즉 덕이 성하게 된다. 덕을 성함을 일러 상덕이라 하는 것이다. 도덕경 38장에 최상의 덕은 함도 없고 하지 않음도 없는 것 이라고 하는 것이다.

 

 

 

仁 과 義

 

 

仁者,謂其中心欣然愛人也。其喜人之有福,而惡人之有禍也。生心之所不能已也,非求其報也。故曰:「上仁之而無以也。」



인자 위기중심흔연애인야 기희인지유복 이악인지유화야 생심지소부능이야 비구기보야 고왈 상인위지이무이위야

 

인이란 마음 깊은 곳에서 흔쾌히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타인에게 복이 있음을 기뻐하고 타인에게 화가 미치는 것을 미워한다. 그 마음의 그치지 못하는 연유에서 생겨난 것이지 그 보상을 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최상의 인은 그것을 행하면서도 고의로 행하지 않는다' 고 말한다.

 

義者,君臣上下之事,父子貴賤之差也,知交朋友之接也,親疏內外之分也。臣事君宜,下懷上宜,子事父宜,賤敬貴宜,知交友朋之相助也宜,親者內而疏者外宜。義者,謂其宜也,宜而之,故曰:「上義之而有以也。」

 

의자 군신상하지사 부자귀천지차야 지교붕우지접야 친소내외지분야 신사군의 하회상의 자사부의 천경귀의 지교우붕지상조야 친자내이소자의 의자 위기의야 의이위지 고왈 상의위지이유이위야

 

의로움은 군주와 신하 상하간의 섬김, 부자간의 귀천의 차이, 아는 붕우간의 교제, 친함과 소원함 내외의 부분에 관한 것이다. 신하가 군주를 섬김은 마땅하고 아래가 윗사람을 따름이 당연하고 아들이 부모를 모시는 것이 당연하고 천한 사람이 귀한 사람을 공경함이 마땅하고 아는 벗간의 교제에서 서로 도와줌이 당연하고 친한 사람을 가까이하고 소원한자를 멀리함이 당연한 것이다. 의리란 그 마땅함을 이르는 것이다. 마땅하여서 그것을 행하니 그러므로 이르길 최상의 의로움은 그것을 행하며 확실한 생각(?)으로 한다'라고 하는 것이다.

 

 

 

예는 충신(忠信)의 정이 덜하여 비롯된다

 

 

禮者,所以貌情也,群義之章也,君臣父子之交也,貴賤賢不肖之所以別也。中心懷而不諭,故疾趨卑拜而明之。實心愛而不知,故好言繁辭以信之。禮者,外節之所以諭內也。故曰:「禮以貌情也。」凡人之外物動也,不知其身之禮也。眾人之禮也,以尊他人也,故時勸時衰。



예자 소이모정야 군의지문장야 군신부자지교야 귀천현부초지소이별야 중심회이부유 고질추비배이명지 실심애이부지 고호언번사이신지 례자 외식지소이유내야 고왈 례이모정야 범인지위외물동야 부지기위 신지례야 중인지위례야 이존타인야 고시권시쇠

 

예라는 것은 마음속 감정을 겉으로 표현 바이고 많은 의로움을 문채나게 드러내는 것이며 군신과 부자간의 주고 받음이고 귀천과 현명함과 어리석음의 구별인 것이다. 마음속 깊이 품고 있으면 타인이 알지 못하니 그러므로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낮추어 경배하고 그것(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실제 마음으로 사랑하면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좋은 말과 칭찬하는 말을 하여야 신뢰를 하는 것이다. 예라는 것은 밖으로 드러난 절도를 통해 그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길 :[예는 그 심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라고 한다. 무릇 사람의 외물에 의해 감동받을 때 그 자신의 예를 표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대중이 예의를 표하는 것은 타인에게 존중을 표하는 것이어서 때로는 힘써 표하고 때로 소홀히 한다.

 

君子之禮,以其身,以其身,故神之上禮,上禮神而眾人貳,故不能相應,不能相應,故曰:「上禮之而莫之應。」眾人雖貳,聖人之復恭敬盡手足之禮也不衰,故曰:「攘臂而仍之。」道有積而德有功,德者道之功。功有實而實有光,仁者德之光。光有澤而澤有事,義者仁之事也。事有禮而禮有文,禮者義之文也。。故曰:「失道而後失德,失德而後失仁,失仁而後失義,失義而後失禮。」

 

군자지위례 이위기신 이위기신 고신지위상례 상례신이중인이 고부능상응 부능상응 고왈 상례위지이막지응 중인수이,성인지복공 경진수족지례 야부쇠 고왈 양비이잉지,도유적이덕유공 덕자도지공 공유실이실유광 인자덕지광 광유택이택유사 의자인지사야 사유례이례유문 례자의지문야 고왈 실도이 후실덕 실덕이후실인 실인이후실의 실의이후실례

 

군자가 예를 행하는 것은 몸을 위하는 것이고 몸을 위하려는 것은 그러므로 진실되게 하는 것으로 상례로 삼는다. 상례는 진실됨임에도 사람들은 다르다. 그러므로 서로 응할 수가 없다. 서로 응할 수가 없기에 (노자에서) 말하길 (상례는 행하나 응함이 없다)이라 한다. 사람들이 비록 다르나 성인이 공경해 수족을 다하는 예는 쇠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노자에서) 말하길 (소매잡고 억지로 끌어서 한다)라는 것이다. 도에는 쌓임이 있고 덕에는 공효(功效)가 있다. 덕이란 도의 공효이고 공효는 열매요 열매는 빛이 있는 것이다. 인이란 덕의 빛이요 빛에는 광택이 있고 광택이 있음은 일이 있다. 의란 인의 일이요 일에는 예가 있고 예에는 꾸밈이 있다. 예란 의의 꾸밈이다. 그러므로 노자가 말하길 (도를 잃은 후에 덕을 잃고 덕을 잃은 후 인을 잃고 인을 잃은 후 의를 잃고 의를 잃은 후 예를 잃는다)라는 것이다.

 

情貌者也,文質飾者也。夫君子取情而去貌,好質而惡飾。夫恃貌而論情者,其情惡也;須飾而論質者,其質衰也。何以論之?和氏之璧,不飾以五采,隋侯之珠,不飾以銀黃,其質至美,物不足以飾之。夫物之待飾而後行者,其質不美也。是以父子之間,其禮樸而不明,故曰:「禮薄也。」凡物不並盛,陰陽是也。

 

례위정모자야 문위질식자야 부군자취정이거모 호질이악식 부시모이논 정자 기정악야 수식이논질자 기질쇠야 하이논지 화씨지벽 부식이오변 수후지주 부식이은황 기질지미 물부족이식지 부물지대식이후항자 기질부미야 시이부자지간 기례박이부명 고왈 예박야 범물부병성 음양시야

 

예는 감정의 모양이고 문은 본질을 꾸미는 것이다. 무릇 군자는 속마음을 취하고 겉치레는 버리며 실질을 좋아하고 꾸밈을 싫어한다. 외양을 의지하여 속마음을 논하는 것은 그 속마음이 나쁘기 때문이다.; 꾸밈을 기다려(의지하여) 실질을 운운하는 것은 그 본질이 빈약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그리 논하는가? 화씨의 옥은 오색으로
꾸미지 않았고 수후지주는 은과 금으로 꾸미지 않아도 그 본질은 아름답기 그지없어 만물이 그것을 꾸미기에 부족하다. 사물이 꾸밈을 기다린 후에 사용되는 것은 그 실질이 아름답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부자지간은 그 예가 소박하고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도덕경에 이르길 예는 얇다(소박하다)고 하는 것이다. 사물은 같이 성할 수 없는데 음양이 이것이다.

 

理相奪予,威德是也。實厚者貌薄,父子之禮是也。由是觀之,禮繁者實心衰也。然則禮者,事通人之樸心者也。眾人之禮也,人應則輕歡,不應則責怨。今禮者事通人之樸心,而資之以相責之分,能毋爭乎?有爭則亂,故曰:「禮者,忠信之薄也,而亂之首乎。」

 

리상탈여 위덕시야 실후자모박 부자지례시야 유시관지 례번자실심쇠야 연칙위례자 사통인지박심자야 중인지위례야 인응칙경환 부응칙책원 금위례자

사통인지박심 이자지이상책지분 능무쟁호 유쟁칙난 고왈 부례자 충신지박야 이난지수호

 

 

이치상 빼앗음과 주는 것은 서로 상대되는 것인데 위엄과 은덕이 그렇다. 실질이 두텁고 모습이 소박한 것이 부자지간의 예가 그렇다. 이를 보건 데 예가 번잡하면 실질의 마음은 빈약하다. 그런즉 예를 행하는 것은 사람 그대로의 소박한 마음을 상대에게 전달해야 하는데(? 事通人之樸心者) 일반백성들의 예를 행하는 것은 타인이 응하면 즉 가벼이 기뻐하지만 불응하면 즉 원망한다. 지금 예를 행하는 자는 사람의 소박한 마음을 그대로 상대에게 전달해야 하는데 사람들에게 서로 꾸짖고 원망하는 것에 명목을 제공하니 다투지 않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다툼이 있으면 혼란스러워지니 노자가 이르길 [예라는 것은 충성스럽고 믿음이 엷어진 것이고 혼란의 단초가 되는 것이다.] 라고 말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