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2

동양적 사유의 관계론 (Oriental Relational Theory)

반구저기 2024. 11. 29. 20:53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있어 두 가지 중요한 철학적 개념이 있다. 바로 존재론(Ontology)과 관계론 (Relational Theory)이다. 존재론이 존재의 본질에 대한 탐구라면 관계론은 존재하는 것들의 상호작용을 바라보는 철학적 개념이다. 개인적으로 서양의 사유는 존재론적 측면이 강하고 동양적 사유는 관계론적 측면이 강하다고 본다. 서양의 존재론에서 자유와 개인주의의 성향이 나왔다면 동양의 관계론에서는 인간대 인간 인간과 사회, 그리고 국가 더 넓게는 인간과 자연환경에 이르기까지 포괄하고 있다.

 

동양의 철학사상의 중심은 현대 철학적 용어로 풀어본다면 바로 관계의 철학이다. 공자님의 인()의 중요한 화두가 바로 두 사람간의 관계이고, 어버이와 자식과의 관계의 효(孝),노자의 유무상생(有無相生)의 원리있는 것과 없는 것은 서로 상대하기 때문에 생겨난다는 것이다. 실존과 존재에 대한 물음이 바로 나와 너 나와 이 사회 국가, 더 확장하면 나와 자연과의 관계에서 이해한다는 것이다. ()에서 출발하여 효()가 나온 것은 바로 관계론에서의 출발이다.

 

일반적으로 ()라는 글자는 늙으신 부모()를 아들()이 받들어 모시는 형상을 문자화하였다고 배웠다. 그 글자를 풀어보면 흙 토()와 연장을 뜻하는 창(丿)과 휘어진 비수 비()의 합자로 해석하였다. 농경사회에서 평생 동안 논밭을 갈아 자식을 먹여 살리는 등 휘어진 어버이를 뜻한다고 한다.

 

 

또 다른 해석의 하나는 효자의 아들 자를 뺀 윗부분은 등이 굽고 백발을 휘날리는 한 명의 노인의 모습을 말하고 아래쪽은 아들 자를 의미하여 노인을 부축하고 공경하고 보좌하는 것이 효도의 구체적 표현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http://chinesewiki.uos.ac.kr/wiki/index.php/%E5%AD%9D) 허신 설문해자

 

또 다른 측면에서 孝를 파자하면 벨 예()자 둘과 아들 자()이다. 예(乂)자는 태극에서 음과 양의 교차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문자적 해석은 어진 사람, 뛰어난 사람을 말한다. 그리고 벨 예자 둘이 합친 글이 본받을 효()라는 글이다. 이는 음과 양의 교차가 두 번 연속되어 음양의 이치를 알고 있으며 본받아야 하는 것으로 해석이 된다. 역경에 나오는 육효가 그런 이치이다. 음과 양이 번갈아 만들어진 것을 주역 에서는 육효라고 이르는 것이다. 주역의 64()를 구성하는 6개의 획을 육효라 한다.

 

그런 본받을 효자가 아들 자()와 합쳐져서 효도할 효자가 되는 것이다. 즉 효자의 어원상 의미는 음과 양의 이치를 잘 배우고 본받는 사람을 의미한다. 음과 양의 관계에서 출발한 사유인 것이다. 음양의 이치라 함은 천지자연의 모든 항상 하는 법칙을 말한다. 거기에 칠복()자가 더해지면 가르칠 교()가 된다. 효를 때리며 가르치는 것을 교()라고 하는 것이다.  바로 교() 자가 본받을 효() 아들 자() 칠 복()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 것이다.

 

 

 

노자 덕경 42 道化(도화)

 

道生一(도생일) 一生二(일생이) 二生三(이생삼) 三生萬物(삼생만물)

萬物負陰而抱陽(만물부음이포양) 沖氣以爲和(충기이위화)

 

도가 일을 낳고,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가 셋을 낳고, (天地人)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을 짊어지고 양()을 끌어안고 있고 충기(沖氣)로 조화시킨다

 

 

 

노자 도덕경 42장 도화 장에 나오는 이야기가 음양에 대한 부분이다. 도가 하나 즉 태극을 낳고 그 태극은 둘 음과 양을 낳으며 그 음과 양은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을 낳았다는 글이 나온다.

 

즉 우주 만물의 생성 원리이기도 하고 모든 자연 현상의 상법(常法)이기도 한 음양의 갈마듦을 익히는 자가 현자이고 그 음양의 조화 속에 태어난 것이 우리들 자신이니 그 음양 조화의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 즉 부모에게 공경을 다하는 것 본받는 것이 효라는 것으로 추론해볼 수 있다. 관계론의 출발인 것이다

 

 

 

효경(孝經)_개종명의장(開宗明義章第一 )

 

仲尼居(중니거),曾子持(증자지)。子曰(자왈):「先王有至德要道(선왕유지덕요도),以訓天下(이훈천하),民用和睦(민용화목),上下無怨(상하무원),汝知之乎(여지지호)?」  曾子避席曰(증자피석왈):「參不敏(참부민),何足以知之(하족이지지)?」  子曰(자왈):「夫孝(부효),德之本也(덕지본야),教之所由生也(교지소유생야)。復坐(복좌),吾語汝(오어여)。」身體髮膚(신체발부),受之父母(수지부모),不敢毀傷(부감훼상),孝至始也(효지시야)。立身行道(립신행도),揚名於後世(양명어후세),以顯父母(이현부모),孝之終也(효지종야)。」 夫孝(부효),始於事親(시어사친),中於事君(중어사군),終於立身(종어립신)。」大雅曰(대아왈):「無念爾祖(무념이조),聿修厥德(율수궐덕)。」

 

효경의 내용을 미루어 본다면 효는 단순히 어버이에 대한 효가 아니라는 것이 보인다. 즉 관계 맺음이다. 효경 1장의 글에 대저 효라는 것은 덕 됨의 근본이요, 가르침이 말미암아 생겨나는 곳이다.” ….. 중략…..중략“ 무릇 효는 부모를 섬김에서 시작하고 그 다음은 임금을 섬기는 것이 그 중간이고 마지막은 자신을 세우는 것이다

 

효경 안에서도 기본적인 효는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가장 우선시 되는 인간의 덕성이며 그 관계론의 확장 개념에서는 군주에게로 옮겨진다. 그리고 그 효와 아울러 한 인간이 사회로 나아가 제() 즉 공순함과 경() 공경함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효경 18장廣揚名章): 효의 확장

 

子曰(자왈), “君子事親孝(군자사친효). 故忠可移於君(고충가이어군). 事兄弟(사형제), 故順可移於長(고순가이어장). 居家理(거가리), 故治可移於官(고치가이어관). 是以行成於內(시이행성어내), 而名立後世矣(이명입후세의).”

 

공자왈, 군자는 부모를 섬김에 효를 다한다. 그러므로 그것을 군주에게 옮겨서 충성한다. 형을 섬김에 공경을 다한다. 그것을 어른에게 옮겨서 순종한다. 집안에서 잘 관리하기 때문에 관직에 옮겨가더라도 잘 다스린다. 이로써 안에서 잘 이루어져 이름이 후세에 알려진다.”

 

그리고 효를 확장한 개념 즉 관계론의 궁극이라 할 수 있는 글이 나온다. 대대례기(중국 전한의 대덕(戴德)이란 자가 자가 공자와 후학들의 저작 중에서 8편을 집대성해서 "예기”)에서 공자님의 말씀으로 찾아볼 수 있다.

 

一出言不敢忘父母(일출언부감망부모),是故惡言不出於口(시고악언부출어구),忿言不及於己(분언부급어기),然后不辱其身(연후부욕기신),不憂其親(부우기친),則可謂孝矣(칙가위효의)。草木以時伐焉(초목이시벌언),禽獸以時殺焉(금수이시살언)。夫子曰(부자왈):『伐一木(벌일목),殺一獸(살일수),不以其時(부이기시),非孝也(비효야)。』」

 

초목도 벌초와 벌목도 때가 있고, 짐승을 잡는 것도 때가 있다. 공자님께서 말하시길[한 그루의 나무를 베는 것도 한 마리 짐승을 잡는 것도 때 그 마땅한 때를 없이하면 효가 아니다.]라고 하셨다.

 

이 세상 모든 종교와 학설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인간은 만물의 영장’ 이라는 것이다. 모든 만물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며 인간을 위해 쓰여질 수 있다는 사상이 지배를 해 온 것이다.

 

그러나 공자님의 효의 세계관의 확장이 모든 사물에 이르러 사람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인간 중심의 존재론에서 우주 만물의 하나로서 관계론을 언급한 장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부모님이 주신 몸의 상함을 계기로 이런 효의 확장을 끌어낸 것이다. 나무 한 그루에서 한 마리 짐승에서 생명의 존엄을 말하고 계시는 것이다. 인간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긴 하나 그렇다 하여 때에 맞추지 아니하고 살아있는 나무를 베고 살생을 한다는 것은 바로 효가 아니란 것이다. 이 얼마나 높고 존귀한 가르침인가? 즉 효는 단순히 부모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음과 양의 가르침을 확장하여 그 처음 즉 근본은 부모에게 그리고 군주와 어른 그리고 이 삼라만상의 모든 자연에 이르기까지 효성스러워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님의 말씀하신 나무와 짐승들의 남벌과 남획을 불효라 이야기한다. 즉 자연에게 불효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인간을 위한 자연의 훼손이 가져다주는 기후변화, 자연재해, 코로나 판데믹 등을 미루어 보면 공자님의 이 글이 쉽게 흘려들을 수 없다. 즉 자연에게 불효를 저지르지 말라는 이야기를 지금 현시대에 더 삼가 새기고 더 새겨 들어야 할 이야기인 것이다. 무릇 효란 하늘의 법이요 땅의 의로움이고, 덕의 근본이라는 부분에서 본다면 즉 인간이 모든 사물에 대한 겸손과 공순함이 즉 효인 것이라 말씀하시는 듯하다.

 

이런 것에서 효가 노인을 봉양하는 것보다 음양의 원리를 현명하게 잘 깨우치고 본받아 효성스러움을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덕성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씀으로 들리는 것이다.  그래서 효가 하늘의 법이고 땅의 의로움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닐까 반문해 본다. “한 그루의 나무를 베는 것도 한 마리 짐승을 잡는 것도 때 그 마땅한 때를 없이하면 효가 아니다참으로 고귀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