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가(趙世家)_영화 같은 역사, 소설 같은 일화
1. 조씨 고아
https://youtu.be/gQQmKtvvZUk?si=Pd52Xci3HkPjJIJG
진(晉) 나라는 한때 중원의 제국을 이루며 춘추 오패의 한 사람인 진문공 중이의 나라이다. 진 제국은 진문공 중이 이후 어리석은 군주들의 등장으로 진(晉) 제후가 통치하는 나라가 아닌 6 경(卿)이 권력을 휘두르는 나라로 전락한다. 6경중 가장 세력이 강했던 가문이 한(韓), 조(趙), 위(魏)씨 지백 가문이다.
진나라에서 조씨 가문이 최초로 경(卿)으로 제수된 사람은 조숙이다. 조숙은 진 헌공 16년에 호, 위, 경을 정벌하며 장군이 되었다. 호공은 제나라로 도망갔고, 진나라는 가뭄이 들어 점을 치니 호태산이 원인이라 하여 조숙에게 호공을 제나라에서 데려와 호태산에 제사를 지내게 했다. 진 헌공은 조숙에게 경을 하사했다.
이후 조숙은 공맹을 낳았고, 공맹은 조쇠(趙衰)를 낳았다. 조쇠는 진 헌공을 섬기며 여러 공자들을 섬겼다. 조쇠는 공자 중 중이를 섬기며 중이가 진나라를 떠나 망명할 때 따라가고, 중이는 진나라로 돌아와 진 문공이 되었고, 조쇠는 원대부가 되어 국정을 맡았다. 문공이 진나라로 돌아와 패자가 된 것은 대부분 조쇠의 계책으로 된 것이다.
이후 조쇠는 진나라로 돌아와 진나라의 국정을 맡았고, 그의 아들 조돈이 뒤를 이었다. 조돈은 진 양공 때 국정을 맡았고, 양공이 죽자 태자 이고를 세웠다. 양공의 어머니는 조돈에게 태자를 세우지 말라고 간청했으나 조돈은 태자를 세우고, 이후 조돈은 국정을 맡아 진나라를 다스리게 된다. 이후 조돈은 진나라를 떠나지 않고 국정을 맡았으며, 그의 아들 조삭이 뒤를 잇고, 조삭은 진 경공 때 진나라 장군이 되어 하 군을 이끌고 정나라를 구했으며, 조삭은 진 성공의 누이 장희(莊姬) 아내로 맞이한다. 이후 조삭의 후손은 조씨 가문을 이어간다.
그중 조씨 가문은 가장 극적이고 소설 같은 가문의 역사가 사마천 사기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다. 그 중 하나가 영화로 드라마로 만들어진 조(趙)씨 孤兒 이야기다.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귀족 조(趙) 가문이 반역자 도안고 모함을 받아 잔인하게 몰살당하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고아인 조무(趙武)는 태어나서 많은 위험을 겪으며 마침내 탈출했다. 의로운 공손저구와 정영의 도움을 받아 장성하여 복수한다는 내용이다. 드라마적인 요소 소설적 요소가 다분하다. 사기보다 앞선 춘추(春秋) 좌전 어디에도 국어(國語) 어디에도 조삭과 도안고의 사실기록이 없다. 단 하나의 기록은 조삭이 진(晉) 나라 경공(景公) 당시 좌장군의 기록만 존재할 뿐이다. 기존 역사서 어디에도 들어 있지 않는 내용을 사마천은 사기(史記)라는 역사서에 기록하고 있다.
사마천이 어느 기록에도 보이지 않는 조 씨 가문과 도안고간의 원한과 복수극을 끼워 넣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통해 필주(筆誅)를 가한 것일 수도 있고, 전해지는 일화를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의 관점에서 무시하지 못한 하나의 사건이었던 것은 아닐까 상상해 본다. 바로 이런 부분이 사마천 사기가 정통역사서에서 비껴간 논픽션의 소설을 모은 역사서란 비판을 받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와 무관한 역사적 드라마적 요소는 우리를 그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게 한다. 조세가의 이 부분을 바탕으로 원나라 시대 극작가인 기군상(紀君詳)은 조씨고아(趙氏孤兒)를 써내려 간 것이다. 사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趙朔(조삭),晉景公之三年(진경공지삼년),朔為晉將下軍救鄭(삭위진장하군구정),與楚莊王戰河上(여초장왕전하상)。朔娶晉成公姊為夫人(삭취진성공자위부인)。
조삭(趙朔)은 진경공(晉景公) 3년 진(晉)의 장군으로 초장왕(楚莊王)과 강에서 싸웠던 진(晉)의 장군이다. 조삭은 진나라 성공의 누이를 아내로 맞이했다.
晉景公之三年(진경공지삼년),大夫屠岸賈欲誅趙氏(대부도안가욕주조씨)。初(초),趙盾在時(조순재시),夢見叔帶持要而哭(몽견숙대지요이곡),甚悲(심비);已而笑(이이소),拊手且歌(부수차가)。盾卜之(순복지),兆絕而後好(조절이후호)。趙史援占之(조사원점지),曰(왈):「此夢甚惡(차몽심악),非君之身(비군지신),乃君之子(내군지자),然亦君之咎(연역군지구)。至孫(지손),趙將世益衰(조장세익쇠)。」
진 경공의 통치 3년째 되던 해, 도안고는 조씨들을 죽이고 싶었다. 처음에 조돈이 아직 살아있을 때, 그는 숙대가 허리를 잡고 울며 매우 슬퍼 보이는 꿈을 꾸었다. 얼마 후 그치고 웃으며 손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조순은 그의 꿈을 점쳐보니 (거북이 등껍질)균이 끊어졌다가 나중에 좋아지는 형상이었다. 조나라 사관 원(援)이 이것을 점쳐보니 점괘는 이러하였다. "이것은 매우 나쁜 꿈입니다. 이것(재난)은 당신의 몸이 아니라 당신의 아들에게 닥치겠지만 이 또한 당신의 허물입니다.” 손자 대에 이르기까지 조씨 가문은 쇠락해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屠岸賈者(도안가자),始有寵於靈公(시유총어령공),及至於景公而賈為司寇(급지어경공이가위사구),將作難(장작난),乃治靈公之賊以致趙盾(내치령공지적이치조순),遍告諸將曰(편고제장왈):「盾雖不知(순수부지),猶為賊首(유위적수)。以臣弒君(이신시군),子孫在朝(자손재조),何以懲罪(하이징죄)?請誅之(청주지)。」
韓厥曰(한궐왈):「靈公遇賊(령공우적),趙盾在外(조순재외),吾先君以為無罪(오선군이위무죄),故不誅(고부주)。今諸君將誅其後(금제군장주기후),是非先君之意而今妄誅(시비선군지의이금망주)。妄誅謂之亂(망주위지란)。臣有大事而君不聞(신유대사이군부문),是無君也(시무군야)。」
屠岸賈不聽(도안가부청)。韓厥告趙朔趣亡(한궐고조삭취망)。朔不肯(삭부긍),曰(왈):「子必不絕趙祀(자필부절조사),朔死不恨(삭사부한)。」韓厥許諾(한궐허낙),稱疾不出(칭질부출)。賈不請而擅與諸將攻趙氏於下宮(가부청이천여제장공조씨어하궁),殺趙朔(살조삭)、趙同(조동)、趙括(조괄)、趙嬰齊(조영제),皆滅其族(개멸기족)。
도안고는 처음에는 영공의 총애를 받았고, 경공의 때 이르러 사구(司寇)가 되어.(사법을 답당하던 관리) 난을 일으키고 영공을 시해하려는 누명을 씌워 조둔 벌하려고 모든 장수들에게 두루 알리며 발했다. "조둔이 비록 몰랐지만 그는 여전히 역적의 우두머리다. 신하로서 군주를 시해하고도 자손은 조정에 있으니 그 죄를 어찌 징치해야 한단 말입니까? 그를 단죄해 죽일 것을 청합니다.”
한궐이 말했다. 영공이 적에게 해를 입었을 때 조순은 외부에 있어서 우리 선왕께서 죄가 없다 여기어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지금 모든 장수들이 그의 후손을 주살하려고 하니 이는 선왕의 뜻을 어기고 함부로 주살하는 것입니다. 함부로 주살하는 것을 일러 난(亂)이라 합니다. 신하가 큰일을 하는데 군주가 듣지 않았다면 이는 군주가 없는 것입니다. “
그러나 도안고는 그의 주장을 듣지 않았다. 한궐은 조삭에게 도망치라 일었으나 조삭은 도망치려하지 않았다. “그대가 반드시 조씨 가문의 제사를 잇게 해주시면 이 조삭은 죽어도 여한이 없겠소” 한궐이 허락하고 병을 핑계 삼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도안고는 군주에게 청을 드리지도 않고 마음대로 장군들과 함께 조씨를 하궁에서 공격하여 조삭, 조동, 조괄, 조영제등 그 일족을 모두 멸했다.
趙朔妻成公姊(조삭처성공자),有遺腹(유유복),走公宮匿(주공궁닉)。趙朔客曰公孫杵臼(조삭객왈공손저구),杵臼謂朔友人程嬰曰(저구위삭우인정영왈):「胡不死(호부사)?」程嬰曰(정영왈):「朔之婦有遺腹(삭지부유유복),若幸而男(약행이남),吾奉之(오봉지);即女也(즉녀야),吾徐死耳(오서사이)。」居無何(거무하),而朔婦免身(이삭부면신),生男(생남)。屠岸賈聞之(도안가문지),索於宮中(색어궁중)。夫人置兒叱罅祝曰(부인치아질하축왈):「趙宗滅乎(조종멸호),若號(약호);即不滅(즉부멸),若無聲(약무성)。」及索(급색),兒竟無聲(아경무성)。
已脫(이탈),程嬰謂公孫杵臼曰(정영위공손저구왈):「今一索不得(금일색부득),後必且復索之(후필차복색지),柰何(내하)?」公孫杵臼曰(공손저구왈):「立孤與死孰難(립고여사숙난)?」程嬰曰(정영왈):「死易(사역),立孤難耳(립고난이)。」公孫杵臼曰(공손저구왈):「趙氏先君遇子厚(조씨선군우자후),子彊為其難者(자강위기난자),吾為其易者(오위기역자),請先死(청선사)。」乃二人謀取他人嬰兒負之(내이인모취타인영아부지),衣以文葆(의이문보),匿山中(닉산중)。
程嬰出(정영출),謬謂諸將軍曰(류위제장군왈):「嬰不肖(영부초),不能立趙孤(부능립조고)。誰能與我千金(수능여아천김),吾告趙氏孤處(오고조씨고처)。」諸將皆喜(제장개희),許之(허지),發師隨程嬰攻公孫杵臼(발사수정영공공손저구)。杵臼謬曰(저구류왈):「小人哉程嬰(소인재정영)!昔下宮之難不能死(석하궁지난부능사),與我謀匿趙氏孤兒(여아모닉조씨고아),今又賣我(금우매아)。縱不能立(종부능립),而忍賣之乎(이인매지호)!」抱兒呼曰(포아호왈):「天乎天乎(천호천호)!趙氏孤兒何罪(조씨고아하죄)?請活之(청활지),獨殺杵臼可也(독살저구가야)。」諸將不許(제장부허),遂殺杵臼與孤兒(수살저구여고아)。諸將以為趙氏孤兒良已死(제장이위조씨고아량이사),皆喜(개희)。然趙氏真孤乃反在(연조씨진고내반재),程嬰卒與俱匿山中(정영졸여구닉산중)。
조삭의 처는 성공의 누이이고 복중에 태아가 있는 상태로 경공의 궁으로 달아나 숨었다. 조삭의 문객 중 공손저구라는 자가 있었는데, 저구가 조삭의 친구인 정영에게 말했다. 아직 죽지 않았는가?” 정영이 말하길 “ 조삭의 부인은 임신 중이라 만약 다행하게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내가 키우고, 여아가 태어나면 내가 천천히 죽으면 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삭의 부인이 분만하여 사내아이를 낳았다. 도안고가 그 사실을 듣고 궁궐 안을 수색하기 시하였다. 부인이 아이를 바지 속에 숨기고 기원하며 말했다. “조 씨 집안을 멸문하려면 울고, 멸문하지 않으려면 조용히 하여라” 도안고가 장희(莊姬) 찾았을 때 그의 아들은 울지 않았다.
무사히 탈출하자, 정영이 공손저구에게 말하였다. 오늘 한 번의 수색은 벗어날 수 있었으나, 훗날 반드시 다시 찾을 텐데 어찌해야 합니까?” 공손저구가 말하길 “ 고아를 살리는 일과 죽이는 일 중 어느 것이 더 어렵습니까?”라고 하였다. 정영이 말하길 “죽기는 쉽고 고아를 살리는 일은 어렵습니다.” 공손저구가 말했다. “조 씨조씨 가문의 선대께서 그대를 잘 대우하였으니 그대는 어려운 일에 힘쓰고 나는 쉬운 일을 맡아 죽기를 청하오. 이내 두 사람은 모의하여 다른 사람의 아이를 업고 문채 나는 강보에 싸서 산중으로 숨어들었다.
정영이 나와서 장군들에게 거짓으로 말했다. “정영이 어리석어 조 씨 고아를 기를 수 없었습니다. 누가 내게 천금을 준다면 조씨 고아의 거처에 대해 알려주겠습니다.” 장군들이 모두 기뻐하며 허락하고 병사를 선발해 정영을 따르게 하여 공손저구를 공격하였다. 저구가 속이며 말하길 “정영은 소인배다! 옛날 하궁의 난리에서 죽지 않고, 나와 조 씨 고아를 숨기기로 해놓고선, 지금 나를 팔아먹는구나!”아이를 안고 외치며 말했다. “ 하늘이여! 하늘이여! 조씨 고아가 무슨 죄를 지었는가? 그를 살려 주길 청하고 나 혼자 죽기를 원합니다.” 장군들이 이를 허락 치 아니하고 공손저구와 아이를 함께 죽여버렸다. 장군들은 조씨 고아를 죽였다고 모두 기뻐했다. 그러나 조 씨의 진짜 고아는 살아 있었고 정영은 결국 조씨고아와 함께 산중으로 숨어들었다.
居十五年(거십오년),晉景公疾(진경공질),卜之(복지),大業之後不遂者為祟(대업지후부수자위수)。景公問韓厥(경공문한궐),厥知趙孤在(궐지조고재),乃曰(내왈):「大業之後在晉絕祀者(대업지후재진절사자),其趙氏乎(기조씨호)?夫自中衍者皆嬴姓也(부자중연자개영성야)。中衍人面鳥噣(중연인면조주),降佐殷帝大戊(강좌은제대무),及周天子(급주천자),皆有明德(개유명덕)。下及幽厲無道(하급유려무도),而叔帶去周適晉(이숙대거주적진),事先君文侯(사선군문후),至于成公(지우성공),世有立功(세유립공),未嘗絕祀(미상절사)。今吾君獨滅趙宗(금오군독멸조종),國人哀之(국인애지),故見龜策(고견구책)。唯君圖之(유군도지)。」景公問(경공문):「趙尚有後子孫乎(조상유후자손호)?」韓厥具以實告(한궐구이실고)。於是景公乃與韓厥謀立趙孤兒(어시경공내여한궐모립조고아),召而匿之宮中(소이닉지궁중)。諸將入問疾(제장입문질),景公因韓厥之眾以脅諸將而見趙孤(경공인한궐지중이협제장이견조고)。趙孤名曰武(조고명왈무)。諸將不得已(제장부득이),乃曰(내왈):「昔下宮之難(석하궁지난),屠岸賈為之(도안가위지),矯以君命(교이군명),并命群臣(병명군신)。非然(비연),孰敢作難(숙감작난)!微君之疾(미군지질),群臣固且請立趙後(군신고차청립조후)。今君有命(금군유명),群臣之願也(군신지원야)。」於是召趙武(어시소조무)、程嬰遍拜諸將(정영편배제장),遂反與程嬰(수반여정영)、趙武攻屠岸賈(조무공도안가),滅其族(멸기족)。復與趙武田邑如故(복여조무전읍여고)。
15년이 지나 경공이 병이 나자 점을 치니 대복(큰 과업) 이룬 집안의 후손이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 빌미가 되었다. 경공이 한궐에게 물으니 한궐은 조씨고아의 생존을 알고 말하였다. “나라에 대업을 이룬 후손이 진나라에서 제사를 잇지 못하는 가문은 조씨가 아닙니까? 무릇 중연으로부터 후손들은 모두 영씨 성이었습니다. 중연은 사람의 얼굴과 새의 부리를 하고 그 후손은 殷(은) 태무를 보좌하고 주나라 천자에 까지 이르렀으며 모두가 밝은 덕을 지니었습니다. --- 중략---
경공이 물었다. “조씨 가문의 후손이 남아 있는가?” 한궐이 사실을 모두 말하였다. 이에 경공은 한궐과 함께 조씨 고아를 복권을 모의하며 그를 불러 궁궐 안에 숨게 하였다. 장군들이 문병을 위해 입궐하자, 경공은 한궐의 군세를 끼고 장군들을 위협하며 조씨고아(조무)를 만나게 하였다. 조씨 고아의 이름은 무(武)였다. 장군들은 어쩔 수 없이 말했다. “ 옛날 하궁의 난에서 도안고가 한 일이고 군주의 명을 사칭하여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누가 감히 난을 일으키겠습니까! 군주의 병이 가벼우시니 저희 신하들은 조씨 가문을 후손을 세울 것을 청합니다. 지금 군주께서 명을 내리시길 저희는 바라옵니다.” 이에 조무와 정영을 불러 장군들에게 두루 인사시키니 장군들은 돌아서서 정영 조무와 함께 도안고를 공격하고 그 일족을 멸하였다. 조문은 옛 선조의 식읍을 돼찾았다.
及趙武冠(급조무관),為成人(위성인),程嬰乃辭諸大夫(정영내사제대부),謂趙武曰(위조무왈):「昔下宮之難(석하궁지난),皆能死(개능사)。我非不能死(아비부능사),我思立趙氏之後(아사립조씨지후)。今趙武既立(금조무기립),為成人(위성인),復故位(복고위),我將下報趙宣孟與公孫杵臼(아장하보조선맹여공손저구)。」趙武啼泣頓首固請(조무제읍돈수고청),曰(왈):「武願苦筋骨以報子至死(무원고근골이보자지사),而子忍去我死乎(이자인거아사호)!」程嬰曰(정영왈):「不可(부가)。彼以我為能成事(피이아위능성사),故先我死(고선아사);今我不報(금아부보),是以我事為不成(시이아사위부성)。」遂自殺(수자살)。趙武服齊衰三年(조무복제쇠삼년),為之祭邑(위지제읍),春秋祠之(춘추사지),世世勿絕(세세물절)。
조무가 관례를 올리고 성인이 되자, 정영은 이내 대부들에게 인사를 하며 조무에게 말했다. “ 지난 날 하궁에서의 亂(난)에서 모두 따라 죽을 수 있었다. 나는 죽을 수 없었는데, 나는 조씨가문의 후손을 다시 세울 생각이었다. 지금 조무는 이미 성장하여 성인이 되었고 옛 지위를 회복하였다 다. 나는 저승에 있는 조선맹(조돈)과 공손저구의 빚을 갚았다.” 조무가 목놓아 울고 머리를 조아리며 진실로 청하며 말했다. 저 조무가 죽을 때까지 분골쇄신하는 고통을 다하여 보답하려 하는데 당신께서 냉정하게 저를 저버리실 것입니까? “ 정영이 말했다. “ 안됩니다. 그 분들은 내가 일을 성사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먼저 죽어간 것입니다. 지금 내가 가서 알리지 않으면 이는 내가 일을 완수하지 못한 것이라 여길 것입니다.” 결국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조무는 상복을 입고 3년상을 치르며 그를 위해 제읍(제사를 모시기 위한 마을)을 만들어 봄가을로 그의 제사를 지내며 대대로 끊어지지 않게 하였다.
2. 전국시대의 서막_지백 과 三晉의 성립
중국 역사상 전란의 시작은 춘추시대이다. 이 당시 주 유(幽)왕이 포사(褒姒)에게 빠져 국정을 소홀히 하다가 정실왕비의 아버지 신후의 반란에 의해 실권하며 죽임을 당한다. 이후 주 평(平)왕이 세워지며 주나라는 도읍을 호경에서 낙양으로 옮기는 동천(東遷)을 한다. 이후 주나라의 국력은 극도로 약화되며 이름만 자국의 나라가 되고 중원은 춘추 오패에 의해 좌우 되었다.
이때부터 춘추의 역사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전장(戰場)으로 바뀐다. 제후국들은 서로를 침탈하는 과정에서 국력은 약화되고 민중의 삶은 날로 악화되어 가며, 약화된 제후들의 권력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자들이 바로 경대부(卿大夫)들이다. 각국의 지방에 봉읍을 하사 받은 대부들은 약화된 제후의 자리를 대신하며 각자의 이익을 위해 서로를 침탈하는 군웅할거와 제자백가의 시대로 들어선다.
춘추시대이래 계속된 패권경쟁과 합병전쟁은 각 제후국의 국력을 소모시키며 사회경제적, 정치적 상황의 변화로 주요 제후국의 내부의 권력투쟁은 날로 첨예화되어간다.춘추말기의 각국의 정치적 환경은 주나라의 권위의 상실과 마찬가지로 제후국 내에 유력 관료와 가문의 등장이 공실(公室)의 권력이 약화되는 계기를 만든다. 노나라에서 발생한 삼환(三桓) 세력과 진(晉) 육경(六卿)세력의 등장이 실증이 될 수 있다.
晉나라는 춘추시대 제나라, 진나라, 초나라등의 4강 구도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어리석고 포악한 군주(暴昏君)의 진 려공, 출공의 등장으로 군주에게 있어야 할 권위가 6 卿에게 나누어진다. 그 단초는 진 려(厲) 공이 대부 삼극(三郤을 죽이자 대부 난서(欒書)가 이를 두려워하여, 진 려공을 시해한 사건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하여 진(晉)나라의 권력은 조정대신들은 육경(六卿)에게로 옮겨진다. 이는 주나라의 려(厲) 왕 당시와 비슷하게 혼군(昏君)이 들어서서 국정을 어지럽히고, 폭군(暴君)이 학정(虐政)을 하여 군신들이 군주를 시해하는 과정과 닮아 있다 그 두 번째는 외세의 힘을 빌어 국내의 문제(6경의 권세가 막강해진 형국)를 해결하려 하려 한 잘못된 정치적 판단이다.

공실의 권위가 붕괴되고 유력가문의 힘이 득세를 하는 역사적 사건이 진(晉)나라 조(趙)가문에서)일어난다. 배우 드라마틱하고 소설적 요소가 그 역사기록에 드러나있다. 그 중 하나가 위에서 언급한 조씨고아이고, 그 두번째가 바로 춘추시대의 종말을 고하고 전국시대의 서막을 연 지백과 삼진의 전쟁이다.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한, 조, 위 세력은 더욱 강성해지고 진(晉)이 세 개의 나라로 쪼개져 삼가분진(三家分晉)이란 말이 생겨난다.
진나라가 한, 조, 위 세 나라로 나누어지기 전 형세도를 보면 가장 강성한 지(智)씨 한, 조, 위 그리고 범(范)씨 중항(中行)씨 6 대부가 진(晉)나라를 나누어 통치하고 있었다. 진(晉) 제후 출공(出公)의 권위는 유명무실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에 진나라의 중심 권력이던 지백은 범 씨와 중항씨를 몰아내고 그들의 영토를 나누어 가진다.
조씨복위십일년(趙氏復位十一年),이진려공살기대부삼극(而晉厲公殺其大夫三郤)。란서외급(欒書畏及),내수시기군려공(乃遂弒其君厲公),경립양공증손주(更立襄公曾孫周),시위도공(是為悼公)。진유차대부초강(晉由此大夫稍彊)。
조씨 가문 복위 11년이 지나, 진려공이 대부 삼극을 죽였다. 대분 난서가 두려워하며 결국 진 려공을 시해하고 양공의 증손 주(周)를 세우니 이가 바로 도공이다. 진나라는 이로 말미암아 대부들의 권한이 점차 강해져 갔다.
六卿(육경)은 진(晉)나라의 강신(强臣)인 지(智), 범(范), 중항(中行), 한(韓), 위(魏), 조(趙) 6성(姓)을 말한다. 이들 6성은 서로 간에 정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다투었는데, 진(晉)나라는 결국 이들 중 한·위·조 3성(姓)에 의해3분 되었다.
사마천은 진나라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역사적 당위성과 자신의 주장의 정당성을 위해 요즘 말로 사기의 내용을 빌드업한다. 그 사례로 조무 복권 13년에 오(吳)나라 연릉계자가 진나라에 와서 한 말이 “진나라의 국정은 장차 육경(六卿)에게로 돌아갈 것이다”라는 예언을 한다. 또다른 하나는 제(齊)나라 명 재상과 진나라의 재상 숙향의 대화에 그 단초를 보여준다. 안영이 제나라의 국가 권력은 앞으로 전(田)씨의 제나라가 될 것을 예언하니, 숙향은 진(晉)나라의 권력은 육경에게로 돌아갈 것이라 말한 기록을 사기에 싣는다.
이후 진(晉)나라는 지백이 가장 강하고 범(范) 중항(中行) 한(韓) 조(趙) 위(魏) 6 대부가 권력을 조금씩 나눈 상태에서 춘추의 끝을 향해 역사는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진나라 정공 14년 (BC 498) 범씨와 중항씨가 난을 일으키며 진나라는 혼돈 속으로 들어간다 6 가문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대립의 시기가 형성된다. 결국 진 정공 18년(BC 295) 번씨와 중항씨는 권력다툼에 져 한단으로 달아나게 된다. 진 정공 21년 조 간자가 한단을 공격자 중항씨와 범씨는 제나라로 달아나게 된다. 이때 조 간자는 한단을 차지하고 후일 한단은 조나라의 수도가 되는 것이다.
조양자의 집념과 항전
조간자의 아들 무휼은 나중에 춘추의 종말을 고하고 조(趙)나라를 세우는 조 양자(襄子)가 된다. 동 시대에 진나라의 권력을 잡은 가문이 지(智)씨 가문의 지백(智伯)이다. 지백과 한 조 위 삼가(三家)는 범씨와 중항씨 가문의 땅을 진(晉) 군주의 허락도 없이 서로 나누어 가진다. 이에 진나라 出公(출공)은 제(齊)나라와 노(魯)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여 지백을 포함한 한, 조, 위씨 집안을 치려 하였으나 지백과 삼진(三晉)은 출공을 공격하여 몰아낸다. 출공이 제나라로 달아나고 지백은 진 소공의 증손인 교(驕)를 세우는데 이가 진의공이다.
출공을 몰아내고 권력을 차지한 지백은 날로 교만해지며 한 조 위나라에 영지 할양(割壤))을 요구하며 압박하니, 한 강자, 위 환자는 지백의 강압에 굴복하고 영지를 갖다 바치고, 조(趙) 양자는 불복하여 전쟁을 벌이게 된다.당시 봉읍이던 경(耿:今山西河津南은 방어에 취약하여 연릉생에게 군대를 이끌고 진양성으로 옮겨 전쟁 대비를 명한다. 진양성의 성벽을 완성하고 국고를 넉넉히 하며 창고는 곡식과 풀로 가득 채워 전쟁 준비에 만전을 기한다.
진양성으로 본거지를 옮긴 조양자는 처절한 항전을 이어간다. 지백 연합군은 석달여 공성전을 벌였으나 조양자는 진양을 굳게 지키며 버텨낸다. 이후 지백은 분강의 물길을 진양성으로 돌리는 수공을 전개한다. 1년여에 걸친 수공에 3판(1.8M)이 물에 잠기고 식량이 바닥나며 조양자와 그의 신하와 백성은 동요가 일어난다.
이에 조양자는 장맹동으로 하여 이간계를 펼친다. 지백의 폭정에 염증을 느낀 한강자와 위환자는 조 양자의 이간계를 받아들인다. 결국 삼진 세력은 지백을 멸망시킨다.(BC 453) 진나라 3 경인 한호(한강자) 위구(위환자) 조맹(조양자)는 춘추의 막을 내리게 되는 삼가분진(三家分晉) 즉 세 가문이 晉나라를 나누어 통치하는 시대가 된다. 晉나라가 세 가문에 의해 나누어진 년도 BC453년을 전국의 시작으로 보는 역사가도 있다. 그러나 많은 역사가들은 이 세 가문이 주나라로부터 제후의 작위를 받은 403년부터 전국의 시작으로 인정하고 있다.

晉出公十一年(진출공십일년),知伯伐鄭(지백벌정)。趙簡子疾(조간자질),使太子毋卹將而圍鄭(사태자무휼장이위정)。知伯醉(지백취),以酒灌擊毋卹(이주관격무휼)。毋卹群臣請死之(무휼군신청사지)。毋卹曰(무휼왈):「君所以置毋卹(군소이치무휼),為能忍(위능인)。」然亦慍知伯(연역온지백)。知伯歸(지백귀),因謂簡子(인위간자),使廢毋卹(사폐무휼),簡子不聽(간자부청)。毋卹由此怨知伯(무휼유차원지백)。
지백이 취하여 무휼에게 강제로 술을 먹이고 그를 때렸다. 무휼의 신하들이 지백을 죽일 것을 청하자 무휼이 말했다. “ 주군께서 무휼을 택하신 것은 인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백에게 화나 있었다.
襄子立四年(양자립사년),知伯與趙(지백여조)、韓(한)、魏盡分其范(위진분기범)、中行故地(중행고지)。晉出公怒(진출공노),告齊(고제)、魯(로),欲以伐四卿(욕이벌사경)。四卿恐(사경공),遂共攻出公(수공공출공)。出公奔齊(출공분제),道死(도사)。知伯乃立昭公曾孫驕(지백내립소공증손교),是為晉懿公(시위진의공)。知伯益驕(지백익교)。請地韓(청지한)、魏(위),韓(한)、魏與之(위여지)。請地趙(청지조),趙不與(조부여),以其圍鄭之辱(이기위정지욕)。知伯怒(지백노),遂率韓(수솔한)、魏攻趙(위공조)。趙襄子懼(조양자구),乃奔保晉陽(내분보진양)。
지백이 더욱 교만해졌다. 한나라 위나라에 할양을 요구하니 한, 위는 지백에게 땅을 주었으나, 조양자는 주지 않았다 그 이유는 지백이 (술을 강제로 먹이고 때린) 鄭나라에서 치욕 때문이었다.지백이 화를 내며 한, 위의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를 공격하니 조양자는 두려워 진양으로 달아나 지켰다.
三國攻晉陽(삼국공진양),歲餘(세여),引汾水灌其城(인분수관기성),城不浸者三版(성부침자삼판)。城中懸釜而炊(성중현부이취),易子而食(역자이식)。群臣皆有外心(군신개유외심),禮益慢(례익만),唯高共不敢失禮(유고공부감실례)。襄子懼(양자구),乃夜使相張孟同私於韓(내야사상장맹동사어한)、魏(위)。韓(한)、魏與合謀(위여합모),以三月丙戌(이삼월병술),三國反滅知氏(삼국반멸지씨),共分其地(공분기지)。於是襄子行賞(어시양자행상),高共為上(고공위상)。張孟同曰(장맹동왈):「晉陽之難(진양지난),唯共無功(유공무공)。」襄子曰(양자왈):「方晉陽急(방진양급),群臣皆懈(군신개해),惟共不敢失人臣禮(유공부감실인신례),是以先之(시이선지)。」於是趙北有代(어시조북유대),南并知氏(남병지씨),彊於韓(강어한)、魏(위)。遂祠三神於百邑(수사삼신어백읍),使原過主霍泰山祠祀(사원과주곽태산사사)。
삼국(지백 씨 한, 위)이 진양을 공격한 지汾(분) 강의 물을 끌어와 진양에 水攻(수공)을 가하니, 물이 차지 않은 성벽은 3판(24자)에 지나지 않았다. 성안에서는 솥을 나무에 걸어 불을 때고,자식을 바꾸어 먹으며 이겨냈다. 신하들이 대부분이 변심의 마음을 품고 예의는 더욱 느슨해졌지만, 오직 고공만이 예의를 잃지 않았다. 양자가 두려워하고, 한밤중 재상 장맹동을 몰래 한(韓), 위(魏)로 보냈다. 한, 위씨와 함께 모의하여 3월 병술일에 세 나라가 지씨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